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97화 (97/120)
  • 97화. 바딜의 소원

    “에드윈 라포어로 만들어 주십시오.”

    르니예는 귀를 의심했다. 뭐로 만들어 줘? 에드윈 라포어? 내가 아는 그 에드윈 라포어?

    “에드윈 라포어 경의 몸을 빼앗고 싶으시단 겁니까? 죄송하지만 그런 소원은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소원을 거르는 일은 샤피로 담당이었으므로, 샤피로는 바딜의 소원을 걸러냈다.

    그러나 그건 바딜에게 확신만 주었다.

    “진짜로 소원을 들어주는 겁니까? 그 새빨간 보석을 가졌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샤피로는 아차 싶었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요구하는 바딜에게 깜빡 속아 넘어갔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샤피로는 낭패감이 서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괜찮다, 샤피로.”

    벨데메르 역시 바딜이 정확히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바딜, 너 이거 에드윈이 시킨 거야?”

    르니예는 에드윈을 먼저 의심했다. 바딜이 에드윈을 배신할 리 없으니까.

    바딜이 에드윈을 위하다 못해 신처럼 받들고 사는 걸, 상단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닙니다. 도련님은 이 일을 모르십니다. 아니, 알면서도 제게 말씀하지 않으시는지도 모르지만.”

    나름 주인의 뜻을 잘 이해하는 하인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이제 바딜은 에드윈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바딜은 적어도 에드윈이 잘못은 할지언정, 그 잘못을 외면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에드윈의 속마음을 더 알게 되면, 그 믿음이 완전히 헛되었음을 확인 사살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소원 맡겨 놨니?”

    아주 뻔뻔하네. 르니예는 바딜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작은 마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왜 도움이 된다는 건지, 들어나 볼까.”

    의외로 바딜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사람은 벨데메르였다. 그는 내내 서 있는 바딜에게 앉으라 의자까지 권했다.

    “그대도 그만 앉지. 다리가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그는 바딜의 저의를 의심하며 꼿꼿하게 서 있는 르니예의 손목을 지그시 잡았다. 르니예는 못 이기는 척 벨데메르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제 말해 봐라. 네 소원이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스텐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스텐?”

    르니예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이름이었다.

    “그자가 작은 마님의 두 번째 결혼식을 보았다고 주장하던데요. 작은 마님께서 무역선에 팔아 버리셨다고요.”

    “아, 그 새,”

    무심코 욕을 하려던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보며 민망한 듯 살짝 웃었다.

    “우리 결혼식을 보고 에드윈에게 말하겠다며 나를 협박한 놈이 있었어요. 돈을 달라고 해서 직접 벌라고 무역선에 태웠는데.”

    어떻게 돌아왔지, 이 자식이? 좀 더 멀리 가는 배에 태웠어야 했는데.

    르니예는 치맛자락에 숨긴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쥐었다.

    “그 사람이 돌아와서 도련님을 만났습니다. 도련님은 아무래도 그 사람을 이용해 작은 마님을 협박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에드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 르니예의 얼굴에 그녀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도련님은 변하셨습니다.”

    바딜도 르니예와 엇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예전의 에드윈을 사랑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도련님은 결투의 결과에도 승복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건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네 주인의 비겁한 모습에 실망한 건 알겠다. 그런데 그것과 네 주인처럼 만들어 달라는 소원이 무슨 상관이지?”

    여기서 잠시 바딜은 프리야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했다.

    프리야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 이야기를 프리야가 말해 주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혹여 그랬다가 프리야에게 불똥이라도 튀면 어떡하나, 바딜은 걱정했다. 안 그래도 삶이 힘든 프리야였다.

    조금의 부담도 프리야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도련님의 모습을 하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도와주신다면, 스텐의 거취도 알려 드리고 이혼에도 협조하겠습니다.”

    의도는 의심스럽다만, 확실히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몸을 빼앗는 소원은 불가능해, 바딜.”

    “그럼 외모만이라도 도련님과 똑같이 만들어 주실 순 없으십니까?”

    “그건 가능하지.”

    쉬운 일이었다. 누굴 죽이는 일도 아니었으며, 누굴 해하는 일도, 신이 정해 놓은 규칙을 깨는 일도 아니었다.

    “에드윈 라포어가 둘로 늘어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네가 제시한 조건은 마음에 드는군.”

    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날 에드윈의 사정 같은 건, 벨데메르의 알 바가 아니었다.

    아니, 실은 그 표정이 보고 싶었다. 바딜의 소원은 기사도를 어기고, 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벌이 될 테니까.

    “그런데 진짜 에드윈이 있는데 에드윈 행세를 할 수 있겠어?”

    “예, 할 수 있습니다.”

