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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96화 (96/120)
  • 96화. 나였다면

    “도련님.”

    프리야의 소식을 듣자마자 바딜은 바로 에드윈에게 달려왔다.

    에드윈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프리야를 구할 수 있었다.

    무역선은 보통 정해진 항로를 따라 운행하므로, 무역선이 서는 곳으로 향하면 늦더라도 프리야를 만날 수 있었다.

    만약 에드윈이 자원과 그의 이름을 조금만 빌려준다면, 바딜이 가서 프리야를 데려올 수 있었다.

    “도련님!”

    “마침 잘 왔다, 바딜. 손님이 왔으니 차를 좀 내오거라.”

    손님? 바딜의 시선이 에드윈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어이, 우리 또 보는군.”

    스텐이었다.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니 르니예가 한, 두 번째 결혼식의 증거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도련님, 급한 일이 있습니다.”

    “급한 일?”

    “프리야가,”

    에드윈은 고개를 저으며 바딜의 말을 끊었다.

    “바딜, 프리야는 그만 잊어. 프리야는 널 두고 떠난 거야.”

    “아닙니다, 떠난 게 아니라 끌려간,”

    “아니.”

    더 이상 프리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에드윈은 손을 들어 확실히 표현했다.

    “차를 내와, 바딜. 네가 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시키든가.”

    “…….”

    바딜은 입 안 살을 깨물고 에드윈의 방문을 닫았다.

    “별로 말 잘 듣는 하인은 아니네요.”

    “내 하인에 대해 토론하자고 거기 앉혀 놓은 게 아닌데.”

    “본론으로 바로 들어갈까요?”

    스텐은 르니예의 주례를 봐 준 신관을 찾아냈다.

    “돈만 준다면 증언도 하겠답니다.”

    물론 르니예가 준 돈의 세 배를 원하긴 했지만.

    “아, 결혼식장을 꾸민 인부도 찾았습니다.”

    “증언을 하겠다던가?”

    “사례가 있다면 열 번도 설 겁니다.”

    진짜 재판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르니예와 거래를 하려는 것이었다.

    반란에 관해 르니예가 알아낸 또 다른 정보를, 자신의 이름으로 셰론 후작에게 알리기만 하면 된다.

    라인허트의 이름이 아니라, 라포어의 이름으로.

    “필요하면 부를 테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있게.”

    “물론입죠. 숙박비만 대주신다면.”

    “바딜에게 말해 놓지.”

    스텐은 얼마든지 기다리겠다며 에드윈의 방을 나섰다. 저런 자와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찝찝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다 잃을 순 없었다. 에드윈은 반드시 기사단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르니예를 중혼으로 고소하지 않고, 그녀의 뜻대로 이혼도 해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또 모르지.

    “내가 작위를 받으면 부인의 마음이 또 달라질지.”

    * * *

    “숙부, 몸은 어때요? 말은 하겠어요?”

    르니예는 카밀의 입에 해독제를 부어 주었다. 적정량에 미치지 못하는 양이었지만 카밀은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 보였다.

    “먼저 사과할게요, 숙부. 그 독이 이렇게 강한 줄 몰랐네.”

    알았어도 쏘게 했겠지만.

    “그래도 내가 해독제도 가져왔잖아. 물론 이거 마신다고 독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건 아니겠지.”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이야기를 이어가는 르니예를 보며 카밀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물?”

    르니예는 대충 그 입술을 읽고서 카밀의 입에 컵을 대주었다. 물로 마른입을 축이는 카밀을 보며 르니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숙부를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숙부가 죽는 걸 보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숙부한테 기회를 하나 줄까 하는데.”

    “……기회?”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카밀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숙부가 살 기회.”

    어차피 제 손으로 카밀을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벨데메르의 손으로도 말이다.

    그렇다고 놓아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카밀은 법에게 맡길 것이다. 법이 그를 심판하도록.

    “이번에 들여온 무기는 어떻게 수도로 보낼 거예요? 방법 알려 주면 해독제 드리죠.”

    “……그래 죽으나, 이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 가지, 구나.”

    어차피 반란이 실패하면 저 또한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다. 카밀은 자꾸만 잠기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르니예의 제안을 거절했다.

    “기회도 드린다고 했잖아요.”

    해독제만으론 넘어오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도망칠 기회. 어디든 가고 싶은 데로 가세요.”

    갈 수 있다면 말이지. 어쨌든 보내 주기는 할 테니, 카밀에게 천운이 따르면 멀리 도망칠 수도 있겠지.

    “나랑 거래해요, 숙부. 숙부가 말 안 해 준다고 내가 그 무기 못 찾아내겠어요? 편한 길 놔두고 돌아가기 싫어서 이러는 거예요.”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뭐, 시간도 조금 부족하고.”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건 르니예도 알고, 카밀도 아는 사실이었다.

    르니예라는 변수가 반란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약속, 지키리라, 믿는다.”

    그러나 최소한 거동이라도 할 수 있어야 대처를 할 수 있지 않겠나.

    카밀은 결국 해독제를 선택했다.

    “지킬게요, 약속.”

    “……상단을, 새로, 만들었다.”

