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93화 (93/120)
  • 93화. 시험 범위가 너무 넓잖아요

    “벨데메르는 해독제를 만들러 갔어.”

    모든 재료와 연구실이 그 집에 있어서 벨데메르는 하는 수 없이 샤피로가 있는 그 집으로 향했다.

    벨데메르는 같이 갈 것을 권했지만, 르니예는 상단에 있어야만 했다. 콜론도 없고, 카밀도 쓰러진 마당에 르니예까지 상단을 비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사지를 마비시키는 독인 줄 몰랐지.”

    르니예는 벨데메르에게 사람을 죽일 만큼의 독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벨데메르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다만 잠시 움직임이 둔해지고 좀 아플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이건 잠시가 아니잖아요, 벨데메르.

    르니예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숙부가 말을 못 하니 이거 협박도 소용이 없잖아.”

    르니예도 계획이 있었다. 일단 카밀 숙부를 중독시킨다. 맹독이 아니라는 걸 숙부는 모를 테니, 해독제를 가지고 거래를 하려 했다.

    “어떤 무역선에 무기를 싣고 오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물어볼 수가 없다. 물어봐도 카밀은 대답을 하지 못하니 말이다.

    “해독제는 언제 완성된대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데.”

    해독제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도 해독제를 뚝딱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침전 어쩌고 하는 걸 보니 하루 이상 걸릴 느낌인데 무역선은 당장 내일 들어온다.

    “그래서 내일 항구에 한번 나가 보려고.”

    “무역선을 뒤지시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그냥 동태만 살필까 해.”

    원래 계획은 카밀을 협박해 어떤 무역선이 무기를 싣고 오는지 알아낸 다음, 그 무역선만 확인하는 것이었다.

    항구에 무역선이 한두 대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일일이 확인을 할 순 없으니까.

    그런데 카밀이 말을 못 하니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필립이 나가겠지?”

    “그렇겠죠.”

    카밀이 몸져누웠으니 카밀 대신 그의 오른팔인 필립이 계획을 진행할 가능성이 컸다.

    “별거 안 할 거야. 벨데메르도 온다고 했으니까 위험한 일도 없을 거고. 우리는 조용히 가서 동태만 쓱 살피고 온다.”

    이건 어디까지나 보험용이었다. 해독제가 단시간에 완성되지 않을 경우, 필립이 어디로 움직이나 봐두기 위함이다.

    하지만 벨데메르가 해독제를 못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무리해서 그를 쫓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별일 없을 거야.”

    벨데메르도 같이 갈 거고, 샤피로도 올 테니 호위는 충분하지. 아, 우리 꿀벌도 있고 말이야. 아주 든든해.

    “그나저나 의원이 왔었다면서?”

    “네, 중풍 같다고 하더라고요.”

    의원은 카밀이 독에 당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같이 있던 르니예의 진술과, 카밀의 상태만 보고 진단을 내렸다.

    그러니 정확한 진단이 나올 수가 있나.

    “프리야는?”

    “도둑 길드랑 접선을 했는데 배신자는 내어줄 수가 없대요. 길드 내 기강이 해이해진다나.”

    프리야 때문에 르니예는 매우 찝찝한 상태였다. 프리야가 좋아졌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하지만 손목이 잘렸으면 싶을 정도로 밉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그리고 그게 자기를 도와주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벌을 받는 거라면, 더더욱.

    “차라리 에드윈을 도와주다가 그렇게 된 거면 좀 덜 신경 쓰이겠는데.”

    “저도요.”

    에드윈이 그토록 매정하게 프리야를 내칠 거라고 에니는 상상도 못 했다.

    겨우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면 프리야랑 그 염병은 왜 떨었담? 괜히 우리 아가씨만 상처받고, 프리야 손목만 잘리게 생겼네.

    “근데 예전만큼 프리야가 밉지는 않으신가 봐요, 아가씨.”

    “솔직히 그만큼 밉진 않아.”

    예전, 그러니까 소원을 빌기 이전이었다면 잘됐다고 했을 거다. 아니면 신경 쓰지 않았거나.

    그러나 에드윈이 시체로 깨어나고 르니예 역시 시간을 거슬러 온 근 한 달간 르니예의 심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프리야를 향한 미움과 분노가 많이 무뎌졌다.

    “지금은 그냥 걔가 어디로 멀리 떠나든 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어.”

    벨데메르와 지내게 되었을 때는, 프리야랑 에드윈이 결혼을 하든 뭘 하든 이혼만 생각했다.

    에드윈이 변하고 나서부터 프리야가 에드윈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지 못한 걸 못내 질책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르니예는 지쳤다. 이미 묽게 희석되어 버린 프리야에 대한 분노를 다시 살리기에, 르니예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단, 두 손목이 멀쩡하게 붙어 있는 상태에서 떠났으면 해. 다시 한번 접선해 봐. 돈은 얼마든지 준다고.”

    “네, 아가씨.”

    에니가 쟁반 위에 다 마신 찻잔과 다과 식기를 올리면서 조용히 웃었다.

    “뭐야, 왜 웃어? 같이 웃자.”

    “죄송해요. 그냥 우리 아가씨가 많이 어른이 됐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나 이미 어른이었거든.”

    이 상황에 철이 안 들면 그게 사람이겠니, 짐승이지.

