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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12화 (112/120)
  • 112화. 더럽게 보고 싶은

    “죽은 이를 살려 보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벨데메르 님은.”

    남자는 마법사였다. 마법을 쓰기보다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 쪽에 가까웠지만, 기본적으로 마력을 운용할 줄은 알았다.

    그는 점술가에게 벨데메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역사에 나오는 그 위대한 벨데메르를 떠올렸다.

    그는 금지된 주술을 사용한 뒤에 자취를 감추었다. 금지된 주술은 무릇 생명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에 관련된 경우가 많았다.

    “나를 아는가?”

    “마법을 탐구하는 자가 어찌 벨데메르 님을 모르겠습니까.”

    남자는 벨데메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제게 방법만 가르쳐 주십시오. 제발, 제발, 제가 뭐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샤피로가 남자에게서 벨데메르를 떼어놓았다.

    남자는 바닥에 엎어져 흐느껴 울었다.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없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도 실패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주술을 쓴 벌을 아직도 받는 중이다.”

    방법을 알지 못하니 가르쳐 줄 수도 없다. 그래, 실패했다. 그 주술은 완전히 실패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만이었다.

    “힘들겠지만 그 아이는 보내 주는 게 좋겠군.”

    벨데메르는 울 기운도 없이 무너져 내린 남자를 억지로 내보내는 대신, 자기가 밖으로 나왔다.

    아주 오랜만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벨데메르에게 치욕의 순간이자 패배의 날이었다. 해서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었다.

    봉인을 푸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거의 잊고 살았다.

    “왜 실패했을까.”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된 게 있었겠지.

    이제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어디에 실수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일부러 방해를 한 건가.”

    벨데메르는 서재로 들어왔다. 그는 아주 낡고 오래된 노트를 꺼냈다. 끝이 다 떨어져 나가고 잉크가 바래 글자는 드문드문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치열하게 연구했던 흔적만큼은 남아 있었다.

    “헛된 짓이지.”

    이제 와 왜 실패했는지 따지는 것이 의미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잔잔한 호기심이 일었다.

    정말 왜 실패했을까.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이라면,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금지된 주술을 다시 해 보겠단 뜻은 아니었다. 그저 실패한 원인이 조금 궁금해졌을 뿐이었다.

    “주인님, 그자는 돌려보냈습니다.”

    “잘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조심스레 노트를 넘기던 벨데메르가 고개를 들어 샤피로를 쳐다보았다.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냐.”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 점술가 말입니다.”

    처음부터 영 수상했다. 르니예가 점술가의 천막에 데려갔을 때는 르니예가 그 노파의 장사 수완에 당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언젠가 거액의 돈을 요구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직 돈을 요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원이 목적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세상 다 산 늙은이가 무슨 소원이 있겠냐면서, 소원도 됐다고 했습니다.”

    샤피로는 점술가의 목적이 의심스러웠다. 아무런 목적 없이 르니예를 도와준다고?

    물론 세상에 가끔 가다 그런 사람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 노파는 그런 종류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오늘은 죽은 아이를 주인님께 보냈죠. 이런 식으로 소원을 알린 적은 없습니다.”

    간절한 소원을 알게 되면, 노파는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르니예에게 연락을 했다.

    그러니까 그 노파는 이 집도, 벨데메르의 존재에 대해서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소원을 빌 사람을 벨데메르에게 직접 보냈다?

    그것도 죽은 아이를 되살려 달란 소원을?

    “샤피로.”

    벨데메르는 노트를 완전히 덮었다.

    “그 점술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 * *

    ‘소원을 이뤄 주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에이, 숙부,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 이제 어린애 아닙니다.’

    ‘저하, 아니, 레브론, 잘 듣거라. 이건 아주 중요한 얘기야.’

    노르딕 백작이 레브론을 이름으로 부를 땐,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뿐이었다.

    그러기에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이란 단어가 너무 허무맹랑했지만, 레브론은 일단 잠자코 들었다.

    ‘영지도 없고, 작위도 없던 우리 가문이 어떻게 단숨에 백작이 되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느냐?’

    ‘그거야 숙부께서 공을 세워 그런 것 아닙니까? 습격당하는 아버님을 구하셨다고요.’

    ‘그랬지. 하지만 그날 전하를 습격한 배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왕국을 쥐 잡듯이 뒤졌는데도 말이야. 게다가 전하는 원래 그 길로 갈 계획도 아니셨지. 난 정식으로 검술을 배운 적도 없었고.’

    ‘모든 게 우연이란 말씀이십니까?’

    ‘아니, 모든 게 소원을 빌었기 때문이란 뜻이다.’

