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13화 (113/120)
  • 113화. 뜻을 행할 뿐

    “어서 오시게.”

    “내가 올 줄 알았던 사람 같군.”

    “알았지.”

    노파는 카드를 탁탁 정리하더니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두었다.

    “내가 제법 용하거든.”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카드를 옆으로 쭉 밀었다. 능숙한 솜씨로 카드를 테이블에 펼친 노파는 그제야 벨데메르와 샤피로를 똑바로 응시했다.

    “앉지 그래. 이 늙은이 목 떨어지겠구먼.”

    벨데메르는 금방이라도 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낡은 의자에 앉았다.

    “그래, 궁금한 게 뭐지? 애정 운? 결혼 운?”

    그 자연스러운 질문에 벨데메르는 순간 애정 운이라고 대답할 뻔했다.

    보통은 아니군.

    벨데메르는 능구렁이 같은 수법에 넘어가지 않으려 정신을 단단히 잡았다.

    “금전 운이 궁금하실 것 같지는 않고.”

    노파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으면서 부채꼴로 펴진 카드 중 한 장을 손끝으로 잡아 빼냈다.

    “이게 내 답이네.”

    노파는 빼낸 카드를 뒤집어 벨데메르 앞으로 밀었다.

    “여사제라.”

    자신은 오로지 신의 뜻에 따라 행했을 뿐이라는 건가.

    “신은 왜 나를 돕는 거지?”

    조각상 안에 처박아 둔 것이 이제 와 미안해지기라도 한 건가? 웃기지도 않는군.

    “그야 모르지. 난 그저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할 뿐.”

    노파는 벨데메르 앞에 있는 카드를 다시 가져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카드를 가져가는 손이 있었다.

    “주인님, 이 사람입니다.”

    샤피로는 카드에 그려진 여사제가 눈에 익어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떠올렸다.

    “제가 맨 처음 주인님을 찾아 신전에 갔을 때, 기다리고 있던 신관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너무 오래되어 흐릿했던 기억이, 카드를 보자 다시 떠올랐다.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을 봤다니, 자네도 이런 쪽으로 기운이 좀 있나 보지?”

    “죽은 지 오래되었다고 하셨습니까?”

    샤피로는 다시 노파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아는 사람이십니까?”

    “헤스티아 신관이잖나. 헤스티아를 모르다니, 신전에는 전혀 발도 들이지 않는 모양이지?”

    그녀를 기리는 신전이 따로 있을 정도로 유명한 신관이었다.

    신의 뜻으로만 살았고, 죽어서는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작은 신전이라도 헤스티아가 신력으로 병을 치료하는 그림 하나씩은 다 걸려 있었다.

    “신의 뜻으로만 살았다?”

    벨데메르는 기가 차 웃었다. 저를 조각상에 봉인한 것도 신의 뜻, 봉인을 풀고 나올 수 있게 돕는 것도 신의 뜻이라니.

    한마음에 저리 많은 뜻을 품다니, 하여간 위대하신 분이었다.

    벨데메르는 차디찬 얼굴로 일어섰다.

    “이만 가지.”

    “애정운은 정말 안 궁금한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벨데메르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샤피로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주인님, 그쪽이 아닙니다.”

    “좀 걷고 싶군.”

    노파를 만나고 나오니 머리가 더 복잡했다.

    신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왜 굳이 저를 봉인했다가 다시 풀어 주려고 하는 것인가.

    중간에 뜻이 바뀌었다면, 그냥 풀어 주면 되는 게 아닌가.

    “먼저 들어가거라. 난 머리 좀 식히고 들어가지.”

    “예?”

    샤피로는 순간 꿀벌을 통해 들리는 르니예의 목소리에 벨데메르의 말을 놓쳤다.

    “르니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니요, 무슨 일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다만 르니예의 목소리가 갑자기 너무 크게 들려서 그쪽으로 일순 주의가 집중되었다.

    “꿀벌이랑 대화를 하는 중이십니다.”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르니예가 떠든다고 보는 게 적당했지만.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데?”

    “주인님이 더럽게 보고 싶다고 하시는군요.”

    샤피로에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르니예야 벨데메르에게 푹 빠져 있으니, 벨데메르를 보고 싶어 하겠지.

    그래서 중요한 말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더럽게 보고 싶다고?”

    “보고 싶어 죽겠다고도 하시네요.”

    “보고 싶어 죽을 정도인가.”

    벨데메르는 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고 싶어 죽을 정도란 말이지. 보고 싶어서 죽기 직전인데 참고 있다는 거지.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입가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드러난 입가에 채 숨기지 못한 미소가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중요한 말이었군.”

    샤피로는 작게 중얼거렸다.

    “집으로 가겠다.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예, 주인님.”

    진작 말할 걸 그랬다고, 샤피로는 속으로 후회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심기가 불편한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던 벨데메르는 한결 나아 보였다.

    푹 빠진 사람이 르니예 님 혼자는 아니군.

    “주인님, 그러지 마시고 르니예 님을 불러 결혼식에 관해 상의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샤피로는 좀 서두르고 싶었다.

    “그러면 르니예 님께서 주인님을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걸 멈춰 주실 테니까요. 듣고 있기가 상당히 곤욕스럽습니다만.”