    에드윈을 보필한 시간이 바딜을 도울 것이었다.

    “그대 생각은 어때?”

    “네?”

    “난 들어줄 만한 소원인 것 같은데.”

    르니예는 머리가 복잡했다. 바딜의 목적이 의심되었다. 하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든, 자신에게 협조를 잘하는 에드윈이 생긴다면 일은 수월해질 것이다.

    스텐도 치우고 이혼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좋아요.”

    또 다른 에드윈이 생기는 건, 에드윈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애초에 바딜이 이런 소원을 빌게 한 것도 에드윈이 자초한 일인 것이다.

    “저 소원, 들어주죠.”

    * * *

    “부인.”

    “에드윈? 아침부터 내 방에는 무슨 일이에요?”

    이른 아침. 르니예는 상단으로 돌아오자마자 에드윈을 마주쳤다.

    지난밤, 바딜은 소원을 이뤘다. 입고 있는 옷만 빼면 그는 완벽하게 에드윈이었다.

    그를 보고 나니 르니예는 어쩐지 기이한 기분에 밤잠을 설쳤다.

    그러고 나서 진짜 에드윈을 마주한 기분은, 정말이지 형언할 수 없었다.

    “부인과 할 말이 있는데, 워낙 바쁘셔서 아침이 아니면 얼굴 보기가 어려워서요.”

    “할 말이 있나요, 우리가?”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예를 들면 부인이 나를 두고 치른 두 번째 결혼식 같은 거 말입니다.”

    협박을 하러 오셨군. 르니예는 눈에 힘을 주며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어차피 우린 이혼할 건데. 당신, 결투에서 진 거, 잊지 말아요. 기사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아서야 되겠어요?”

    도발에 가까운 말에도 에드윈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르니예는 아주 낯선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 난 부인과 결혼한 순간부터 기사가 아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 자신을 판 것이나 마찬가진데, 누가 몸을 판 이를 기사라고 여기겠습니까.”

    몸을 팔았다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다. 르니예는 놀라 입술을 벙긋거렸다.

    “상단주가 내게 그런 제안을 하지만 않았더라도, 난 이보다 더 잘 살아 있었을 겁니다. 적어도 기사였겠죠.”

    “다 우리 아버지 탓이라는 거예요?”

    어이가 없었다. 콜론은 제안만 했을 뿐이다. 제안을 수락한 건 에드윈 본인이면서!

    “흥분하지 마세요, 부인.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에드윈은 평온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와 이혼을 하고 싶다면, 내가 기사단에 들어가게 도우세요.”

    “내가 무슨 힘으로요?”

    “라인허트에게 갈 공을 나한테 넘겨요.”

    라인허트가 아니라 라포어가 이번 반란을 저지한 공을 인정받아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기사단에 들어가고 나면, 부인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습니다.”

    “들어주지 않으면?”

    “중혼으로 소송을 걸 겁니다. 징역은 벨데메르도 대신 살아 주지 못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르니예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에드윈, 정말 많이 변했네요. 기사도를 버린 수준이 아니라 무뢰배가 다 됐어요.”

    르니예는 문을 가리키며 그에게 나가라 신호했다.

    “당신 제안, 아니 협박은 생각을 좀 해 보죠.”

    “기다리겠습니다, 부인. 그리 오래 기다리진 않겠지만.”

    르니예는 방을 나서는 에드윈의 옷차림을 눈여겨보았다. 곧 바딜이 상단에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면 에드윈과 바딜을 구분할 수 있는 건 이제 옷차림뿐이니 잘 봐두어야 한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

    무난하기 짝이 없는 옷차림이군.

    르니예는 무심코 인상을 찌푸리다가 에드윈의 옷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 원인은 르니예가 그 스타일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에이, 그래도 흰 셔츠만 있는 건 아니니까, 설마 둘이 똑같이 입겠어?”

    르니예는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설마가 사람을 잡는 법.

    “아니, 지금 이게 무슨.”

    르니예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나란히 바닥을 뒹구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에, 에드윈?”

    그러자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르니에를 쳐다보았다.

    “부인.”

    “부인.”

    목소리까지 똑같네. 누가 바딜이고 누가 에드윈이지? 옷까지 똑같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당황한 건 르니예뿐이 아니었다.

    “작은 주인님이 둘이야?”

    “애초에 쌍둥이라도 되시는 건가?”

    싸움을 말리러 온 사용인들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장 당황스러운 건, 진짜 에드윈이었겠지만.

    “내가 진짜 에드윈입니다, 부인.”

    “아닙니다, 부인. 잘 보세요, 내가 에드윈 라포어입니다.”

    르니예는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진짜 에드윈을 내보내야 하는데, 누가 진짜 에드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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