    “예전에도 심성이 막 고약한 건 아니었는데, 지금은 많이 선해지셨다고 해야 하나? 성격도 많이 죽었고, 이제 막 착한 일도 하시고. 누가 보면 신관이라도 되려고 그러는 줄 알겠어요.”

    에니의 농담에 르니예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위를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위에서도 그렇게 생각하셔야 할 텐데.”

    벨데메르의 연구실.

    체이스가 몰래 쓰던 지하 연구실을 개조하여 만든 곳에서, 벨데메르는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주인님, 고생하셨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샤피로가 깨끗한 수건을 건넸다.

    “항구로 나갈 채비를 해라, 샤피로.”

    “예, 주인님.”

    수건을 다시 받아 들고 나갈 채비를 하려던 샤피로가 멈칫하더니, 다시 벨데메르에게 돌아섰다.

    “옷을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할까요, 주인님? 그, 용병 옷을 또 입으실 겁니까?”

    벨데메르야 무얼 입어도 잘 어울렸다. 거적때기를 입어도 귀티가 흐르는 것이 벨데메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적때기를 입을 필요가 있단 뜻은 아니었다.

    “아.”

    벨데메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딱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다.”

    카밀의 눈을 속이기 위해 용병 분장을 한 것이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카밀 없이 무역선을 맞이해야 할 테니 그 부하들은 정신이 없을 터였다.

    적어도 르니예를 해칠 여유 같은 건 없겠지.

    “게다가 꿀벌도 꽤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주인님께서 손수 만드신 사역마가 아닙니까. 당연히 잘할 수밖에요.”

    그 거지 같은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니 샤피로의 기분은 한층 상쾌해졌다.

    “그래도 항구에는 그자의 부하들이 널려 있을 텐데, 르니예 님께서는 무섭지도 않으신 모양입니다.”

    “아, 나를 믿어서 그렇다는군.”

    벨데메르도 르니예에게 똑같은 것을 물었다. 그들이 또 해치려 들면 어떡하느냐고. 그러자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올려다보며,

    ‘벨데메르가 나 지켜 줄 거잖아요.’

    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벨데메르는 그 믿음을 반드시 지켜 주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샘솟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어깨가 무겁군.”

    어깨가 무겁다는 분 표정이 저렇게 좋을 일인가. 입으로는 불평하면서 눈으로는 웃고 계시군.

    샤피로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는다는 말이 그리도 기분이 좋으셨던가. 어쩌면, 르니예 님을 만나기 전의 주인님은 다시 못 뵐 수도 있겠군.

    “왜 그렇게 보지, 샤피로?”

    “아닙니다. 얼른 채비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주인님이 훨씬 행복해 보이니, 그거면 되겠지.

    “아우, 사람 왜 이렇게 많니.”

    “지난번 풍랑 때문에 출발이 밀렸던 배들까지 다 들어와서 그렇대요.”

    항구는 아주 복잡했다. 보름 전 풍랑으로 일정이 꼬인 배들은 얼른얼른 일을 처리하길 원했다.

    선원이고 상인이고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며 르니예는 혀를 내둘렀다.

    “이래서 필립 찾겠어?”

    “그러니까요.”

    그들은 목을 쭉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필립은 매우 평범하게 생긴지라, 찾기가 더 어려웠다.

    “잠깐만.”

    항구를 따라 쭉 걷던 르니예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돌아보았다.

    “방금 저거, 프리야 아니야?”

    “어디요? 어디?”

    “배 안으로 들어갔어. 아니, 끌려갔어.”

    바람에 나부끼는 금발이 묘하게 재수 없는 게, 프리야가 확실했다.

    “왜 배를 타지?”

    “설마 노예로 팔려 가나?”

    르니에는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노예매매는 불법이지만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역선에 짐처럼 실려 가서, 운 좋으면 어느 부잣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농장에서 잡일을 한다.

    하지만 프리야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노예라면, 말이 좀 다르다. 그 경우는 노예로 살 수 있는 삶에서의 최악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 저기요.”

    르니예는 고개를 뒤로 확 꺾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제가 착하게 산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시험을 너무 다양하고 다채롭게 주시는 거 아닙니까?

    “누구랑 얘기하시는 거예요, 아가씨?”

    “있어, 하늘에 계신 분.”

    ‘프리야를 노예상에게 보내라.’

    마코야데스는 프리야의 손목을 자르는 대신, 프리야를 노예상에 팔았다.

    “차라리 죽이지.”

    손목도 자르고 목도 자르지, 왜.

    배에 짐짝처럼 실린 프리야는 바닥에서 끊어지기 직전인 밧줄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며칠 먹지 못해, 밧줄 하나 끌고 오는 것도 힘에 부쳤다.

    “난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을 거야.”

    아무도 없는데 프리야는 혼자서 계속 중얼거렸다. 두려움을 잊기 위한 프리야만의 방법이었다.

    “어차피 길드에서도 노예나 마찬가지였어.”

    자유롭게 어딜 갈 수도, 길드를 빠져나가지도 못했으니까.

    이 노예 같은 삶은, 죽어야 끝이겠지.

    프리야는 마지막 기운을 쥐어짜 일어났다. 제 옆에 실린 상자에서 끈을 빼내 천장에 걸었다.

    발목에 걸린 족쇄의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프리야를 재촉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너, 지금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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