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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04화 (104/120)
  • 104화. 잠깐을 욕심내도 될까

    “그런 걱정은 한 적 없네.”

    마코야데스는 실력 있는 도둑이었다. 길드까지 만들었으니 그 실력이야 오죽할까.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콜론 모르게 그의 상단을 탈탈 털고도 남았다. 저 깊은 금고 속에 숨겨 둔 손톱만 한 보석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걸 훔쳐 갔다는 건 소원을 빌겠다는 뜻인데, 자네 소원이야 뻔하지.”

    마코야데스의 소원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

    “자네가 그 소원을 빌었다면, 뭐, 조금 아깝기는 했겠지만 속이 쓰릴 정도는 아니었을 게야.”

    콜론과 그는 같은 것을 원했다. 그들은 아주 오래 같은 목적을 향해 걸었다.

    “내가 다른 소원 빌면 어쩌려고요?”

    “다른 소원 뭐? 얼굴 고치는 거? 왜, 얼굴 고치고 장가라도 가고 싶어서?”

    콜론의 농담에 마코야데스가 졌다는 듯이 웃었다.

    “이 나이에 무슨 장가를 갑니까, 참, 형님도.”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웃던 마코야데스는 웃음기를 지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라면 소원으로 그놈에게 복수하게 해 달라고 빌었을 겁니다.”

    얼굴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따님이 그놈을 돕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충격이 클 텐데요.”

    르니예 이야기가 나오자 콜론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내가 여행이나 좀 다녀오라고 한 건데.”

    원래도 말을 잘 듣는 딸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이 먹었다고 듣는 척은 좀 하는 것 같아 부탁했건만, 르니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형님,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여행을 가요. 형님은 꼭 자식 일에는 바보같이 굴더라.”

    콜론은 르니예가 복잡한 상황에 빠지길 원치 않았다. 길게 여행 다녀오면 모든 걸 정리해 놓으려고 했건만.

    왕도 제 자식은 제 뜻대로 못 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모르게 하면 돼.”

    하지만 르니예는 영영 모를 것이다. 르니예만큼은 저를 깎아 먹는 분노 속에서 살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숨겼는데, 앞으로 며칠 숨기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근데 넌 왜 그렇게 머리를 긁어대는 거냐?”

    “아니, 아까부터 뭔가 까먹은 기분인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네?”

    마코야데스가 잊은 것. 그리고 르니예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

    바로 프리야였다. 프리야는 뜻대로 잊혔다. 방에서 나오는 프리야를 본 르니예는 프리야를 기억하지 못했다.

    프리야는 바딜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홀가분하게 떠났다.

    “벨데메르, 소원은……!”

    프리야가 지워진 지금, 르니예의 가장 큰 관심사는 벨데메르였다.

    자기 소원이 이뤄졌는지 궁금해 문을 열고 들어간 르니예는 창가에 걸터앉은 벨데메르를 보고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옷을, 아직 안 입고 있었네요.”

    그는 나신인 상태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벨데메르가 조각상에서 나오면 알몸이긴 한데, 그래도 샤피로가 바로 옷을 입혔다.

    이번에도 당연히 옷을 입혔을 줄 알고 노크도 없이 들어간 건데, 그는 전혀 아무것도,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볼 때마다 부끄러워하는군.”

    “……원래는 벨데메르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르니예는 예기치 못하게 시야를 가득 채우는 그의 시원한 나신에 놀라 뒤돌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 자기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원래 벗고 있는 사람이 부끄러워하고 그러지 않나?

    “왜 부끄러워해야 하지?”

    벨데메르는 진심으로 의아해하며, 그와 똑같은 눈빛을 한 샤피로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내보여서 부끄러운 몸이 아닌데요. 주인님의 몸은 찬양받아 마땅합니다.”

    찬양도 좋지만 꼭 알몸까지 찬양받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르니예는 아무튼 벨데메르가 자신의 몸에 당당하다는 것은 알았다.

    당당할 만한 몸이기는 하지.

    “이제 돌아보셔도 됩니다.”

    “……정말 가릴 곳만 가렸구나.”

    돌아선 르니예는 여전한 살의 향연에 아찔했다. 샤피로는 벨데메르의 중요한 부위만 살짝 가려놓았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굉장히 매끄러워 보이는 천은, 금방이라도 그의 굵다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릴 것 같았다.

    “어차피 여기 다른 사람이 오지도 않는데요, 뭘.”

    “그래도 좀 더 잘 가려 봐.”

    너무 딱 거기만 가렸잖아. 천이 작은 것도 아닌데 굳이 접어서 가릴 필요가 있어? 담요처럼 덮으면 안 되는 거야?

    “좋다는 말을 되게 이상하게 하시네요, 르니예 님.”

    “좋다니!”

    “눈으로는 쉴 새 없이 주인님 몸을 훑고 계시면서 입으로만 가려라, 가려라, 하시니 이 샤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르니예는 정곡을 찔려,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아닌데.”

    한 박자 늦은 답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샤피로는 르니예를 빤히 쳐다보았고 르니예는 시선을 피했다.

    졌다. 르니예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거 사역마 맞아? 어떻게 매번 인간을 이겨 먹어?

