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90화 (90/120)
  • 90화. 어그러진 계획

    “도련님.”

    “바딜!”

    에드윈은 바딜을 보자마자 치솟는 신경질을 내리눌렀다.

    “대체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지? 아니, 일단 채비를 해라. 수도로 갈 것이다.”

    “수도로요?”

    “그래. 오늘 당장 출발할 거니까 어서 서둘러라.”

    서두르라고 분명 말했음에도 바딜은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도련님, 프리야가 없어졌습니다. 그 길드에 잡혀갔어요.”

    에드윈은 한숨을 내쉬며, 날카롭게 나가려는 목소리를 내리눌렀다.

    “프리야가 없어진 건 어떻게 알았지?”

    “……프리야가 쪽지를 써놓고 갔습니다.”

    “너에게?”

    떠난다는 인사를, 내가 아니라 바딜에게 했다니. 아껴 주고 보호해 준 사람이 누구인데.

    에드윈은 새삼 프리야에 대한 배신감이 타올랐다. 그 배신감은 바딜에게까지 튀었다.

    떠날 때 작별 인사를 남겨놓고 갈 정도로 둘 사이가 깊었던 건가? 나를 두고 둘이 아주 애틋했나 보군.

    “그럼 알아서 떠난 거겠지.”

    앞으로 할 일이 중요했기에 바딜을 질책하는 건 뒤로 미뤘다.

    “길드에 잡혀간 겁니다.”

    “아니, 돌아간 거겠지.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면서? 잡혀가는 사람이 편지를 쓸 시간도 있나?”

    바딜은 도둑 길드에 접촉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가 입을 열 시간도 주지 않았다.

    “바딜, 지금 우린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 프리야는 그만 잊어.”

    “도련님…….”

    에드윈은 바딜의 두 어깨를 단단하게 붙들었다.

    “정신 차려라, 바딜. 프리야가 너도 속이고 떠난 거야. 그러니 어서 수도로 떠날 채비를 해라. 알겠나?”

    바딜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 무수한 말 중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졌다.

    나온다고 해도, 에드윈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예.”

    바딜은 에드윈의 방에서 나왔다. 에드윈은 그 ‘대의를 위한 일’에 눈이 멀었다.

    프리야는 그의 안중에서 저 멀리 벗어났다. 프리야를 도와줄 다른 사람은 없을까? 혹시 작은 마님이라면…….

    “뭐야, 바딜?”

    바딜은 에니의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짐을 싸러 가려 했는데, 어느새 발길이 르니예의 방 쪽으로 온 모양이었다.

    혹시나,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프리야는 르니예가 시키는 일을 몇 개 했다고 했다.

    그러니 혹시 르니예가 프리야를 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바딜.”

    아니다. 르니예에게 프리야는 그저 남편을 빼앗아 간 눈엣가시일 뿐이겠지.

    도와줄 리 없었다. 바딜은 그대로 걸음을 뗐지만, 에니가 조금 더 빨랐다.

    “뭔데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가? 뭐야, 어?”

    르니예의 편인 에니와 에드윈을 싸고도는 바딜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바딜을 돌려세우는 에니의 손길이 거칠었다.

    “작은 주인님이 우리 아가씨 감시라도 하래?”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왜 여기 와 있는데?”

    에니는 바짝 날을 세웠다.

    “뭐냐고.”

    “그.”

    바딜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프리야가 없어졌어.”

    “프리야?”

    그러고 보니, 프리야가 안 보였네.

    에니는 정신이 없어서 프리야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신경 써 줄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길드에 잡혀간 거 같아.”

    “길드라니, 무슨 길드?”

    “……도둑 길드.”

    도둑 길드? 에니는 기가 찼다. 뭘 자꾸 훔친다 했더니 도둑 길드 출신이었어? 그냥 좀도둑이 아니었구나, 이거.

    “길드로 돌아간 거 아니야?”

    “아니야. 배신했다고 했어. 훔친 걸,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작은 마님께 부탁해서 도와줄 수는 없어?”

    에니는 바딜과 눈을 맞추었다.

    “너 같으면 도와주고 싶겠어? 작은 주인님한테 도와달라고 해.”

    “프리야는 작은 마님 빼돌리다가 도련님한테 버림받았어.”

    그런 얄팍한 애정이었단 말이야? 겨우 배신 한 번에 돌아설 마음으로 우리 아가씨 마음에 그 상처를 냈어?

    에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드윈에게 화가 나면서도, 프리야가 신경 쓰였다.

    “아가씨한테 말해 볼게. 큰 기대는 하지 마. 우리 아가씨가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에니는 차갑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바딜은 눈을 질끈 감았다.

    프리야를 위해 바딜이 할 수 있는 것은 애원이 최선이었다. 마음에 품은 여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겨우 애걸복걸하는 것뿐이라니.

    “……이래 놓고 뭘 안심하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까.”

    지켜 준다는 약속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인가. 바딜은 프리야를 끝내 지켜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도련님이라면 충분히 지켜 줄 수 있을 텐데. 도련님이었다면, 가능한 일인데.

    내가 만약 도련님이었다면, 절대 프리야를 저렇게 두지 않았을 텐데.

    “뭐? 도둑 길드? 출신이 아주 대단한데?”

