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셰론 후작저의 비밀
상단을 떠나기 직전, 에드윈은 후작에게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후작저에서 무도회가 열릴 예정인데 반드시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초대는 감사하지만, 저는 무도회에 갈 자격이 없습니다.’
에드윈은 편지를 가져온 후작의 시종에게 거절 의사를 전달했다.
‘후작님께서 라포어 경이 꼭 오시길 바라십니다. 무도회는 얼굴만 비치셔도 될 겁니다.’
시종의 말속에서 무도회는 후작이 그를 불러들일 핑계라는 속뜻이 읽혔다.
후작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에드윈은 결국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때는 에드윈도 몰랐다.
후작저에서 르니예와 벨데메르를 마주칠 줄은.
“아, 내가 자네를 곤란하게 만들었나?”
“아닙니다.”
에드윈은 르니예를 등지고 섰다. 이미 눈이 마주친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르니예를 보면, 특히 벨데메르 곁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면 기분이 좋질 않았다. 싸우지 않고도 진 기분이었다.
잔잔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패배감이 몰려들었고, 죄책감이 서렸다. 그 속에 후회가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인제 와서 그런 감정은 아무 소용이 없겠지.
“자네 전 부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번 일에 공이 커서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여기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후작님.”
“무슨 소리야, 자네도 애써 주었는데.”
후작은 에드윈의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왔다. 그러고는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보다 내가 자네와 할 이야기가 좀 있는데 말이야.”
그럴 줄 알았다. 에드윈은 예상했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 끝 발코니로 나가면 뒷문이 있네. 나가면 하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예.”
에드윈은 이번에도 짧게 대답했다. 응접실로 가라고 하지 않고 발코니로 나가라고 하는 점이 의아했지만, 그만큼 비밀을 요하는 일이겠거니 했다.
아무튼 르니예와 같이 있는 이 무도회장을 어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더 못난 마음이 들기 전에.
더 이상 자신의 못난 면을 마주하면 이번에는 정말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단 예감이 그를 두렵게 했다.
에드윈은 자연스럽게 서쪽 끝 발코니를 향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르니예를 돌아보았을 때, 르니예는 어떤 남자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레버리 영지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었어요.”
그딴 말 들은 적 없었다. 콜론은 레버리 영지라면 치를 떨었다.
콜론은 펠레포네 영주는 게임도 되지 않을 정도로 레버리 영주가 악독하게 뇌물을 뜯어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르니예는 지금 그게 아닐 수도 있단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렇소. 그래서 우리 영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분들이 이 무도회에도 여럿이지요.”
레버리 영주는 그 사실이 뿌듯해 죽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후작께서도 성년이 되기 전에 잠시 우리 영지에서 지낸 적이 있었지.”
“후작께서도 가 보셨다고 하니, 저도 꼭 가 보고 싶네요.”
후작도 레버리 영지에서 지냈다고? 카밀이 했던 말과 들어맞는 내용이 계속 생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왜…….
르니예는 그게 궁금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셰론 후작이 어머니를 죽였다면, 아버지는 왜 복수를 소원으로 빌지 않았지?
카밀이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었을 수도 있긴 한데……. 르니예는 머리가 복잡했다.
“죄송해요, 영주님. 술이 독했는지 머리가 좀 아프네요.”
르니예는 미간을 찌푸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술을 잘 못하시는 모양이군. 술 깨는 데는 찬 바람만 한 것이 없지. 후작저의 정원이 아주 훌륭하니 바람을 쐬며 구경하기에 적당할 것이네.”
“감사합니다, 영주님.”
원래 성격인지 뭔지 그는 서쪽 정원이 예쁘다는 조언까지 건넸다. 르니예는 바로 근처에서 패러히트 공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벨데메르에게 눈과 손을 사용해서 신호를 보냈다.
“머리가 아파서, 발코니에 있을게요.”
입 모양으로 말하면서, 르니예는 나가 있을 발코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벨데메르는 곧 따라가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머리야.”
진짜 술이 과했나. 발코니로 나온 르니예는 난간에 기대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거 에드윈 아냐?”
그런 르니예의 시야로 저 멀리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에드윈이 확실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르니예의 눈이 에드윈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에드윈은 후작저의 하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의 뒤로 다른 남자가 따라붙었다.
에드윈이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에드윈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동시에 에드윈이 방심한 틈을 타, 그 옆에 있는 남자가 에드윈의 목덜미에 무언가를 꽂아 넣었다.
“……!”
쓰러지는 에드윈을 보며 르니예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꿀벌, 꿀벌을 불러야 한다.
하지만 정원이 워낙 넓어 꿀벌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벨데메르를 부르기 위해 되돌아가면 에드윈이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를 텐데.
“아, 진짜.”
르니예는 또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원망스러운 눈동자에도 밤하늘은 휘영청 맑았다.
“이번에는 전남편이에요?”
이번에는? 르니예는 자기가 말하고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는이라면 지난번에 또 이런 일이 있었나?
항구였고, 배 위에서, 누군가를 구해 주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었다. 구해 주려던 사람은 노예로 팔려 가던 모녀랑, 또 어떤 여자였다.