    르니예는 샤피로를 흘겨보면서, 주제를 바꿨다.

    “그래서 내 소원은 이뤄졌어요?”

    팔뚝을 쳐다보던 벨데메르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소원 개수는 딱 하나 올라갔다.

    “내가 좋은 남편이 아니었나?”

    좋은 남편이 되어 주겠다는 말이 유효하다면, 그랬다.

    “아니에요, 벨데메르는 좋은 남편이었어요.”

    여러모로 좋은 남편이었다. 몸도 좋고…….

    “르니예 님, 지금 눈빛 너무 음흉하셨습니다.”

    “뭐? 너, 씨, 자꾸 이러면 해고야, 해고.”

    “그 협박은 이제 안 통합니다. 그보다 르니예 님의 소원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주인님께서 아직도 남편이 아니셔서 그런 듯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르니예의 이혼으로 벨데메르는 정부에서 연인이 되었다.

    이전에 한 결혼식은 결혼식 흉내만 낸 것이니 무효이고, 르니예와 벨데메르는 아직도 같은 집에 살지도 않는다.

    이걸 누가 부부라고 한단 말인가.

    “그러네.”

    샤피로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벨데메르와 르니예는 침대에 누워서까지 결혼식 이야기를 했다.

    “결혼식을 신전에서 할까요?”

    저 위에 계신 분께 확실히 알려 드리는 거다.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남편이 되었다는 것을.

    “신전은 질색이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군.”

    “그런데 신전은 인기가 많아서 대관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할 텐데…….”

    기다리는 동안 벨데메르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런 욕심을 내면 너무 이기적인가.

    “기다리더라도 제대로 하는 게 낫겠지.”

    그는 결혼을 신전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혼식까지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소원 개수를 채우면, 조각상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르니예를 더 빨리 만날 수 있으니까.

    아니면 이대로 르니예의 소원이 영영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겠지.

    같이 여행도 다니고, 정원도 가꾸고, 함께 눈 뜨고 눈 감고, 르니예가 늙어가는 것도 보고.

    아니, 그건 안 되겠다. 르니예가 죽는 것으로 그 소원이 사라진다면 난 다시 조각상으로 돌아가겠지.

    그러다 봉인이 풀려 다시 나왔을 때, 그곳은 르니예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일 것이다.

    그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서두를 필요 없으니 천천히 하지.”

    하지만 며칠 정도는,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 것이다.

    “셰론 후작인지 뭔지가 우리를 무도회에 초대했다던데, 거기 갔다 와서 해도 늦지 않아. 후작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했잖아.”

    “그럴까요? 수도도 안 가 봤는데, 벨데메르는 가 봤어요?”

    “아주 예전에.”

    “그럼 간 김에 구경도 하고 와요.”

    그 정도는, 잠깐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 * *

    “도련님, 여긴 어떻게 아셨습니까?”

    “부인께 들었다.”

    에드윈은 바딜을 마주했다.

    “나랑 같은 얼굴을 할 때는 언제고, 나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했구나.”

    바딜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왼쪽 볼에 길게 난 흉터와 짧게 자른 머리만으로 그와 에드윈은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긴 왜 오셨습니까?”

    “수도로 올라가는 길에 들렀다.”

    “제 집이 무슨 여인숙입니까?”

    바딜이 투덜거리자 에드윈이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서 지낼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에드윈은 테이블 위로 가죽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여인숙에서 지낼 때, 바딜이 와 놓고 간 그 주머니였다.

    “그동안 내가 주지 못했던 네 몫이다.”

    “필요 없습니다.”

    “사과의 의미야. 그동안 미안했다, 바딜. 못난 주인을 만나서 고생 많았다.”

    에드윈은 그 말만 마치고서 일어섰다.

    “도련님.”

    이것이 정말 에드윈과 저의 끝임을 깨닫고, 바딜은 나가는 에드윈을 따라 나왔다.

    “조심히 가세요.”

    그는 에드윈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를 구해 주셨던 그날의 도련님만 추억하며 살겠습니다.”

    “내 형제 같았던 너만 기억하마.”

    에드윈은 그를 한 번 껴안고는 떠났다. 바딜은 한참을 에드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으휴, 저 등신.”

    멀리서 바딜을 지켜보던 프리야는 혀를 찼다.

    뭐가 예쁘다고 에드윈을 쳐다보고 있니. 내가 진짜 예쁜 걸 보여 주지.

    “저기요.”

    그 ‘진짜 예쁜 것’이란 프리야 자신이었다.

    “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저 아세요? 초면에 왜 반말을 하세요. 아니, 이봐요, 어딜 들어가는 거예요. 여기 내 집입니다.”

    바딜은 어이가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와서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저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나 갈 데가 없어.”

    “그래서요?”

    프리야는 뻔뻔하게 그 집에 들어가 앉았다.

    “배도 고파.”

    바딜은 황당했다. 평생 살면서 이리 황당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굶었어요?”

    왜 저 여자한테 뭘 해 먹이고 싶지?

    “응. 우리 밥 먹자.”

    “저녁만 먹고 가는 겁니다.”

    의아해하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바딜을 보며 프리야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고는 그의 뒤에, 그가 기함할 만한 말을 던졌다.

    “나 자고 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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