    프리야가 뭘 훔치러 작정하고 들어온 건 알았지만, 도둑 길드에서 왔다는 건 몰랐다.

    “그럼 누가 훔쳐 오라고 시켰다는 거잖아.”

    프리야는 그저 훔치러 들어왔다고만 말했다. 길드에 소속되어 있단 얘기는 쏙 빼놓고 했네, 이게.

    “누가 훔쳐 오라고 시켰을까? 블러디 사파이어에 관해 아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건데.”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쳐다보았다.

    “이거야말로 샤피로에게 물어봐야겠군.”

    벨데메르가 조각상 안에 있을 때, 블러디 사파이어 관리는 샤피로의 몫이었다.

    “프리야, 어떻게 할까요?”

    “거, 되게 신경 쓰이네.”

    프리야가 사라지면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았는데, 막상 사라지니 이렇게 신경이 쓰일 수가 없었다.

    그냥 사라진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저를 돕다가 잡혀갔다니.

    “에드윈, 그자가 구하도록 놔두지.”

    “그게, 안 구해 주신다고 하셨대요.”

    “하, 정말이지 그자는.”

    벨데메르는 말을 아꼈다.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한심함을 표현했다.

    “그런 길드는 배신하고 그러면, 보통 죽이고 그러지?”

    “그렇겠죠. 들리는 말로는 다시는 도둑질을 못 하게 손을 자른다는 얘기도 있고.”

    르니예는 한숨을 푹 쉬었다. 프리야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진 않는데, 손목이 잘리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돈으로 되나 알아봐. 어쨌든 대가를 주기로 했으니까 그걸로 대신하자고.”

    “네, 아가씨.”

    하여간 끝까지 신경 쓰이게 한단 말이야, 얘는. 도움이 안 되다가 잠깐 도움 됐을 때 잡혀갈 건 뭐란 말이야.

    “그대는 마음이 참 약하네.”

    “손목이 잘리는 건 좀 그렇잖아요.”

    마음이 약해진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너그러워졌다고 해야 맞겠지.

    “곧 다 정리될 건데, 괜히 찝찝하게 남겨 두고 싶지 않아요.”

    지금쯤이면 수도는 난리가 났겠지? 그 난리가 펠레포네 영지까지 내려올 날도 멀지 않았다.

    “우리 손자가 무슨 작위를 받으려나, 아무리 못해도 남작은 주겠죠?”

    “그래, 남작이라도 받아오면 좋겠군.”

    벨데메르는 펙의 그 맹한 얼굴을 떠올렸다. 라인허트의 핏줄에서 어떻게 그런 게 나올 수가 있었을까.

    그래도 다 떠먹여 줬는데 실패하지는 않을 테지.

    “그냥 뇌물로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이든의 날 선 시선이 펙에게로 향했다. 펙은 고개를 푹 숙였다.

    “분명히 무기라고, 무기라고 하셨는데…….”

    왜 거기에 금이 들어 있는 거지?

    뇌물을 받는 것은 불법이긴 했지만, 반란 준비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왕비의 오라비이고 2왕자의 숙부인 노르딕 백작에게 연을 대고 싶은 영주가 몰래 뇌물을 보냈다.

    백작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 영주가 얼마나 수도로 올라오고 싶었으면 그랬겠냐, 선처를 부탁드린다.

    이렇게 노르딕 백작이 자숙 좀 하면 끝날 일이 되어 버렸다.

    “너무 그러지 말게, 이든 경.”

    “후작님!”

    “적어도 그들이 금을 요구했단 사실은 알아내지 않았나. 무기가 아니라 금을 요구했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

    이든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무기를 쓸 사람이 사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셰론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펙에게 다정히 말을 건넸다.

    “라인허트 경.”

    “면목이 없습니다, 후작님.”

    “그런 말 말게. 아직 끝이 아니야. 펠레포네 영지에는 무기가 아니라 금이었다고 연락을 넣었나?”

    “예, 바로 서신을 보냈습니다.”

    * * *

    그 서신은 이번에도 루이가 가지고 왔다. 긴급한 서신에 루이의 수도 여행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루이는 거의 쉬지 않고 달려 이틀 만에 펠레포네 영지에 도착했다.

    늦은 밤, 루이는 뒷문을 통해 상단으로 들어갔다. 서신은 메리의 손에서, 에니에게로, 마지막으로 르니예에게 전달되었다.

    “금이었다고? 화살촉이 아니라 금?”

    르니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그냥 뇌물이잖아!”

    그냥 뇌물 공여죄는 반란과 엮을 수 없다.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어떻게 해요, 이제?”

    “더 확실한 증거를 찾을 때까지 카밀 숙부는 일단 둬야겠지.”

    그래, 어쩐지 술술 풀린다 싶더라니. 르니예는 입 안 여린 살을 짓씹었다.

    “그쪽도 소식을 들었을 거야. 더 이상 소금 자루에 숨기거나, 우리 상단을 통해서 뭘 보내지 않겠지.”

    하지만 그건 무기가 펠레포네 영지에 도착한 다음 일이다.

    무기는 무역상을 통해 공수받고 있고, 무역상을 빠르게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이미 무기가 무역선에 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음 무역선이 언제 들어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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