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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09화 (109/120)
  • 109화. 제 눈에는 여전히 레이디처럼 보여서요

    “제 눈에는 여전히 레이디처럼 보여서요.”

    “그거…….”

    르니예는 살짝 놀랐다. 에드윈과 처음 만났던 날, 그가 르니예를 구해 주고 나눴던 그 대화였다.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저는 레이디가 아닌데요.’

    ‘그렇습니까. 제 눈에는 레이디처럼 보여서요.’

    아직도 잊지 못한 그날의 대화가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혹시 결혼하기 전에 나 만났던 거, 기억하고 있었어요?”

    “기억 못 하는 줄 아셨군요.”

    기억 못 할 수가 없었다. 넘어진 마차, 딱 봐도 강도처럼 보이는 남자들, 그 앞에 드레스가 찢어진 채로 길길이 날뛰던 여자를 어떻게 잊겠나.

    그때 르니예는 비싼 드레스를 찢어먹었다면서, 절대 가만두지 않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에드윈은 처음에는 그들이 르니예의 하인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납치범이었지만.

    “부인을 처음 보던 날, 바로 기억했습니다.”

    “그랬구나.”

    에드윈은 르니예가 기억 못 하는 줄 알고, 말하지 않았다.

    “그날도, 며칠 전 일도 고마웠어요.”

    “고맙다는 인사는 내가 해야겠죠, 부인.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미안했고.”

    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그는 떠날 생각이었다.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새로 시작할 계획이었다.

    “내가 못난 것을 부인 탓으로 돌렸던 거, 사과합니다. 그리고 부인에게 상처를 준 것도요.”

    르니예와 결혼해 기사단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 말을 하던 당시의 에드윈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그래서 가문을 되살리지 못했단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받아들였다.

    “용서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내가 후회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어요.”

    에드윈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냥 웃어 보였다.

    울자니 너무 못난 놈 같아 보이고, 표정을 지우자니 화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그들의 시작과 중간은 찌푸린 나날이었으나, 마지막은 웃는 낯으로 보내 주고 싶었으므로.

    “에드윈.”

    르니예는 그와 마주 보며 미소를 짓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아마도 부를 일이 없을 이름을.

    “당신을 용서할게요.”

    이제야 좀 제가 알던 에드윈인 것 같았다. 이제야 제가 사랑했던 에드윈과 작별을 하는 기분이었다.

    끝.

    이것이 그들의 끝임을,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전엔 에드윈과 헤어지는 상상을 간혹 했었다. 어떤 상상이든, 끝은 동일했다.

    에드윈이 후회하며 제게 매달리는 상상. 그러면 저는 후회하는 에드윈을 선심 쓰는 척 받아 주는 것으로 상상은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에드윈과 진짜 끝내려고 보니, 그가 후회하고 매달려 주었으면 좋겠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담백하게 인사를 해 주어 고마웠다.

    르니예는 이제 에드윈을, 에드윈을 미워하고 사랑하며 저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나날을, 추억이란 이름 속에 묻어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꺼내 보는 날이 있겠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뒤돌아보지 말고 홀가분하게 가요.”

    나도 그럴 테니까.

    르니예는 에드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손을 맞잡았다.

    “혹시라도 그자가 질리거든 언제든 내게 오세요, 부인.”

    “부인?”

    농담을 섞어 건넨 에드윈의 진심은 타이밍이 좀 나빴다.

    하필이면 씻으러 들어갔던 벨데메르가 딱 그 말을 할 때 나왔다.

    “이제 부인이 아니지 않나?”

    그는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씻고 나오자마자 르니예와 에드윈이 손을 잡고 있고, 에드윈은 기다리겠다는 소리나 지껄이고.

    거기에 호칭은 아직도 부인이었다.

    “이혼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부인이지?”

    “입에 붙어서 그만.”

    에드윈은 르니예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럼, 불청객은 이만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에드윈은 벨데메르를 향해 눈인사하고, 르니예와 마지막으로 눈을 맞췄다.

