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03화 (103/120)
  • 103화. 이뤄지지 않은 소원

    ‘법원 앞에서 기다리겠다.’

    벨데메르는 르니예와 함께 법원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르니예는 이혼 서류에 판사의 도장이 찍힐 순간이 걱정되었다.

    ‘갑자기 조각상으로 돌아가야 하면 어떡해요. 벨데메르는 조각상 근처에 있는 편이 좋겠어요.’

    그들의 생각처럼,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소원 때문에 조각상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라면, 소원이 이뤄진 순간 그는 조각상으로 돌아가게 될 터였다.

    ‘샤피로, 이제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집 안으로 옮겨. 영주는 이제 그거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

    카밀은 암초에 떨어져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게 영주가 한 일인지 아니면 카밀이 도망치다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카밀은 없다.

    그 둘 중 무엇이어도 상관없었다. 영주는 카밀이 배신을 했다고 알고 있고, 수도에서 파견한 조사단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

    이런 와중에 조각상이 신경이나 쓰이겠나. 르니예는 조각상을 옮기려면 지금이 적기라고 여겼다.

    ‘그럼 다녀올게요, 벨데메르.’

    ‘여기서 기다리지.’

    그들은 포옹을 나눴다. 부디 이게 마지막 인사는 아니기를.

    르니예는 애써 밝게 웃어 보이고는 법원으로 향했다.

    만에 하나,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하더라도 이혼은 해야만 했다.

    언제까지고 벨데메르를 제 소원에 잡아둘 수는 없었으니까.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도 판사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줄 때, 르니예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저 도장이 찍힌 순간, 소원은 이뤄졌을까?

    벨데메르는 조각상으로 들어갔을까?

    벨데메르의 집으로 가면서 르니예는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그러나,

    “벨데메르?”

    멀쩡히 앉아 있는 벨데메르를 보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혼이 된 겁니까?”

    “응.”

    르니예는 품에 안고 온 이혼 서류를 샤피로에게 건넸다. 샤피로는 이혼 증명 서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벨데메르, 뭐 이상한 느낌 같은 거 없어요? 조각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전혀.”

    벨데메르 역시 의아했다. 르니예가 이혼을 하고 나면 바로 조각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그도 예상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소원을 이뤄 줄 때의 그런 느낌 같은 것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

    르니예와 벨데메르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이혼 증명서를 살펴보던 샤피로가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여기 보십시오, 주인님.”

    그는 서류 하단 주의사항을 가리켰다.

    “이 증명서는 자정을 기점으로 유효하다고 합니다.”

    “그렇군.”

    “그래? 그래서 그랬구나.”

    생각보다 소원이 서류에 예민하네.

    그래도 시간만 흐르면 르니예의 소원은 이뤄지는 것이 되니, 다행이었다. 르니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난 잠깐 상단에 좀 다녀올게요. 카밀 숙부가 시체로 발견되는 바람에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

    “내일 처리하면 안 되는 건가?”

    “금방 올게요.”

    벨데메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르니예를 놓아주었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 묘한 불안이 피어올랐다.

    저 뒷모습이 마지막이면 어쩌지. 이번에 조각상으로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으면 어떡하나.

    르니예의 소원을 들어주었을 때가, 그 전 소원으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후였다.

    “샤피로.”

    “예, 주인님.”

    “명령을 정정한다. 내가 봉인되고 나면 최대한 빨리 소원 개수를 채우도록 해라. 소문 같은 건 신경 쓰지 마.”

    벨데메르는 조급해했다. 샤피로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르니예 님이 반대하실 겁니다.”

    “내가 최대한 빨리 나오고 싶어 한다고 해. 그럼 반대하지 못할 거다.”

    진심이었다. 벨데메르는 최대한 빨리 나오고 싶었다. 처음 조각상에 갇혔을 때도 이렇게 조바심이 나지는 않았다.

    “삼 개월이면 충분하겠지.”

    “예, 주인님. 저만 믿으십시오.”

    “에드윈.”

    상단에 오자마자 급한 일을 처리한 후에, 르니예는 짐을 싸고 있는 에드윈을 보러 갔다.

    “부인. 아, 이제 이렇게 부르면 안 되겠군요.”

    에드윈은 이전보다는 편안한 모습이었다. 초췌했지만 깔끔했고, 여전히 괴로워했지만 많이 내려놓은 듯 보였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안 나올 것처럼 굴더니, 그는 이혼 법정에 나왔다.

    “아까는 내가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했네요.”

    “인사는 내가 해야죠. 지금까지 참아 줘서 고마웠습니다.”

    에드윈은 잠시 짐을 싸던 하인들을 물렸다.

    “내가 못나게 굴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할 때가 왔군요.”

    상단에서 쫓겨난 다음부터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에드윈은 모든 것을 제 손으로 망쳤음을 깨달았다.

    자부심으로 삼았던 검술 실력은 사실 대단하지 않았으며, 저는 그리 불쌍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잊기 위해서 그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하지만 취할수록 르니예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돈이면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에드윈.’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던 시선. 자신이 에드윈임을 확신하는 그 눈빛.

