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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89화 (89/120)
  • 89화. 난 그냥 귀여운 발을 가졌을 뿐인데

    “그대가 그렇다면, 믿겠다.”

    벨데메르는 따져 묻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르니예가 싫다고 도망친대도 다시 데려와 기어코 옆에 둘 것이니.

    그는 르니예의 볼을 쓰다듬고, 턱을 쥐어 저를 보게 했다.

    “하지만 그대는 나를 이렇게 만든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이렇게……라뇨?”

    “나를 변태로 만들었잖아. 난 사제보다 더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여자고 남자고, 손 한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었다.

    “그런 나를 그대 발이나 훔쳐보게 만든 사람이 누구지?”

    “……그게 나인가요?”

    “그럼 샤피로겠어?”

    르니예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그냥 내 발이 귀여워서 그런 거 아닌가?

    난 그저 귀여운 발을 가졌을 뿐인데, 이건 좀 억울한걸!

    아니, 아니지. 르니예는 또 순간 뻔뻔해지려는 저 자신을 바로잡았다.

    벨데메르의 첫 키스를 받아 간 건 맞잖아. 그 뒤로 그가 마법을 핑계로 대며 찾아왔을 때 매번 받아 주기도 했고.

    “대가를, 뭘로 받으려고요?”

    “그건 그때 가서 말해 주지.”

    궁금하지만 꾹 참는 게 표정으로 다 보였다. 벨데메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내렸다.

    “그보다, 그 전에 나한테 줄 게 있지 않나? 저 편지를 가져온 대가로.”

    벨데메르의 엄지가 르니예의 입술을 훑었다. 아랫입술을 벌리며 들어간 손가락이 고른 앞니를 살짝 건드리고, 르니예의 통통한 혀끝을 내리눌렀다.

    “비싸게 받을 거라고 분명 얘기했어.”

    “그, 그렇죠.”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아는 르니예는 양 볼을 붉혔다. 에니가 보습제를 준비한다고 할 때 말리지 말 걸 그랬나.

    “열여섯의 그대는 거침없던데 어쩌다 이렇게 변했지?”

    “벨데메르는 열여섯 살 때 내가 마음에 들어요? 벨데메르한테 막 안마시켰는데?”

    “안마가 낫지, 아무래도 남의 방을 몰래 들어가는 것보다는.”

    말을 하던 벨데메르는 피식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그대는 나에게 참 이것저것 시키는군.”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르니예는 민망해 벨데메르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난 계산은 깔끔한 사람이에요.”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고. 상단 운영에 무관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인의 딸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받을 걸 좀 더 받는 사람이었지만.

    “그런가? 난 잘…….”

    벨데메르의 말은, 그의 아랫입술에 닿는 르니예에 의해 서걱 잘려 나갔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는 르니예의 목뒤로 벨데메르의 커다란 손이 감겼다.

    르니예가 도망갈 길을 완전히 차단한 벨데메르는 열정적으로 입을 맞춰왔다.

    채 다물리지 않은 입술 틈으로 그의 혀가 밀려들었다. 여린입천장을 훑고 혀뿌리를 간질이는 그의 혀에 르니예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으…….”

    조용한 방 안에 타액이 넘나드는 소리가 민망하게 울렸다. 르니예는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부유감에 벨데메르의 옷깃을 꼭 쥐었다.

    파르르 떠는 그 작은 손을 잡아 제 목뒤로 보내면서 벨데메르는 느리게 르니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벨데메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르니예는 서서히 기울어졌다. 등 뒤로 푹신한 매트리스가 닿는 것을 느끼며 르니예는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수, 숨이….”

    숨이 모자랐다. 벨데메르가 살짝 입술을 떼주자 르니예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모자라 어지러운 건지, 벨데메르 때문에 어지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폐활량이 형편없네.”

    “벨데메르가 좋은 거라구요.”

    벨데메르는 삐죽 튀어나오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색이 짙어진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더운 숨이 달았다.

    숨이 달다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달아서 전부 집어삼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연습하면 늘겠지.”

    르니예의 가쁜 숨소리가 잦아들자마자 벨데메르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 느리고 나긋한 키스가 이어졌다.

    르니예의 숨이 끊어질 듯 가늘어지면 잠시 입술을 떼어 줬다가, 다시금 입술을 붙여 왔다.

    제 혀를 옭아매는 그의 혀에 르니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벨데메르가 변하지 않았으면, 이 모든 게 소원 때문이 아니었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르니예는 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는 것을 깨달으며, 벨데메르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그에게 소원을 빈 대가가, 적어도 오늘은 달콤했다.

    * * *

    “라인허트 경.”

    “예?”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나.”

    이든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아, 그, 죄송합니다.”

    펙은 머리를 긁적였다. 벨데메르가 준 약을 먹으면 영안이 닫혀 유령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펙은 버릇처럼 유령이 있을 법한 허공을 살피며 경계했다.

    “저길 좀 보게. 펠레포네 영지에서 들어오는 상단인 것 같은데.”

    “맞는 것 같습니다.”

    펙은 루이라는 사람에게 서신을 받았다. 루이가 바로 에니가 말한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메리 아주머니의 소원으로 건강해진 루이는, 거의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상단 일행보다 일찍 수도에 도착했다.

    덕분에 펙은 적시에 정보를 받아 셰론 후작에게 가져갈 수 있었다.

