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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95화 (95/120)

95화. 하지 않던 짓

“에니, 네가 저 아이를 들어라.”

여기서 에니는 르니예를 구하러 각목을 들고 온 그 에니를 뜻했다.

에니는 겁먹은 채 몸이 굳어 버린 어린 에니를 안아 들었다.

“샤피로, 저 두 사람은 네가 들 수 있겠지.”

“예, 주인님.”

샤피로는 여자와 프리야를 어깨에 한 명씩 들쳐 멨다.

“그대는 내가 들지.”

억울한 마음을 눈빛으로만 잔뜩 표현하는 르니예 앞에서 벨데메르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는 르니예를 짐짝처럼 어깨 위로 들었다.

“어깨가 진짜로 무거워졌군.”

물리적인 의미로, 무거워졌다.

“나를 믿고 이리 큰 사고를 친 건가? 아, 이제는 대답도 안 하겠다?”

대답을 하게 해 줘야, 대답을 하죠? 르니예는 억울했다. 하지만 억울함을 성토할 길이 없었다.

대체 왜 나한테까지 마법을 쓴 거야?

“잘못한 걸 알아서 할 말이 없나? 그렇겠지. 그대는 약속을 어겼으니까.”

위험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르니예는 분명 약속했다. 그 위험한 짓에 선원들과 패싸움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는 못 하겠지.

“약속을 어겼으니 벌을 줘야겠지?”

이미 벌주고 있는 거 아니에요? 르니예는 꼼짝도 하지 않는 입술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대로 집까지 데려가고 싶지만, 그대가 없으면 마법을 쓰지 못하니 풀어주는 수밖에 없군.”

잘 세워두고 마법을 풀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배 아래로 내려온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어깨에 멘 채로 마법을 풀어주었다.

“벨데메르!”

“뭘 잘했다고 큰소리지?”

그랬다. 르니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저 배가 출발할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선원이 다 꼼짝 못 하게 되었으니 출항할 수 없겠군. 우리가 도와줄까?”

“뭐, 저기 영원히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보내 줘야죠.”

“그럼 가만히 있도록 해.”

르니예는 벨데메르 아래로 내려오려던 발버둥을 잠시 멈췄다. 그의 어깨가 넓어 막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머리로 피가 좀 쏠렸다.

뒤에서 들리던 벨데메르의 목소리가 끊기자 이내 펄럭이며 돛이 활짝 펼쳐졌다.

배 위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는데, 배는 알아서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치고, 뱃머리를 돌렸다.

르니예는 벨데메르 어깨에 매달려서 배가 저 혼자 바다로 나아가는 장면을 구경했다.

“그만 내려 줘요.”

“아주 당당하군.”

“……잘못했어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나도 사정이 있었어요.”

기어이 잘못했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벨데메르가 르니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사정 어디 한번 들어 보지.”

“저기, 그, 우리 집에 하녀로 있던 애가 노예로 잡혀가는 걸 봐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에드윈의 정부?”

“어떻게 알았어요?”

기억을 잃은 르니예를 데리러 갈 때 욕실에서 봤다. 가는 길에 에니에게 간단한 설명을 들었고.

“마음이 여린 줄은 알았지만, 내 생각보다 더 무르군. 저 여자 때문에 마음고생 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긴 한데, 따지고 보면 벨데메르를 만날 수 있게 해 주기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예쁘게 말하면, 내가 넘어갈 줄 알았나 본데,

“그렇다면 사정을 참작해 주지.”

넘어가고말고.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의 마법도 풀었다.

“……윽.”

“주인님!”

마법이 풀리자마자 짧은 신음과 당황한 듯한 샤피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거 피 아냐?”

“프리야!”

샤피로가 내려놓자마자 쓰러진 프리야의 옆구리에서 새빨간 선혈이 흘렀다.

“어떻게 된 거야? 언제 이렇게 된 거야?”

“그, 그게, 아까 우리 에니를 구하려다가…….”

배 위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던 여자는 다리가 꼬여 넘어지면서 에니를 놓쳤다.

‘엄마!’

르니예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으나 프리야는 그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아까부터 걸리적거리는 모녀였다. 그들만 없었다면 이런 소동은 없었을 것이다.

르니예가 가진 돈으로 제값은 충분히 치렀을 거고, 그러면 그들은 유유히 걸어서 나갔겠지.

‘에니!’

‘엄마!’

프리야는 그대로 르니예만 데리고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잡혀가면 쟤는 어떻게 되려나? 어린 여자애가 보호자 없이 살아남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일찌감치 마코야데스 눈에 띄어 도둑이 된 프리야는 오히려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렇지 않은 애들 중 안 좋게 풀린 아이들은 사창가로 팔려 가곤 했으니까.

저 아이도 그렇게 될까?

‘으헝, 엄마.’

결국 프리야는 방향을 틀었다. 어차피 르니예와 단둘이 평화롭게 나가는 건 글렀다.

프리야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아이에게 달려갔다. 아이를 되찾는 과정에서 프리야는 옆구리에 부상을 입었다.

남자의 칼에 자신의 피가 묻어나는 것을 보며 프리야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안 하던 짓을 했더니, 바로 피를 보네. 내가 여기서 살아 나갈 운명이 아닌가?’