    “아까 한 말, 그냥 한 거 아닙니다. 진심이에요, 부인.”

    “……지금 저자가 내게 결투를 청하는 건가?”

    감히 져놓고 다시 도전해? 벨데메르는 진짜 검이라도 잡을 태세였다.

    “진정해요, 벨데메르.”

    르니예는 피식피식 웃으며 그의 허리를 붙들었다. 막 씻고 나온 벨데메르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이래서야 목욕도 편히 못 하겠군.”

    벨데메르는 돌아서서 르니예를 품 안에 가뒀다.

    “같이 할 걸 그랬나?”

    “농담이 많이 늘었네요, 벨데메르.”

    르니예는 키득키득 웃었다. 르니예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벨데메르는 목 끝까지 튀어나온 말을 삼켰다.

    농담이 아니라는, 그 말을.

    * * *

    “자식이 원수라더니.”

    콜론은 목덜미를 꾹꾹 주물렀다. 르니예 소식을 듣자마자 뒤통수부터 척추까지 찌르르한 통증이 퍼졌다.

    “여행을 가라고, 제발 가라고 해도 안 가더니, 가지 말아야 할 때는 수도로 여행을 가?”

    콜론은 자신의 계획에 르니예가 말려드는 걸 원치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냐, 마코?”

    후작저에서 들려온 소식에 콜론은 잠깐 쓰러질 뻔했다.

    “어릴 땐 그래도 말을 좀 들었는데, 나이 먹을수록 말을 안 들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놀고먹으라는데, 그것도 안 들어.”

    콜론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르니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놀고먹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아, 그럼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인 줄 아셨어요? 본인도 대충 눈치채고 있는 거 같더만.”

    르니예는 성인이다. 엄마를 잃은 세 살배기 어린애가 아니란 뜻이었다.

    “그래도 계획은 성공했잖아요. 오히려 더 잘됐지, 뭐.”

    콜론은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는 많은 돈이, 그것도 꾸준히 오랫동안 필요했다.

    그건 주로 인건비였다. 콜론은 후작저에 자기 사람을 심었다.

    처음에는 허드렛일하는 하인 한 명, 주방 일 하는 하녀 한 명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느리게, 하지만 꾸준히 한 명씩, 한 명씩, 자기 사람으로 후작저를 채워 나갔다.

    그중에는 피해자 가족도 있었다. 그들은 자진해서 후작저에 들어갔다. 복수를 위해서, 그들은 후작의 악행을 참고 견뎠다.

    “그중에 르니예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던 거지. 천운이 따랐어.”

    벨데메르를 지하실로 안내한 그 노인이 르니예를 알아보았다.

    그는 작전의 시작을 조금 앞당겼다. 포도주에는 독약을 타는 척하며 소금물을 넣었다.

    어떤 잔을 선택해도 르니예는 사는 판이었다. 그걸 모르는 에드윈이 두 잔을 다 마셔 버렸지만.

    “소공작이 그걸 발견한 것도 천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죠, 형님.”

    “그건 정말 예상치 못했는데, 하늘이 우릴 돕나 보군.”

    후작이 반란을 돕다가 발을 뺐다는 식으로 꾸밀 작정이었다. 마코는 노르딕 백작저 및 그의 가신들의 집에서 반란의 증거물을 훔쳐서 후작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

    원래 계획은 하인 중 하나가 패러히트 공작에게 밀고를 하여 공작이 발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도 없이 소공작이 그걸 딱 찾아내 버린 것이다. 덕분에 일은 쉽게 풀렸다.

    “따님하고는 알아서 잘 푸시고. 나는 그만 일하러 가 봅니다.”

    지난 이십 년이 콜론의 몫이었다면, 이제 마코의 차례였다.

    “거기서 만납시다, 형님.”

    * * *

    “저기, 벨데메르?”

    “응.”

    “이제 그만 풀어 주겠어요?”

