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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88화 (88/120)
  • 88화.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

    “하.”

    카밀의 사무실. 몰래 창문을 열고 들어가며 벨데메르는 실소를 터트렸다.

    “별짓 다 하는군.”

    색다르긴 했다. 평생 해 보지 않은 일. 르니예를 만나고부터 벨데메르는 평생 해 보지 않았던 걸 하고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결혼 생활이라든지,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입맞춤이라든지, 그런 것들 말이다.

    평범한 일들. 한 번도 거들떠본 적 없는 삶.

    “이건 평범하지 않지.”

    그래, 적어도 남의 사무실을 터는 건 평범하다고 할 수 없었다.

    “마법만 쓸 수 있다면 찾는 건 일도 아닌 것을.”

    마력이 꿈틀거렸다. 피부 바로 아래에서 박동하는 마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쓸 수가 없다니.

    “하지만 마력이 없어도, 이 정도쯤이야.”

    마력은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 전부를 바쳐서 얻어내고 싶은 힘이기는 했으나, 벨데메르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검도 있었고, 소리 없이 걸을 수 있는 기술도 있었으며,

    “부단주라는 인간이 제법 머리를 썼군.”

    눈썰미라는 것도 있었다.

    “편지를 숨기기에 저만큼 적합한 장소도 없지.”

    벨데메르의 시선이 머문 곳은 벽난로였다. 불씨가 옅게 남아있는 벽난로를 향해 그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벽난로 안쪽은 차곡차곡 쌓인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장작이 타면서 재와 검댕이 까맣게 묻은 벽돌 중, 묘하게 깨끗한 것이 있었다.

    “자주 빼내서 확인했나 보군.”

    아무래도 편지니 불안했으리라. 그 미묘하게 깨끗한 벽돌은 다른 벽돌보다 살짝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벨데메르는 그 벽돌을 잡아 뺐다. 파여 있는 벽돌 안쪽에, 그가 찾던 서신이 들어 있었다.

    벨데메르는 서신을 주머니에 넣고 벽돌은 제자리에 두었다.

    “이건 정말 값을 비싸게 받아야겠어.”

    그는 더러워진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금도 보낸 건가.”

    필립이 돌아가고 난 후, 카밀의 예상처럼 에드윈은 다시 금고에 들어갔다.

    비어 있는 상자가 있었다. 빈 상자를 치우지 않은 건, 카밀의 실수였다.

    콜론이 없는 지금, 금고를 관리하는 사람이 카밀 본인이었기에 방심한 것이다.

    “자금을 모으고 있어. 용병을 사려는 건가?”

    2왕자가 용병을 사 아예 궁으로 밀고 들어갈 계획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2왕자 쪽으로 자꾸 자금이 흘러가면 좋지 않았다.

    “빨리 서신을 보내야 한다.”

    편지지를 빼던 에드윈은 책상 한쪽에 처박힌 이혼 서류를 보고 멈칫했다.

    볼 때마다 그날의 패배가 떠올랐다.

    “이건 대의를 위해서야. 이혼은 급한 거 없잖아.”

    그는 꼴도 보기 싫은 이혼 서류를 구겨 버렸다. 서류야 언제든 다시 떼면 그만이었다.

    “부인을 살리기 위해서고.”

    2왕자의 반란이 수면 위로 드러나도 르니예는 무사할 것이다.

    에드윈은 반란을 막은 공신 중 하나가 되어 있을 테고, 르니예는 그의 부인이니 말이다.

    라인허트 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 가문은 르니예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부인을 지키는 건 내가 될 겁니다.”

    벨데메르는, 비록 그를 결투에서 이겼지만, 르니예를 지키는 일에서는 지게 될 것이다.

    용병 옷을 입고 르니예 옆에 종일 붙어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곧 알게 되겠지.

    “서신을 보내는 건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 내가 직접 가는 게 낫겠어.”

    셰론 후작을 만나러 수도로 올라가려는 에드윈은 바딜을 찾았다.

    “바딜. 바딜?”

    어서 채비해 수도로 가야 하는데 바딜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은 대체 어딜 간 거야?”

    바딜은 도둑 길드를 찾는 중이었다. 잘 지내라고 작별 인사를 담은 쪽지는 보았다.

    그러나 바딜은 확신할 수 있었다. 프리야는 잡혀갔다.

    바딜은 프리야가 말한 여인숙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짝 긴장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혼자 오셨소?”

    바딜은 카운터로 걸어가 헛기침을 하며 속삭였다.

    “바퀴가 두 개인 마차를 타고 왔습니다.”

    여인숙 주인은 바딜을 아래위로 훑었다.

    “흠, 길드 사람이오?”

    “……그건 아닙니다.”

    “그럼 의뢰?”

    바딜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숙 주인은 식당 맨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리 가 보쇼.”

    “감사합니다.”

    바딜은 주머니에 넣은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에드윈의 돈이었다.

    돈을 훔친 걸 알면 에드윈이 화를 내겠지만, 프리야만 구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혼날 수 있었다.