    진심이었다. 르니예는 이제 보고 싶다는 말에 멜로디를 넣어 부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꿀벌을 붙들고 노래를 부르는 모양인지, 숨소리 하나하나 아주 생생하게 들렸다.

    샤피로는 그만 듣고 싶었다. 아마 꿀벌도 그러하리라.

    “르니예가 계속 노래를 부르면 네가 다른 일을 못 하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벨데메르는 정말 하는 수 없다는 듯, 못 이기는 척 샤피로의 말을 들어주었다.

    “……제가 가서 모셔올까요?”

    “이제 내가 상단으로 가도 되겠지.”

    거의 집 앞까지 다 와서 벨데메르는 걸음을 돌릴까 말까 고민했다. 배신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 중요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숨긴 건, 르니예가 너무했다. 그런데 벨데메르는 자꾸만 르니예를 이해하고 싶었다.

    오죽하면 그 말을 못 했을까. 그러면서 한편으로 저를 잃기 싫어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면, 조금 남아 있던 배신감도 사라졌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풀어지는 자신이 어이가 없긴 하지만, 르니예는 반성을 하고 있지 않나.

    죽을 만큼 보고 싶은데도 참으면서.

    그러다가 정말 죽어 버리면? 그러면 서로 곤란해지는 것이었다.

    벌은 그만하면 충분했다.

    “상단으로 가겠다.”

    그리고 웃기는 일이었지만 그 역시 르니예가 보고 싶었다.

    “주인님, 집에 먼저 들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샤피로의 시선에 반쯤 열린 대문이 잡혔다.

    “누가 집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르니예인가?”

    “르니예 님은 아직 상단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문을 따고 들어올 사람이 없었다. 벨데메르는 허리춤에 찬 검을 언제라도 뺄 수 있게 쥐며 열린 대문을 향해 들어갔다.

    “인기척은 없군.”

    “도둑이었을까요.”

    샤피로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집 구석구석을 살폈다. 샤피로는 지하에 마련된 연구실로 향하고, 벨데메르는 이 층으로 향했다.

    방 하나하나 살피며 경계하던 벨데메르는, 침실 옆 서재 문을 열어보고 그 자리에 멈췄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데, 금지된 주술에 관해 적어 놓은 그 낡은 노트만 사라진 상태였다.

    “기어코 하려는 모양이군.”

    어리석어.

    꼭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르니예의 타령을, 듣기 싫다 말도 못 하고 듣던 꿀벌은 에니가 서류를 잔뜩 들고 들어온 덕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게 다 뭐야?”

    “아가씨께서 결재하실 서류죠.”

    에니는 쓸데없이 상큼하게 웃었다. 르니예는 하루가 다르게 쌓이는 일거리에, 벨데메르도 보고 싶어 할 틈이 없었다.

    “이거부터 보면 돼?”

    “아니요, 이거부터요.”

    에니는 이력서 더미를 가리켰다.

    “일손이 너무 부족해요.”

    이게 다 콜론의 독특한 채용 방식 때문이었다. 상단의 점원에서부터 저택의 사용인까지 전부 콜론에게 빚이 있었다.

    그들은 빚 대신 일을 했지만, 끝도 없이 불어나는 이자 때문에 그만두지도 못했다.

    그러다 르니예가 일한 만큼 제대로 쳐 빚을 탕감해주자, 더 이상 상단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어진 사람이 많아졌다.

    그들 중 몇몇은 남았지만, 반 이상이 일을 그만두고 나가버렸다.

    해서 지금 저택과 상단은 아주 적은 인력으로 매우 간신히 굴러가는 중이었다.

    “이 상태에서 무역선 들어오면 우리 감당 못 해요.”

    “그래, 사람부터 뽑자. 언제 면접 보고 언제 일 가르칠지 막막하다, 막막해.”

    “경력 있는 사람 위주로 이력서는 추려왔어요.”

    르니예와 에니는 그때부터 자정이 넘어갈 때까지 이력서를 검토하고, 급한 서류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부터 일어난 에니는 서류에 합격한 이들에게 면접을 오라고 연락을 돌렸다.

    르니예는 퀭한 얼굴을 하고 나와 이틀에 걸쳐 면접을 보았고, 그중에 괜찮은 사람을 뽑았다.

    “내일부터 일하러 오시면 됩니다.”

    면접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상단 출입증이 달린 목걸이가 지급되었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숙소도 지급된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내일부터입니까?”

    “아, 숙소요? 정리가 덜 되긴 했지만 비어 있는 방은 많으니까 원하시면 안내해 드릴게요.”

    에니는 다른 하인을 시켜 새 점원이 된 남자에게 숙소를 안내하게 시켰다. 그 남자 말고도 몇몇이 숙소 이야기를 듣더니 따라나섰다.

    “비어 있는 방 아무거나 쓰면 된다고 하십니다.”

    “고맙습니다.”

    안내해 준 하인이 사라지자 그들은 숙소 방을 하나하나 열어 보며 다른 이가 있는지 살폈다.

    “비어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 뒤에야 그들은 짐을 풀었다.

    “저택에 경비도 허술하고, 사용인도 많지 않습니다.”

    뒤늦게 합류한 사내가 저택의 구조와 인력에 대해 보고했다.

    “일이 쉽겠군.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 없지. 가서 저하를 모셔와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