    쓰러져 가는 가문, 희망이 없는 미래. 한창 혈기가 끓어오르던 시절 백작은 술이나 퍼마시는 한량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백작은 술김에 여행자로 보이는 이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

    ‘여인인지 사내인지 언뜻 봐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 사내가 내게 보석과 지도를 주었지.’

    백작은 반신반의했다.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이라니. 그건 어릴 적 어머니가 자기 전에 들려주던 옛날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그는 늘 조금씩 술에 취해 있었다. 술김에 충동적으로 지도에 적힌 대로 신전을 찾아갔다.

    ‘가는 순간 술이 깨더구나.’

    삼십 년이 넘게 흘렀어도 백작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조각상은 신성함 그 자체였다. 백작은 영지도 있고 작위도 있는 귀족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조각상은 그에게 북서쪽으로 가다가 사과나무를 만나면 멈추라고 했다.

    백작은 북서쪽 사과나무로 향했고 그 아래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사기당했나 싶었던 순간 웬 마차가 하나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시꺼먼 옷을 입은 놈들이 나타나 칼을 휘둘렀다. 난 도망가려고 했어.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더군.’

    그렇게 정신을 차렸더니, 그는 왕을 구한 공신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영지도 작위도 없던 젊은 노르딕 가문의 후계자는, 백작 작위와 영지를 받았다.

    왕의 총애는 덤으로 얻었다. 그는 1왕자를 낳고 사망해 비어 있는 왕비 자리에 제 여동생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노르딕 가문은 승승장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왕이 되게 해 달라고 할 것을.

    기껏 빈 소원으로 얻은 게 겨우 백작 자리라니.

    그리하여 백작은 예전에 소원을 빌었던 그 신전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찾으셨습니까?’

    ‘아니, 찾지 못했다. 술에 취한 채 갔던 곳이라 기억이 흐릿했지.’

    그렇게 포기하고 살다가 백작은 샤피로를 만났다. 왕이 앓아눕고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어 아군을 늘려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백작은 무기와 돈을 조달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펠레포네 영지는 작긴 했지만, 무역상이 많았고 영주는 소문나지 않은 알부자였다.

    휴가라는 명분으로 그를 포섭하러 간 그는 샤피로를 발견했다.

    샤피로는 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남자는 샤피로를 돌아보았고 흠칫 놀랐다.

    그를 보며 샤피로는 싱긋 웃고서 돌아섰다. 남자는 조금 두려워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장면이었지만, 이미 소원을 빈 사람은 그 눈 맞춤이 뜻하는 바를 모를 수 없었다.

    ‘펠레포네 영지의 콜론이란 남자다. 그자가 그 보석과 지도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해. 길드에 보석과 지도를 훔쳐 오라고 의뢰했다.’

    백작은 레브론의 손을 꽉 쥐며 당부했다.

    ‘만일 우리 일이 실패하거든, 너는 펠레포네 영지로 가라. 가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보석을 손에 넣고 소원을 빌어라.’

    그리고 레브론에게 그런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마지막 남은 수단이 그런 허무맹랑한 것이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에게 남은 마지막 수단이었으니까.

    궁을 탈출한 레브론은 펠레포네 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상단주께서는 어떠세요?”

    “두 번이나 연달아 쓰러지셔서 온전히 거동하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또 충격받는 일이 없게 하라고 의원이 몇 번이나 당부하고 돌아갔다. 충격받을 만한 큰일은 이미 다 말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버지가 너무 성급하게 쓰러지셨다니까.”

    르니예도 상단을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믿는 구석도 있었다.

    르니예에게는 돌멩이를 금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체이스라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는 르니예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었다.

    체이스는 상단 소유의 집을 무단 점거했고, 후에는 상단에서 아예 먹고 잤다. 르니예는 그를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보호해 주고, 소원까지 이루게 해 준 몫으로 금을 받아왔다.

    ‘칼만 안 들었지, 완전 강도 아니야?’

    체이스는 투덜거렸지만, 저항하진 않았다. 왜? 금은 또 만들면 그만이었으니까.

    “내 말을 다 듣고 쓰러지셔도 늦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는 그 성격 고쳐야 한다니까.”

    르니예는 혀를 끌끌 찼다. 그렇다. 르니예는 원래도 딱히 효녀는 아니었고, 콜론은 르니예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고 후회 중이었다.

    “우리 상단은 이제 고리대금업은 안 할 거야. 그거부터 정리하자.”

    “네, 아가씨.”

    르니예는 상단을 구조부터 싹 뜯어고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결혼식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예정대로 진행할까요?”

    “응, 일단 준비는 해 줘.”

    소원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는 건 다 해 봐야 하니까.

    상의를 끝내고 에니가 나가자 르니예는 한숨을 지으며 턱을 괴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벨데메르에게도 마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충분히 준다고 했다. 기다리겠다고 했고.

    “근데 더럽게 보고 싶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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