    * * *

    바딜은 에드윈의 서재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그의 인장을 훔쳤다. 에드윈이 프리야를 찾는 서신을 위조할 계획이었다.

    그런 다음 여행 경비와 프리야의 몸값을 훔쳐서 떠나면…….

    “하아.”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바딜은 기운이 빠져 책상을 짚고서 한숨을 쉬었다. 급하게 세운 계획은 허점이 많았다.

    준비물을 모두 훔쳐서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 그랬다.

    “도련님이라면 쉬운 일이었을 텐데.”

    에드윈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에드윈이라면 훔치지 않고 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배를 추적하는 것도 상단의 정보력으로 알아낼 수 있었고…….

    “애초에 프리야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것도 가능했겠지.”

    도련님이었다면, 내가 도련님이었다면.

    바딜은 주머니 속 인장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

    한참 혼잣말을 하던 바딜은 프리야와 하던 대화를 불현듯 떠올렸다.

    ‘이거 절대 비밀이야. 작은 주인님한테도. 내 생각에 작은 주인님이 이 보석을 찾는 것 같거든.’

    어느 날, 프리야는 바딜에게 낡은 주머니 안에서 새빨간 보석을 보여 주었다.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재료라고 했다.

    ‘근데 나한테 얘기해줘도 돼? 내가 훔쳐 가면 어쩌려고?’

    ‘넌 안 훔쳐 갈 거야. 넌 바보니까.’

    ‘내가 도둑질도 못 할 바보로 보여?’

    ‘응. 너 나를 처음부터 좋아했으면서, 작은 주인님이랑 나랑 잘되게 만들려고 애썼잖아.’

    그때는 그게 네가 행복해지는 길인 줄 알았지, 프리야.

    도련님이 다른 사람이 될 줄은, 난 정말 몰랐어.

    그래, 나 정말 바보 같다.

    ‘너 내 소원이 뭔 줄 알아?’

    하루 종일 숨어 있던 프리야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바딜을 붙잡고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았다.

    프리야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바딜은 단둘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그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빌었다.

    “프리야, 조금만 기다려.”

    고초를 겪고 있을 프리야를 떠올리면 바딜은 목이 멨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프리야를 구할 것이다.

    그게 비록 도둑질이라도 말이다. 바딜은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주머니 속 에드윈의 인장을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그 집으로 향했다. 르니예가 정부를 숨겨두고 사는 집으로.

    * * *

    “이제 우리 일은 곧 끝날 거예요.”

    르니예는 카밀이 말해 준 정보를 펙에게 서신으로 전달했다.

    물론 그 전에 상단 짐 안에 숨겨진 무기도 확실히 확인했다.

    “출발하는 영지 이름도 바꿨더라고요. 하긴, 영주가 뒤에 있으니 그 정도 서류 조작은 일도 아니죠.”

    르니예는 피곤한 듯 소파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벨데메르는 굳이 르니예가 다리를 뻗은 쪽으로 와 앉았다.

    “벨데메르, 뭐 하는 거예요?”

    “글쎄, 안마?”

    그는 르니예의 두 다리를 가뿐히 들어 제 허벅지 위로 올렸다.

    “안 그래도 되는데.”

    “하지 말라고는 안 하는군.”

    거절하지도 않고 다리를 잡아 빼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된다는 그 모호한 말은 거의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오늘 좀 많이 걸어서 다리가 좀 뻐근하네요.”

    제 발목을 주무르는 손길에 르니예는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온도가 낮은 손바닥이 복숭아뼈를 둥글게 매만지다가, 종아리를 타고 느릿하게 올라왔다.

    “벨데메르가 만져 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기울어지는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르니예의 초점이 풀리기 시작했다.

    “내가 만져 주면, 기분이 좋아?”

    치마 안으로 들어간 손길이 조금씩 올라왔다. 그만큼 벨데메르도 르니예에게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순간,

    “기분 좋은 시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주인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손님? 여기 올 손님이 있나?”

    “에드윈 라포어 경의 몸종입니다.”

    “바딜?”

    에드윈 없이 찾아온 바딜을 보고 샤피로도 짐짓 놀랐다.

    “막무가내로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더군요. 뭔가를 아는 눈치입니다.”

    “내려가 보지.”

    소원을 들어달라니. 르니예는 의아함에 구겨지는 미간을 애써 펴며, 벨데메르와 함께 손님 방으로 내려갔다.

    “진짜 바딜이네.”

    “작은 마님.”

    “여긴 어쩐 일이야, 바딜? 에드윈이 보냈어?”

    바딜은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은 모르십니다. 도련님은 모르셔야 하고요.”

    바딜은 벨데메르를 쳐다보았다. 광장에 있는 조각상과 똑같이 닮은 남자. 이전에는 왜 몰랐을까.

    “저는 소원을 빌러 온 겁니다.”

    “그런 건 신전에 가서 빌어, 여기 소원 들어주고 그런 데 아니야.”

    르니예는 바딜을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바딜은 강경하게 버텼다.

    “저도 다 압니다, 작은 마님.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

    뭐야, 정말 다 아는 건가? 르니예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바딜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작은 마님께도 도움이 되는 소원일 겁니다.”

    “글쎄,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도련님이 되게 해 주십시오. 에드윈 라포어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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