    셰론 후작은 펙에게 이든을 붙여 주며 가서 반란의 증거를 잡아 오라 명령했다. 공을 세울 좋은 기회였다.

    “자, 다음.”

    문을 지키는 병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드디어 콜론 상단의 차례가 돌아왔다.

    “우리도 가 볼까.”

    “예.”

    병사들이 수레를 살피고, 상자를 열어 보았다. 펙은 긴장한 채로 이든의 뒤를 따랐다.

    “좋아, 통과.”

    병사가 수레를 탁탁 치며 통과를 명한 순간, 이든이 상단 앞을 가로막았다.

    “검역을 그리 대충 하고 통과인가?”

    “예?”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거 같은데.”

    이든은 검 끝으로 수레를 덮은 낡은 천을 걷어냈다.

    “이건 뭐지?”

    “그건.”

    상단 일행이 대답하려 하는 것을 막고, 이든이 통과를 명한 병사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대답해 보게, 이게 뭐지?”

    “그게, 그, 소금, 같습니다.”

    “확실한가? 열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소금이라고 확신하지? 밀이거나 설탕일 수도 있는데.”

    병사는 불안한 듯 혀로 입술을 연신 핥았다.

    “열어보게.”

    “예? 아, 예.”

    병사는 수레 위로 올라가 소금 자루를 열었다. 그들 사이로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소금 맞습니다.”

    “소금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같이 수레로 올라간 펙은 병사가 말릴 틈도 없이 소금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손끝으로 거칠거칠한 자루가 잡혔다.

    “이건 뭐죠?”

    펙은 그대로 자루를 들어 올렸다. 소금이 하얗게 옆으로 튀었다. 자루는 묵직했다. 펙은 회심의 미소를 숨기느라 애를 먹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해 보게.”

    “예, 이든 경.”

    펙은 기세등등해져서 자루를 풀어 헤쳤다. 편지에서는 분명히 화살촉이 들어 있다고 했다.

    화살촉이든 화살이든 검이든 뭐든 좋았다. 무기 밀수의 증거만 된다면.

    “……이, 이건.”

    하지만 자루 안에 든 건 화살촉이 아니었다.

    “뭔가?”

    “금인데요.”

    펙의 난감한 목소리와, 이든의 곤란한 표정이 뒤섞였다.

    무기라더니, 금이라고?

    이든의 질책하는 눈빛에 펙은 눈을 내리깔았다.

    “분명, 분명히.”

    화살촉이라고 하셨잖아요, 할머님!

    * * *

    “아기씨는 좀 괜찮으셔?”

    “네, 상처도 많이 아물었어요. 루이는 아직 안 돌아왔죠?”

    “천천히 구경하면서 오라고 했어.”

    메리의 얼굴에 걱정이라고는 없었다. 루이는 이제 그 누구보다 건강했다.

    “한 번도 멀리 나가본 적 없으니까. 갔다 오는 김에 여행도 하면 좋잖아.”

    루이는 이제야 남들이 누리는 것을 누리기 시작했다.

    “참, 에니.”

    “네.”

    “아기씨께서 상단주가 되실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

    상단주? 그 이야기는 나눠 본 적이 없어서 에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상단주께서 안 계시니까 부단주가 주인인 양 구는 거 아냐. 아기씨 나이도 다 차셨고, 물려받을 때 되지 않았어?”

    “하지만 상단주께서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계시는데요?”

    “두 눈 멀쩡히 뜨고 감옥에 계시잖니.”

    그건 맞는 말이었다.

    “말씀드려 볼게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그랬나.

    때가 되면 콜론이 알아서 르니예에게 물려주겠거니, 했다. 굳이 상단주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에니도 르니예도 별생각이 없었다.

    “이제는 생각해 볼 때가 됐지.”

    에니는 얼음주머니를 올린 쟁반을 옆구리에 끼고 르니예 방문을 두드렸다. 르니예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얼음, 필요하실 것 같아서.”

    르니예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방 밖으로 나왔다.

    “이 정도면 피 난 거 아니에요?”

    에니가 르니예의 입술을 보고 놀라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야.”

    “아니, 무슨 밤새도록 키스만 한 사람 같네.”

    “…….”

    “……?”

    이 반응 뭐지? 농담으로 던진 건데, 사실인가 본데?

    “진짜 키스만 하셨어요?”

    “……어.”

    “밤새도록?”

    “응.”

    왜지? 에니는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차마 묻기 민망해 그냥 참았다.

    “루이는 돌아왔대?”

    “아직요. 천천히 구경하면서 오라고 했대요.”

    “겸사겸사 여행하면 좋지.”

    에니는 르니예의 입술 주변으로 얼음주머니를 대주며 속삭였다.

    “그런데 메리 아주머니께서, 이번 기회에 상단주 되실 생각 없냐고 묻던데요.”

    “내가?”

    “네. 그런데 제 생각에도 차라리 아가씨가 상단을 맡아 운영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부단주가 반란에 연루되어 잡혀가면, 어수선한 상단을 정리할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아버지가 걸리긴 하지만, 안 계시니까.”

    다시 말하지만, 르니예는 그다지 효녀는 아니었다.

    “그럼 네가 부단주 하는 거야?”

    “제가요?”

    내가, 부단주? 에니의 귀로 부단주라는 단어가 환청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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