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11화 (111/120)
  • 111화. 이상한 소원을 빈 이유

    “주인님, 주인님!”

    벨데메르가 들고 있던 술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샤피로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

    “진정하십시오, 주인님.”

    벨데메르는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감정이 끓어오르다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결혼식 문제도 있으니 르니예 님께 제가 한번 다녀올까요?”

    “결혼식?”

    결혼식을 잊고 있었다. 르니예와 하는 두 번째 결혼식.

    그는 평생 결혼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르니예는 그의 생각을 두 번이나 깨부쉈다.

    “결혼식 무를까요?”

    “……그럴 순 없지.”

    결혼식을 하고 나면 소원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었다. 소원이 이뤄지고 나면 르니예와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래서, 그래서 그랬군.”

    르니예는 언제라도 벨데메르를 떠날 사람처럼 굴었다.

    소원이 이뤄지고 나면 감정이 지금과 같지 않을 거라느니, 했던 말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르니예는 소원을 빨리 이뤄서 저를 떠나고 싶었던 건가?

    “그랬었던 모양이군.”

    벨데메르는 술병을 들었다. 떠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을 내가 붙잡아두고 있었던 거로군, 눈치도 없이.

    “르니예에게 갈 필요 없다, 샤피로.”

    “예?”

    “소원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오겠지.”

    * * *

    “아버지, 괜찮아?”

    밤에 몰래 나갔던 콜론은, 나갔을 때처럼 새벽이슬을 맞으며 조용히 들어왔다. 그러고는 며칠을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괜찮다.”

    복수는 끝이 났다. 후작은 고통스럽고 불명예스럽게 죽었다. 1왕자를 위해 일했지만 그를 배신했단 누명을 쓴 채 죽었으며, 죽는 과정은 길고 끔찍했다.

    ‘형님,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마코야데스가 물었다. 거기 모인 모두가 다 그 생각을 했을 터였다. 복수만을 위해 살았는데, 그 복수가 끝나 버렸다.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야지.’

    콜론은 르니예를 떠올렸다. 물려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상단주가 되었다고 했다.

    보고 배운 게 있으니 기본은 하겠지만, 아직 가르칠 게 많았다.

    결혼식도 또 올린다니 그것도 준비해야지. 나중에 손주가 생기면 손주를 보는 낙으로 살면 될 것이다.

    “아버지!”

    저를 부르는 르니예의 목소리에 콜론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의원 불러요?”

    “됐다.”

    르니예가 상단을 빈털터리로 만들었단 소식에 콜론은 순간 정신을 잃었다.

    복수를 위해 키운 상단이었지만, 어느새 그의 전부가 된 상단이기도 했다. 재산은 또 어떤가.

    그는 살해 협박을 숱하게 받으며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그가 상단을 떠난 그 잠깐 새에, 상단이고 재산이고 다 사라졌다고 해 순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쓰러질 일도 아니었다.

    “상단을 운영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 비상금 숨겨둔 게 있으니, 그걸로 일단,”

    “그거 벌써 빼서 썼어.”

    콜론은 또 멈칫했다. 비상금도 빼서 썼어? 비상금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고서 그걸 가져다 썼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쓰고, 결혼은 무슨 돈으로 하려고!”

    “아버지, 진정해요. 심호흡해, 심호흡.”

    콜론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래, 화낼 필요 없다. 방법은 또 있으니까.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었지만, 이제 쓸 때가 온 것이다.

    “그 보석, 네가 가지고 있지?”

    “보석? 무슨 보석?”

    “소원을 이뤄 주는 보석.”

    모른 척을 하려던 르니예가 흠칫했다.

    “그거 쓸 때가 됐다.”

    “나를 위해서 쓰라며.”

    “그래, 너를 위해서. 돈 한 푼 없이 너 어떻게 결혼하고 상단 운영할래?”

    콜론은 불안했다. 르니예가 저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하며 괜히 큼큼 목을 가다듬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진정하고 들어 봐요.”

    “너, 너, 설마.”

    “내가 그 소원을 써 버렸네? 근데 걱정하지 마. 나를 위해서 썼어요.”

    그래, 설마 뭐 허튼 소원을 빌었겠어? 귀족 작위를 달라고 했다거나 그랬을 수 있지. 콜론은 끝까지 르니예를 믿어 보려고 했다.

    “이번에 결혼하는 남자가 소원을 빌고 받은 사람이야.”

    왜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나.

    “너, 이놈의 자식……!”

    벌떡 일어나는 콜론의 뒤로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평생 한 번밖에 못 쓰는 소원을 그딴 곳에 써?

    “그게 내가 그러려던 것이 아니라 실수로, 아버지?”

    해명하던 르니예는 콜론이 일어선 채로 돌처럼 굳은 것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르니예가 한두 번 눈을 깜빡이는 동안 콜론은 서서히 중심을 잃더니 털썩 쓰러졌다.

    “아버지!”

    르니예는 바로 의원을 불렀다. 콜론이 쓰러진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충격이 크셨나 봅니다. 깨어나셔야 알겠지만, 한동안 거동이 불편하실지도 모릅니다.”

    “돌아가시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또 충격을 받으시면 그럴 수도 있으니, 최대한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르니예는 쓰러진 콜론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큰일은 다 해결된 줄 알았더니, 왜 이렇게 일이 다 꼬이지?