그 여자는 그러니까……, 음, 아는 여자 같은데.
르니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여자를 자세히 떠올리려고 하자, 머릿속이 안개를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꿈이었나? 왜 이렇게 기억이 흐리지?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신을 잃은 에드윈이 후작의 하인들에게 끌려가고 있고, 후작은 살인마일지도 모르며, 심지어 여기는 그의 저택이다.
르니예는 발코니 난간 밖으로 훌쩍 뛰어내려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어느 쪽으로 가는지, 딱 그것만 볼 생각이었다. 소리를 지르면 벨데메르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방향만 볼 것이다.
그러나 르니예는 그곳이 그냥 후작저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셰론 후작저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지킬 비밀이 많은 이는 어디에나 눈과 귀를 두는 법이니까.
“세사르 님, 저는 맡은 임무가 있답니다.”
샤피로는 아주, 아주 약간 세사르가 귀찮았다. 세사르가 파트너도 없이 무도회에 온 명분은 ‘은인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벨데메르의 시중을 전혀 들고 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호위라도 하는 척을 보이면 좋으련만, 그는 샤피로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다.
그리고 그건 샤피로에게 아주 큰 애로사항이었다.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요, 샤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답니다.”
샤피로는 후작저의 사용인들과 친분을 쌓은 뒤, 비밀을 캐내야 했다.
아주 작은 이야기라도 좋았다. 사소한 것도 모으면 조각이 되고, 한 조각이라도 중요한 단서가 되곤 했으므로.
그러나 소공작이 계속 따라다니니 사용인들은 그저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
“은인께서는 너무하십니다. 모처럼 무도회인데 그대에게 일만 시키시고.”
“사람은 항상 일해야 한답니다.”
“하지만 샤피로는 사역마잖아요.”
“사역마는 일을 하지 않으면 녹이 슬죠.”
샤피로는 아무 말이나 하며 대꾸했다. 사용인들과 친해지는 건 그른 것 같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 할 듯했다.
“저는 지금부터 은밀히 후작저를 조사할 예정입니다.”
“후작저는 왜 조사하는 겁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하지만 은밀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설마 세사르 님께서 제 일에 방해가 되진 않으시겠죠?”
패러히트 공작가의 소공작이 조만간 왕국의 제일가는 검사가 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샤피로는 그의 실력을 한번 보기로 했다.
적어도 후작가의 사용인에게 들키지는 않겠지.
“물론이에요, 샤피로.”
그는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나 곧이어 샤피로도 자신이 무엇을 찾아야 했는지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이건 아주 뜻밖이군요.”
“부인, 부인!”
르니예는 에드윈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이 약간 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에드윈? 여기, 여기는 어디예요?”
르니예는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에드윈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에드윈이 누군가에게 습격당하는 것을 보고 따라나섰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나도 당했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 안일했나. 굉장히 멀찍이 따라갔는데, 들킬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르니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우리를 묶어놓지는 않았네요.”
“따로 가둬놓지도 않았고요.”
그나마 조금 다행인 건, 사지가 자유로운 에드윈이 곁에 있어 덜 무섭다는 것이었다.
“에드윈, 빨리 말할 테니까 잘 들어요. 카밀 숙부가 해 준 이야기인데, 후작이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죽였다던가?”
르니예는 자신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흠칫했다. 에드윈은 본능적으로 르니예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닌가요?”
부디 아니기를 바라면서, 르니예는 물었다.
“아니, 맞네.”
헛된 기대였다. 그래도 저희는 죽이지 않을 건지,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르니예와 에드윈 앞으로 와인잔이 놓인 테이블이 들어왔다.
와인이라도 마시면서 얘기를 하자는 건가? 르니예는 그의 저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레버리 영주랑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나 했더니, 옛날이야기를 했나 보군.”
깨문 입술에서 피 맛이 비릿하게 흘렀다. 그럼 카밀 숙부의 말이 다 맞았던 거야?
“제 일행이 곧 저를 찾으러 올 겁니다.”
르니예는 그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동안 에드윈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은밀하게 방 안을 살폈다.
“걱정하지 말게. 그 전에 끝날 테니까. 물론 그대들이 협조해 준다면.”
셰론의 목소리가 무도회장에서와 달리 들떠 있었다.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소름이 끼쳤다.
“이런 건 처음 시도해 보는데, 생각보다 흥미롭군.”
“후작님, 왜 이러시는 겁니까?”
에드윈은 무기로 쓸 만한 것이 있나 주변을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그러나 이 방 어디에도 무기로 쓸 만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육탄전인데, 후작의 뒤로 무장한 이들이 보였다. 맨손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우리를 죽이려는 것 같은데요.”
이내 차가워진 르니예의 목소리에 에드윈의 턱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니, 그게 아니야. 둘 다 죽이진 않을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아까운 목숨을.”
아까운 목숨이라니. 그게 저 입에서 나올 말인가. 소름이 끼쳐서 르니예는 입술을 깨물었다.
“앞에 놓여 있는 술잔 중 하나에만 독이 들어 있네. 이 둘 중에서 운이 좋은 하나는 살아 돌아갈 수 있단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