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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84화 (84/120)
  • 84화. 이용

    르니예가 상단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저를 작은 마님이라고 부른 하인에게 성질을 내다, 성질에 못 이겨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원이 왔다 가고 의식을 차린 르니예는 에드윈을 찾았다.

    남편이 아내의 간호를 하지 않는 것이 말이 되냐,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재촉하기에 에드윈은 결국 르니예의 방에 들렀다.

    “부인?”

    “잠이 드셨습니다.”

    “당장 오라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에드윈은 쌕쌕 고른 숨을 내쉬는 르니예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일어났을 때 작은 주인님께서 계셨으면 하십니다.”

    “요구가 많으시군.”

    에드윈은 그러면서도 르니예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벨데메르를 만나고 왔어도 르니예는 여전히 기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에드윈의 계획에 아직 차질이 생기지 않았단 뜻이었다.

    “너무 빨리 기억을 찾진 마세요, 부인.”

    르니예는 이혼도 기억하지 못했다. 혹여 누군가에게 들어서 안다고 해도, 지금 르니예가 이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온전한 정신이 아닌 이의 이혼 요청을 법원에서 받아 줄 리도 없었다.

    르니예가 다친 것은 안타깝지만, 에드윈에게는 좋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일이 끝나면 부인의 뜻대로 해 드릴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이대로 계세요.

    에드윈은 르니예의 이불을 더 위로 올려 주고는 의자 등받이에 깊게 기댔다. 그때였다.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에 무언가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에드윈은 빛을 반사한 물건을 보고 홀린 듯이 일어섰다.

    “이건.”

    그는 르니예가 장식품처럼 벽에 걸어 둔 화살촉을 떼어냈다. 억지로 뜯어내는 바람에 옆에 걸려 있던 다른 장신구까지 우수수 떨어졌다.

    “으, 뭐야, 자는데 시끄럽게.”

    그 소음은 얕은 잠에 들었던 르니예를 깨웠다.

    “부인, 이거 뭡니까?”

    에드윈은 괜찮냐는 흔한 안부 한마디 없이 르니예의 눈앞으로 화살촉부터 들어 보였다.

    “내 거야.”

    르니예는 인상을 찌푸리며 에드윈의 손에서 화살촉을 빼앗으려고 했다.

    “빼앗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 났는지 묻고 있는 겁니다.”

    “알아서 뭐 하게? 가지고 싶어서 그래?”

    르니예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며 에드윈의 턱을 살살 긁었다.

    “옆에서 간호 잘하면 그거 상으로 줄게.”

    “부인!”

    에드윈은 르니예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손목으로 전해지는 악력에 르니예는 흠칫 놀랐다.

    “어디서 났냐고 묻지 않습니까.”

    “자, 작업실 근처에서.”

    르니예는 진심으로 놀라서, 연기고 뭐고 잊어버릴 뻔했다. 그가 이리 거칠게 구는 건 처음 보았다.

    살아 있는 시체가 되었을 때도 그는 르니예의 손목을 이런 식으로 우악스럽게 붙잡지 않았다.

    “작업실, 작업실 근처라.”

    원하는 대답을 들은 에드윈은 바로 방을 뛰어나갔다. 르니예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며 손목을 매만졌다.

    뭐가 당신을 이렇게 변하게 한 거예요, 에드윈.

    그는 이제 르니예가 좋아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작은 주인님 막 뛰어나가시던데, 그럼 계획대로 된 거죠?”

    “응.”

    르니예는 16살인 척하고 상단에 들어왔지만, 이내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척을 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에니와 둘이 남았을 때, 자신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것과 앞으로의 계획을 에니에게만 알렸다.

    에드윈에게 화살촉에 관한 정보를 주는 것 또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에드윈이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하면 카밀 숙부가 나만 감시할 수는 없을 거야.”

    카밀이 잠시 에드윈에게 한눈을 파는 동안, 르니예는 두 가지 증거를 확보해야 했다.

    영주와 카밀이 한편이라는 증거와 카밀이 무기를 밀매해 수도로 보냈다는 증거.

    “그나저나 카밀 숙부는?”

    “아가씨 요양 보내자고 노래를 부르다가 아가씨 없으니까 또 찾더라고요.”

    요양을 보내? 아주 나를 보내 버리려고요, 숙부?

    그렇게는 안 될걸요.

    * * *

    “뭐? 작은 마님 정신이 아직도 안 돌아왔어?”

    프리야는 절망했다. 대체 언제까지 바딜의 방에 숨어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 있을까.

    길드에 연락을 끊은 지 꽤 되었으니 아마 그쪽에서도 프리야를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여기 더 숨어 있으면서…….”

    “상단을 뒤지기 시작할 거야.”