그러나 다행히 프리야가 버티고 서 있는 동안 벨데메르가 배 위로 올라왔다.

프리야는 선원들과 함께 제 몸이 빳빳하게 굳는 것을 느꼈고,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으며, 이내 옆구리에서 퍼지는 고통에 정신을 잃었다.

“정신 차려, 프리야!”

에니가 프리야를 흔들어 깨웠지만, 프리야는 일어나지 못했다.

“정신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얼른 데리고 가서 치료부터 하자. 에니, 넌 가자마자 의원을 불러 줘.”

그렇게 얼떨결에 프리야는 벨데메르의 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으으.”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쓰러지게 했던 고통이 프리야를 잠에서 깨웠다.

“정신이 좀 들어?”

눈뜨자마자 르니예의 얼굴이 보였다. 보고 싶은 얼굴이었는지 모르겠다만, 안심되는 얼굴이긴 했다.

“……여, 여기는 어디예요?”

“여긴 벨데메르 집이야. 적어도 도둑 길드에 넘기진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쉬어. 깨어난 거 봤으니 난 가 봐야겠다.”

르니예는 샤피로를 부르며 문으로 향했다.

“작은 마님.”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프리야가 르니예를 불렀다.

“왜?”

“……고맙습니다.”

“야, 난 네가 고맙다는 말 못 하는 줄 알았잖아.”

르니예는 프리야를 쳐다보고 픽 웃었다.

“고마운 거 알면 얌전히 있어.”

“손가락도 하나 못 움직이겠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프리야는 어지러워 두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그런 프리야를 쳐다보던 르니예는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벨데메르가 있는 집에 프리야를 눕혀 놓다니.

“이것도 시험이죠?”

르니예는 버릇처럼 고개를 위로 쳐들고 이를 깍 깨물며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리야를 벨데메르와 한집에 두고 나가게 하다니. 아무리 신이 내리는 시험이라지만 이건 너무했다.

“뭘 혼자 중얼거리는 거지?”

“아, 할 말이 좀 있어서요.”

“지붕이랑?”

르니예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가끔 이상한 짓을 종종 하는 르니예인지라 벨데메르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르니예 앞에 작은 병 하나를 들어 보였다.

“해독제다.”

“생각보다 빨리 만들어졌네요. 고마워요.”

르니예는 해독제가 든 병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팔이 닿지 않을 만큼 높게 병을 들어 올렸다.

“그대는 매번 맨입으로 고맙다고 하는군.”

“……나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니에요.”

르니예는 수줍어하면서도 벨데메르의 어깨를 잡고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작고 붉은 입술이 벨데메르의 입술에 닿았다가,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거 어제 밤을 새워서 만든 건데.”

적어도 키스 정도는 해 주어야 하지 않나,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볼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나머지는 외상으로 할게요.”

르니예는 그의 팔을 끌어 내렸다. 순순히 끌려 온 벨데메르의 손에서 르니예는 해독제를 빼냈다.

“그런데 저 여자, 여기에 두고 가도 괜찮겠나? 에니가 꽤 못마땅해하던데.”

“그럴 거예요.”

이건 완전히 르니예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상황이었다. 에드윈과 르니예를 갈라놓은 프리야를, 이번엔 벨데메르와 한집에 두고 가야 하니까.

“그대는 별로 걱정이 안 되나 보지?”

“무슨 걱정이요? 벨데메르가 프리야한테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요?”

르니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걱정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불안하지 않았다.

“벨데메르,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니잖아요.”

일단 벨데메르를 믿었다. 에드윈과 르니예는 프리야가 아니었더라도 애초에 함께할 수가 없었다.

제 몸속에 흐르는 피를 경멸하는 남자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내 소원 아직 안 이루어진 거 잊지 마요. 만약에 쟤한테 넘어가면 나도 에드윈하고 이혼 안 해. 죽을 때까지, 벨데메르를 소원으로 묶어둘 거니까 알아서 해요.”

만에 하나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다를 것이다. 아주 큰 변화가 있었으니까.

르니예, 그 자체가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르니예는 달라졌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뭐라고요?”

“그대 소원에 계속 묶여 있는 거 말이야. 에드윈 그자는 좀 거슬리지만, 그대의 소원에 묶여 있는 건 꽤 괜찮거든.”

진심이었다. 그게 에드윈이 결투에서 지고,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멀쩡할 수 있는 이유였다.

“벨데메르…….”

벨데메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다. 르니예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래서야 벨데메르가 간다고 할 때 보내 줄 수 있을까?

르니예는 설레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애써 삼키며 그의 품에 안겼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이 소원이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그 마음.

“이봐, 바딜, 어딜 다녀온 거야?”

“도련님께서 볼일이 있으시다고 해서 같이 다녀왔습니다.”

상단으로 돌아와 짐 정리를 하는 바딜에게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하인이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그, 작은 주인님하고 프리야하고 끝난 거야?”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아니, 아까 항구에 나간 내 친구 녀석이 프리야를 본 것 같다고 하더라고.”

빨랫감을 챙기던 바딜의 손이 딱 멈췄다.

“항구에서요?”

바딜은 금방이라도 항구로 뛰어갈 기세였다.

“가도 소용없어. 아까 보니까 배에 탔다고 그러더만. 노예상 놈들한테 걸린 모양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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