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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92화 (92/120)
  • 92화. 그대 말고 내 심장이

    르니예는 어머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흐릿한 잔상처럼 보이는 실루엣 정도가 다였다.

    르니예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는 걸, 카밀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만 기억하면 된다니.

    “네 어머니, 그러니까 나한테는 형수님이지. 너 어렸을 때, 여기가 아니라 레버리 영지에 살았던 거 기억하냐?”

    기억은 못 하지만, 들은 적은 있었다.

    “거기 영주가 어떻게든 수도로 올라가고 싶어서, 높은 분들한테 연줄 한번 대보려고 별짓을 다 하는 놈이었거든.”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얼굴로 카밀이 짧게 혀를 찼다.

    “근데 그놈이 결국 수도로 올라갔어요. 어떻게 갔을까? 펠레포네 영지나 레버리 영지나 수도에서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

    레버리 영주는 색다른 방법을 썼다.

    “저 높으신 분들 자제 중에 꼭 하나씩 이상한 애들이 있거든. 사고를 하도 쳐서 부모가 감당이 안 되는 애들.”

    어떤 부모는 간혹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는 사고를 친 애들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어 했다.

    “본인들 소유 영지에서 사고 치는 건 또 싫은 거지. 하여간 이기적인 족속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더 들어봐, 뭐 급한 일 있니?”

    카밀은 티스푼으로 차를 빙글빙글 저었다.

    “아무튼 레버리 영주는 별장을 하나 멋있게 지어 놓고 거기에 그런 애들을 받아 주기 시작했어.”

    후작 아들이고 백작 딸이고 문제가 있는 애들이 레버리 영지로 보내졌다.

    보통은 머리가 커서 사리 분별할 나이가 되면 문제행동은 고쳐지곤 했다.

    그들도 알았던 것이다. 귀족이란 신분이 아주 좋은 것이며, 한순간의 욕망 때문에 잃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라는 걸.

    “아무튼 머리가 좀 크면 사고를 쳐도 수습할 수 있게 치곤 했으니 데리고 갔지. 그러다가 후작 아들이 내려온 거야.”

    다른 애들과는 달랐다. 열일곱 살로 성인식을 한 해 앞두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점잖았으며 품위가 줄줄 흘렀다.

    “영주보다 더 귀족 같다고 형수님이 얼마나 칭찬을 하시던지.”

    “어머니가 그 별장에서 일하셨어요?”

    “보수가 아주 좋았거든.”

    르니예의 어머니는 별장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평범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도련님이 무섭다고 하더구나. 좀 이상하다고.”

    “……이상하다?”

    “밤이면 지하실에서 비명이 들리고, 가끔 도련님 옷에 피가 묻어 있다고 그러더라고.”

    그러던 어느 날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와 콜론에게 별장 일을 그만두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일을 그만둔다고 말하러 간 날, 형수님이 돌아오지 않는 거야. 그래서 콜론 형님이 가게를 나한테 맡기고 그 별장으로 직접 데리러 갔지.”

    그런데 콜론 형님도 한참을 안 오더구나, 카밀은 그날을 회상하며 중얼거렸다.

    “아마 자정도 넘은 시간이었을 거야. 우는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까 형님이 형수님을 업고서 오더라고.”

    평온하던 카밀의 표정도 그때만큼은 괴롭다는 듯 일그러졌다.

    “손목에 낀 실 팔찌가 아니었으면 형수님인 걸 못 알아봤을 거다.”

    “엄마가, 살해당했다는 뜻이에요?”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목뒤가 당겼다.

    카밀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으로 입 주변을 쓸어내렸다.

    “알고 보니 그 도련님이 온 후로 죽어 나간 사람이 많았어. 다 형수님 같은 평민이었지. 형님은 항의도 제대로 못 했고.”

    “……그런데 아버지는 왜 나한테 말을 안 한 거죠?”

    “네가 분노 속에 살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은 자기 혼자면 족하다고, 콜론은 카밀에게도 비밀을 지키길 부탁했다.

    “나도 끝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말해 주는 건데요?”

    “아직도 모르는 거냐? 그 도련님이 바로 네가 돕는 셰론 후작이다.”

    에카도르 셰론. 그가 성인식을 위해 수도로 떠났을 때, 별장 주변에는 이미 많은 피가 뿌려진 뒤였다.

    “네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도와서야 되겠니? 2왕자의 반란을 막으면 셰론 후작은 공작 작위를 받을 거다.”

    엄마를 죽인 사람을 공작으로 만들 것이냐, 카밀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내가 셰론 후작을 도우면 안 된다?”

    르니예가 코웃음을 치자 카밀은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요? 숙부한테 지금까지 속고도?”

    “정 못 믿겠으면 형님한테 가서 물어봐.”

    “그러면 아버지랑 나랑 둘 다 죽이려고?”