    아버지도 쓰러지고 벨데메르도……. 르니예는 벨데메르가 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백 번이고 더 찾아갔지만, 그는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특히 신과 관련된 일에 더 날을 세웠다.

    신이 그를 봉인했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런 벨데메르에게 실은 내가 신의 뜻으로 두 번째 기회를 얻고, 심지어는 그 덕분에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말했으니 그 입장에서는 불쾌하고도 남았다.

    혹시 그를 향한 내 감정도 소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다른 건 다 해명할 수 없겠지만, 르니예는 적어도 제 마음만큼은 온전히 전하고 싶었다. 비록 그게 부질없는 짓일지라도.

    “하아.”

    긴 한숨에 심란한 속이 묻어나왔다. 당장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르니예는 참았다.

    벨데메르가 혼자 있을 시간을 달라고 했으니, 그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고 싶었다.

    생각 정리가 되면 부르겠지.

    “이번엔 기다려야 돼. 기다리자.”

    만약에 내가 소원을 두 번 빌어서 벨데메르의 봉인이 풀리지 않는 거면 어떡하지?

    문득 걱정이 몰려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르니예는 해결할 방법을 몰랐다.

    그렇다면 그걸 아는 사람을 찾아가면 좋은데, 아는 사람이 있을까?

    “있겠냐고.”

    르니예는 좌절했다.

    “……갔다 올까.”

    샤피로는 상단에 다녀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벨데메르는 아닌 척하면서 계속 르니예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르니예 님을 불러와야 하나.”

    곁에서 보아하니 르니예를 보고 싶어 하긴 하는데, 막상 르니예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저러는 것이었다.

    벨데메르가 저렇게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래서 결혼식 날 입장이나 하실 수 있으려나.”

    그러면서도 또 결혼을 무른단 소리는 없었다. 대충 하란 명령도 없었다.

    그러니까 르니예에 대한 마음은 그대로인데, 화만 좀 난 것이다.

    “아니야, 꼭 차인 사람 같으시단 말이지.”

    벨데메르의 모습은 마치 차일 줄 몰랐는데 차이고서, 네가 나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나나 보자 어디, 이러는 것 같달까.

    “하, 복잡하다, 복잡해.”

    샤피로는 요즘 평소보다 많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벨데메르가 의기소침하고 르니예가 시무룩해 있어도, 정원에 낙엽은 쌓인다.

    샤피로는 열심히 낙엽을 쓸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계십니까?”

    “누구십니까?”

    벨데메르의 집은 찾아올 사람이 거의 없었다. 들리는 목소리는 낯설었고, 확실히 떨고 있었다.

    “저, 여기서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남자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샤피로는 또 큰 한숨을 쉬었다.

    이제 우리 주인님이 소원 들어준다는 걸 개나 소나 다 알게 됐나 보군.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골목에 있는 점술가 어르신에게 들었습니다.”

    “아.”

    그 노파라면 안다. 르니예는 그 점술가에게 꼭 이뤄야만 하는 소원이 있는 사람 목록을 받아 오곤 했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벨데메르는 최대한 빠르게 소원 개수를 채우란 명령을 거둔 적이 없었다. 하여 샤피로는 남자를 집 안으로 들였다.

    “감사합니다.”

    샤피로는 남자의 소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걸치고 온 낡은 로브 안이 불룩하고 남자의 자세가 구부정한 걸로 보아, 그는 등에 아이를 업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뻔했다. 아픈 아이를 건강하게 해 달란 것이겠지.

    “아이는 여기 눕히고 잠깐 기다리십시오.”

    “예.”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로브를 벗고 아이를 소파에 눕혔다. 그사이 샤피로는 벨데메르를 데려왔다.

    “소원을 빌고자 한다고.”

    “예, 점술가 어르신이 이리 가면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 무슨 소원이지?”

    벨데메르는 흥미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르니예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는 르니예가 저를 속여서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신이 농간을 부려서 화가 난 건지, 애초에 화가 나긴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제 아들이, 많이 아픕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래, 그러지.”

    “주인님.”

    무난한 소원이라 생각하며 들어주려고 하는 벨데메르를 샤피로가 멈춰 세웠다.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샤피로는 아이의 옆에 앉아 맥이 뛰는 자리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사망했습니다.”

    “방금 숨이 넘어갔습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았어요.”

    남자는 벨데메르 앞에 대뜸 무릎을 꿇었다.

    “아직 영혼은 남아 있을 겁니다. 제발 우리 아들을 좀 살려 주세요.”

    “……죽은 이는 살릴 수 없다.”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주신다 들었습니다. 아들만 살려 주시면 뭐든, 뭐든 하겠습니다.”

    벨데메르는 노도처럼 밀려드는 기억에 말을 잃었다. 똑같은 일이 있었다. 그땐 아버지 혼자가 아니라 부모가 같이 왔다는 점이 달랐지만.

    그들도 와서 죽은 아이를 살려 달라고 했다. 방금 죽었으니 영혼은 남아 있을 거라던 말도 똑같이 했다.

    “소원으로도 죽은 이를 살릴 수 없습니다. 너무 늦게 오셨어요.”

    샤피로 역시 기이한 기시감에 떨면서도 남자를 달래 내보내려고 했다.

    “그럼 비법, 비법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비법이라니?”

    “죽은 이를 살려 보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벨데메르 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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