    모두가 바딜을 에드윈이라고 말할 때,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봐 준 사람.

    그리고 끝끝내 에드윈 자신은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

    “그간 미안했습니다. 난 오늘 안으로 떠날 겁니다.”

    르니예와 다시 얼굴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이혼 법정에 나온 것은 르니예에 대한 작은 속죄였다.

    마지막으로 르니예가 원하는 것을 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잘 가요, 에드윈. 배웅은 못 해 주겠네요.”

    르니예는 벨데메르에게 가야 했다. 에드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하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는데 그게 뭐 별거겠어.”

    르니예는 소원을 빌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덕분에 벨데메르를 만났다.

    “그래도 다짐한 거 잊지 말자.”

    벨데메르가 간다고 하면, 시원하게 보내 주는 거다. 마음이 아프겠지만 에드윈과 했던 일을 답습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소원이 이뤄진 다음의 일이었다. 일단 르니예의 소원에서 벨데메르가 벗어나야 가느니 마느니, 보내 주느니 마느니 할 것이 아닌가.

    “아직도 별 느낌이 없어요, 벨데메르?”

    “전혀, 아무 느낌도.”

    자정이 지났지만 벨데메르는 멀쩡했다.

    “이상하군.”

    서류가 유효해졌는데도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애초에 서류와는 관계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주인님께서 조각상에 한번 들어가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어쩌면 조각상에 들어가야 소원이 이뤄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어떤 소원이든, 소원을 이뤄 줄 때 벨데메르는 항상 조각상 안에 있었다.

    “마침 다음 소원도 기다리고 있으니, 실험하기 적당하군.”

    벨데메르는 일단 조각상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대로 다시 조각상 안에 갇혀 긴 세월을 보낼까 봐 걱정되기는 하였으나,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소원을 들어주려면 그는 조각상 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게 그를 옥죄고 있는 저주였으므로.

    “조각상이 가까이 있으니 편하군.”

    샤피로는 광장에 있는 조각상을 집 안으로 옮겼다. 조각상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면서,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곧 보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벨데메르는 짧게 웃어 보이고 조각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샤피로가 그의 뒤를 따랐다.

    르니예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프리야를 불렀다.

    “소원 빌 준비 됐어?”

    “드디어 제 차례가 온 건가요?”

    프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바딜이었다.

    “바딜하고는 인사했어?”

    “네. 소원이 이뤄지고 나면 제가 바딜을 찾아가기로 했어요.”

    바딜은 프리야를 잊었어도, 프리야는 바딜을 잊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프리야 님, 들어오십시오.”

    준비되었는지 샤피로가 프리야를 부르러 왔다. 샤피로는 프리야에게 블러디 사파이어를 건넸다.

    “이게 내 방에서 가져온 보석 맞죠?”

    “그래. 맨 처음에 네가 금고에서 가지고 나온 거.”

    돌고 돌아서, 이렇게 다시 만나네. 감회가 새로웠다.

    “덕분에 내가 잘 썼다.”

    르니예의 농담에 프리야가 픽 웃었다.

    “작은 마님.”

    “왜?”

    “그동안, 죄송했어요.”

    평생 도둑질을 하며 살았지만, 사과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르니예는 프리야가 유일하게 사과한 사람이 될 것이었다.

    “아마 곧 있으면 저 같은 건 생각도 안 나실 거예요.”

    농담 섞인 진담에 이번에는 르니예가 미소 지었다. 프리야와 이렇게 끝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소원을 빌고 나면 내가 널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지금 말할게.”

    죽었다 깨어나도 프리야를 용서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죽었다 깨어나니 좀 용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프리야는 제 기억 속에서,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 프리야의 새로운 삶을 축하해 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이번에는 잘 살아. 네가 원하는 대로, 살길 바랄게.”

    프리야는 대답 대신 르니예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에드윈이 아니라 르니예에게 접근하는 거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르니예를 배신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소원을 비십시오.”

    샤피로가 조용히 문을 닫았고, 프리야는 벨데메르의 조각상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제 소원은, 이 세상의 누구도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다.”

    * * *

    “영주가 수도로 잡혀갔다는데, 형님은 여전히 여기 있네?”

    “다음 영주가 와서 잘잘못을 따질 때까지 여기 있으란다.”

    콜론은 읽던 책을 테이블에 툭 던지며 읊조렸다.

    “덕분에 독서도 하고, 교양도 쌓고, 좋지 뭐. 2왕자 쪽에서 연락하거나 그러진 않았나?”

    2왕자를 숙청해도, 그를 따르는 잔당까지 싹 청소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중의 누군가가 또 보석에 대한 알고 있다면, 조처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형님, 나는 걱정 안 됩니까?”

    “너? 왜, 너 어디 아프냐?”

    “그런 게 아니라, 그 보석을 내가 진짜로 훔쳐 가면 어쩌나 그런 걱정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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