    르니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말에 넘어갈 줄 알았나 본데, 예전에 아무것도 모르던 르니예라면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블러디 사파이어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안 이상, 믿어 줄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블러디 사파이어로 셰론 후작에게 복수를 했겠지, 그냥 뒀겠어?

    “어휴, 숙부, 내가 어린애로 보여요?”

    르니예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래도 그건 믿어 줄게. 숙부가 2왕자 반란에 가담했다는 말.”

    적어도 그건 사실이네.

    “안 믿으면 네 손해지, 르니예, 내 조카야. 내일 도착하는 무기가 올라가면 반란이 일어날 거다. 아마 1왕자는 막지 못할 거야.”

    금이 적발당하면서 반란을 뒤로 미룰 것이라 예상했다면, 오산이었다. 2왕자는 오히려 반란 시기를 당겼다.

    준비가 조금 미흡해도 1왕자의 방심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으니까.

    “내가 나가서 막을 거야.”

    “그래? 내 허락 없이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숙부는 내가 여길 혼자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르니예는 킥킥거리며 마음껏 비웃었다. 르니예는 혼자 오지 않았다.

    “그럼 뭐 유령이라도 데려왔냐?”

    “아니.”

    르니예는 천장 모서리를 흘긋 보고 검지를 세워 카밀을 가리켰다.

    “벌을 데려왔는데.”

    “뭘 데려, 윽!”

    카밀은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목덜미를 잡으며 쓰러졌다. 그의 손을 피한 꿀벌이 유유히 르니예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잘했어, 내 새끼.”

    르니예가 엉덩이를 토닥이자 꿀벌이 기쁘다는 듯 벌침을 씰룩거렸다. 벨데메르가 호신용으로 달아 준 벌침은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걱정하지 마요, 숙부. 아마 해독제가 있을 거야.”

    카밀은 목 뒤를 부여잡고 꺽꺽거리면서 넘어갔다. 카밀의 귀에 대고 르니예가 작게 속삭였다. 르니예는 카밀을 벌써 죽일 생각이 없었다. 아직 쓸모가 좀 있었다.

    “금방 가져다줄 테니까 그동안만 버텨요.”

    르니예는 쓰러진 카밀을 보고 놀란 척을 좀 했다. 그런 다음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는 시늉을 하며, 카밀은 그의 부하들에게 맡기고 유유히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잘 해결됐나 보군.”

    “네, 꿀벌 덕분에요.”

    벨데메르는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뛰어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 기다리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다음번에는 같이 들어가지, 위험해서 안 되겠어.”

    “하나도 안 위험했는데요.”

    “아니, 그대 말고 내 심장이.”

    얼마나 쿵쿵 뛰던지 과호흡으로 쓰러질 뻔했다. 르니예를 보자마자 안심이 되면서 그제야 흐트러진 호흡이 돌아왔다.

    “농담도 많이 늘었네요, 벨데메르.”

    르니예는 농담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벨데메르는 진심이었다.

    “참, 꿀벌 독 해독제는 어디에 있어요? 샤피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해독제? 없는데.”

    “에이, 농담하지 말고요.”

    벨데메르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르니예를 마주 보았다.

    “해독제, 만들지 않았다. 해독제가 굳이 필요한가?”

    해독을 시켜줄 거라면, 애초에 중독시킬 필요가 없지 않나. 해서 벨데메르는 해독제를 따로 만들어두지 않았다.

    르니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럼 뭐야? 나 지금, 해독제도 없는 독으로 숙부를 공격한 거야?

    “필요하다면 만들어 주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들고자 하면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 * *

    “배신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잘 아는 애가 왜 그런 짓을 했지?”

    “안 그랬어요. 배신이나 그런 게 아니고, 못 할 것 같아서, 네?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프리야는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 길드로 잡혀 온 뒤 아무것도 먹지 못한 몸은 빌 기운도 없었지만, 프리야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짰다.

    “대장, 제발.”

    프리야의 시선은 연신 마코야데스 앞 테이블에 놓인 작두로 향했다.

    도둑 길드에서 배신자는 손을 잘렸다. 두 번 다시 도둑질하지 못하게.

    도둑이 도둑질 하는 재주를 잃으면 굶어 죽거나 구걸하며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살아남았을 때의 일이다. 보통은 그 전에 치료를 받지 못해 후유증으로 죽는다.

    “난 너를 딸처럼 여겼어.”

    화상 흉터로 일그러진 마코야데스의 얼굴 반쪽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넌 나를 배신하는구나.”

    “정말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마코야데스는 며칠 새 초췌해진 프리야를 내려다보았다.

    “제발 살려 주세요.”

    “……프리야, 내 딸아.”

    그는 한숨처럼 프리야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는 프리야를 아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프리야에게 선처를 베푼다면, 길드의 기강이 무너질 터였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너를 죽이진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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