    “크흠.”

    “뭡니까?”

    “저, 도둑 길드…….”

    바딜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앉으세요.”

    바딜은 남자 앞에 앉았다. 험악한 인상을 기대했지만, 남자는 아주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너무 흔한 얼굴이라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의뢰?”

    “사람을 찾습니다.”

    “우린 사람 찾아 주는 일은 안 하는데. 훔쳐 주면 모를까.”

    남자가 조용히 읊조리고 혼자 웃었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프리야를 찾습니다.”

    “……누구?”

    남자가 되물었다.

    “프리야요.”

    “프리야를 찾으신다? 혹시 그 귀족 나리신가?”

    남자는 바딜을 아래위로 훑었다.

    “아니신 것 같은데.”

    “저희 주인님이십니다.”

    “아아, 주인님 대신 오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바딜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넣어 온 금화를 꺼냈다.

    “프리야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봐요.”

    남자는 금화를 쳐다보고 피식피식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로는 턱도 없어요. 게다가 우리를 찾아온 거면 프리야가 길드에 관해서 이야기했단 뜻인데, 그거 대장 귀에 들어가면 더 안 좋습니다.”

    남자는 프리야와 일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그는 배신한 길드원의 최후를 알았다.

    바딜이 헤집고 다니는 걸 마코야데스가 알면, 프리야의 최후가 더 비참해질 뿐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눈이 돌아갈 만큼 큰 금액을 가져와도 될까 말까요. 또 모르지, 그 귀족 나리가 와서 애원하면 돌려줄지.”

    마지막 말은 그냥 해 본 말이었다. 남자가 아는 한, 귀족은 겨우 천한 여자애 하나 때문에 도둑 길드까지 오지 않는다.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딜은 다르게 알아들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봉투에 찍힌 인장이 영주의 것이 맞아요.”

    르니예의 예상대로 카밀은 영주가 보낸 서신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내용이 든 건 전부 간직하고 있었네요.”

    보관하고 있는 서신이 많지는 않았지만, 알짜배기 정보는 다 들어 있었다.

    “아버지를 감옥에 넣어 줄 테니,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보내라고도 했어요. 이거면 우리 아버지가 반란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거예요.”

    르니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리 숙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니까.”

    르니예는 서신을 책 속에 넣어서 책장에 끼웠다.

    “거기는 안전한가?”

    “일단은요. 가장 안전한 데는 벨데메르 집이죠. 들켜도 거긴 책이 많아서 찾기 힘들 거야.”

    르니예는 잠시 카밀과 그 수하들이 책 속을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들이 그 책을 찾기도 전에 아마 펙이 소금 자루 안에 든 무기를 찾아낼 것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1왕자 측에서 알아서 하겠지.

    “벨데메르는 그 책 다 읽었다고 그랬죠? 마법서라고 했던가?”

    “그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도 봉인을 깰 방법이 있는지 연구하고 있었다.”

    “아직 못 찾아낸 거죠?”

    그러니 아직도 소원을 들어주고 있겠지.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소원의 개수를 채우고 봉인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더 효율적이었다.

    르니예가 뭐라고 하든 아무 소원이나 막 들어줘 버리면, 한 달 안에 봉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반란 일이 해결되면 얼른 소원 개수를 채워요.”

    “솔직히 말하면, 개수를 채우지 않고 봉인을 깨고 싶었다.”

    그래서 르니예의 뜻을 따라 주었다. 의미 있는 곳에 소원 쓰기?

    그것이야말로 벨데메르에게 아무 의미 없었다.

    “이번에는 이겨 보고 싶었거든.”

    신이 옭아맨 밧줄을 제 손으로 잘라낸다면, 그것이 이기는 일이라 여겼다.

    이것 보아라, 소원 따위 이뤄 주지 않고도 내 힘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

    그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래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군.”

    책을 들여다보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연구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벨데메르는 연구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애써 지하실을 연구실로 꾸몄건만, 막상 제대로 쓴 적이 없었다.

    대신 그 시간에 그는 르니예와 함께 있었다.

    “어서 빨리 봉인을 풀고, 증명해 보이고 싶을 뿐이다.”

    “증명이라면…….”

    “그래, 내가 그대의 발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게 소원 때문이 아니라는 증명.”

    예기치 못한 이야기에 르니예가 벨데메르의 어깨를 주먹으로 콩콩 때렸다.

    “그만 놀려요.”

    “놀리는 거 아닌데. 진심인데? 이거 봐, 그대는 믿질 않잖아.”

    내가 벨데메르를 변태로 만들었다는 걸 믿고 싶겠어요?

    “가끔 생각해. 그대가 나를 떠나고 싶어 핑계를 대는 건 아닌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겁이 좀 나는 거다. 벨데메르가 다시 변할까 봐.

    그런 그에게 매달리는 저를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시선으로 볼 벨데메르를 떠올리면 심장이 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결국 르니예는 무너지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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