    벨데메르는 너무나 진심이었다. 르니예가 제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게, 저와 르니예를 묶어두는 행위에 말이다.

    그는 심지어 마차에서까지 르니예와 제 손목을 묶어 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내내 깍지를 끼고 왔다.

    “그대를 믿을 수가 없어.”

    “그 말은 좀 속상하네요. 내가 그렇게 신뢰를 잃을 만한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항구에서 패싸움.”

    그 이야기가 나오면 또 르니예는 할 말이 없어졌다.

    “후작저에서 실종.”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잖아요.”

    “그러니 문제라는 거야. 그대의 의지도, 그대의 의지가 아닌 것도 전부 다 그대를 위험하게 만들잖아.”

    벨데메르는 하루가 다르게 심약해져 가는 자신을 느꼈다. 소원 개수를 빨리 채워 버려야겠다.

    마법이라도 자유롭게 써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서는 풀어 줘야죠.”

    르니예는 수도에서 내려오는 길에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아버지 앞에 외간 남자와 손목을 묶은 채 나타날 수는 없으니.

    “바로 근처에 있겠다.”

    “꿀벌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꿀벌은, 벨데메르에게 호되게 혼난 뒤로 르니예의 뒤를 잘 쫓아다녔다. 조금, 약간, 많이 성가실 정도로.

    벨데메르는 영 풀어 주기 싫은 얼굴로 미적미적 밧줄을 풀었다.

    르니예는 그에게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고 아버지가 갇혀 있는 영주의 별장으로 향했다.

    “아버지.”

    다행히 콜론은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펠레포네 영주가 잡혀간 후에는 사비로 하인까지 두고 있었다.

    “왔니? 앉아라.”

    콜론은 르니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은 뜻대로 되는 법이 아닌지, 결국 알려 주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려 줄 때가 도래하고 말았다.

    “물어볼 게 있어요.”

    “그래.”

    “어머니, 셰론 후작이 죽인 거 맞아요?”

    콜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르니예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 사람을 공작으로 만들 뻔했다고요.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내 손으로!”

    “아니. 네가 무슨 짓을 했어도 그놈은 공작이 되지 못했을 게다.”

    2왕자의 반란 소식을 접하고 콜론은 작전을 두 개로 짰다.

    반란이 성공하면 후작은 처형당할 테니,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다.

    반란이 실패하고, 셰론 후작이 그 공으로 공작이 된다면, 공작 작위를 받기 직전에 끌어내릴 예정이었다.

    가장 기쁜 일을 앞두었을 때, 그때가 복수의 적기 아니겠나.

    “그냥 죽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지.”

    그건 셰론 후작에게 너무 자비로운 처사였다.

    “……그럼 내가 아버지 작전을 망친 거예요?”

    “그다지.”

    “솔직히 말해 주면 좋았잖아요.”

    콜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르니예는 자기 손으로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를 도운 것 때문에 수도에서부터 내내 밤잠을 설쳤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그래, 말해 봐라.”

    “에드윈이랑 이혼했어요.”

    어차피 이혼, 실은 사별이지만, 아무튼 갈라놓으려고 했다. 귀족 지위는 조금 아깝지만 이번에 르니예가 수도로 데리고 온 놈도 귀족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그건 괜찮다.

    “그리고 상단도 내가 운영하기로 했어요.”

    “그래, 어차피 너한테 물려주려고 했다.”

    “그리고.”

    “또 있어?”

    콜론은 좀 불안해졌다.

    “상단 재산을 좀 썼어요.”

    “……얼마나?”

    “거의 다?”

    콜론의 동공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아니, 아버지가 사용인들 월급도 제대로 안 주고, 이자도 너무 높게 받고, 그래서 내가 그거 좀 해결했어요.”

    르니예는 콜론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느라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벌어다 줄게, 아버지. 어?”

    드디어 고개를 든 르니예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콜론과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

    어째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나. 자식이 원수라는 말은 지금 썼어야 했다. 콜론은 그렇게 옆으로 픽 고꾸라졌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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