    바딜이 몰래 음식을 들고 오는 것도 한계가 있다. 분명 수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럼 상단 밖에 안전한 곳이 있나 알아볼게.”

    “어디도 안전하지 않아.”

    프리야는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영지 밖으로 도망칠 수 있으면 모를까 영지 안에는……!

    “거기라면 안전할지도 몰라.”

    “거기?”

    “작은 마님 정부가 사는 곳.”

    길드 쪽에서는 르니예와 프리야가 잠시 협력했다는 걸 모르고 있다. 상식적으로 남편의 정부를 누가 숨겨 주려고 하겠나.

    거기에 숨으면 얼마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 르니예의 기억만 돌아와 준다면,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된다.

    “너도 알고 있었어? 작은 마님께 정부가 있는 거?”

    “그걸 맨 처음 안 사람이 나야. 내가 작은 마님 뒤를 밟다가 알아냈거든.”

    “왜 미행했는데?”

    “소원 때문에.”

    무심코 대답한 프리야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소원? 소원 때문이라니?”

    낭패다. 프리야는 바딜을 쓱 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바딜은 한발 물러섰다. 그는 프리야의 비밀을 캐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프리야가 안전하기만 하면, 그러면 그만이었다.

    프리야는 그런 바딜을 쳐다보았다. 멍청이가 따로 없다.

    이럴 땐 캐물어야지. 내가 내 몫의 음식까지 가져다주는데 그것도 말 못 하느냐고, 따져야지, 이 바보야.

    “말하고 싶어.”

    프리야는 입을 열었다. 이 바보한테는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가 입이 근질거려 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실은…….”

    * * *

    “어떠냐?”

    “음.”

    “그다지?”

    샤피로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벨데메르는 평소에 입던 옷이 아니라 용병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겠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다니면 수상해 보이지 않나?”

    “흉터가 있다고 둘러대면 될 겁니다.”

    벨데메르는 검은 천으로 눈 아래를 가렸다. 한층 더 수상해졌다.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꿀벌에게 독침도 달아 놓으시지 않았습니까.”

    “꿀벌은 달려오는 마차는 막지 못하지.”

    벨데메르는 아예 르니예를 따라다닐 계획이었다.

    정부라고 떠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호위로 들어간 용병인 척하며 붙어 있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르니예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저쪽에서도 이번처럼 다치게 하는 정도로 끝내지 않을 거다.”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하겠지. 부단주라는 작자가 있으니 상단 안도 안전하지 않았다.

    “이렇게 무력한 기분은 처음이군.”

    르니예가 아슬아슬한데,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르니예 없이는 그가 자랑하는 마법조차 쓸 수가 없으니.

    “주인님.”

    “그리 안타까운 목소리로 부르지 마라, 샤피로.”

    벨데메르는 애써 괜찮은 척, 검을 만지작거렸다.

    “마법이 없어도 검이 있지 않나. 뭐라도 르니예를 지킬 수만 있으면 그만이지.”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르니예 님 곁에 붙어 있으면 마법을 쓰실 수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시냐는 뜻이었습니다.”

    샤피로는 제 주인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르니예 님에 관해서는 이성적인 판단을 잘 내리지 못하시니 걱정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내내 붙어 계실 것 아닙니까?”

    “그렇지. 지켜 주려면.”

    그리고 겸사겸사 제 눈만 마주쳐도 빨갛게 익는 그 귀여운 얼굴도 실컷 보고.

    그런 걸 에드윈 그자가 본다고 하니 벌써부터 속이 뒤집히는 벨데메르였다.

    “샤피로, 준비를 서둘러라. 이러는 사이에도 르니예가 위험해질 수 있어.”

    “……예”

    퍽도 그러겠습니다, 주인님.

    * * *

    “에니, 내가 알아보라는 거 알아봤어?”

    “소금 말씀이시죠? 실은 내다 파는 소금양이 애매해요.”

    “애매하다니?”

    “우리 영지에서 나는 소금은 하급이라 보통 박리다매로 팔잖아요. 그런데 지금 사 오는 소금양을 보면 다 팔아도, 인건비나 떨어질까 말까예요.”

    소금이었군. 소금 안에 화살촉을 숨겼던 거야. 화살 전체로 보내지 않고 화살촉 따로, 화살대 따로 보내다니, 숙부가 머리 좀 썼네.

    소금 포대는 무거우니 무게로 들킬 염려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수도 검역에서 한 번도 걸리지 않은 걸 보니, 그쪽에도 봐주는 사람이 있나 봐요.”

    “있겠지. 2왕자 쪽에서도 그 정도는 손을 썼을 거야.”

    자기 사람을 심어 놨다거나 아니면 매수를 했다거나 했겠지. 그래도 우리 상단에서 보낸 물품만 대충 검사하면 티가 났을 건데?

    “그래서, 그래서!”

    르니예는 흥분해서 일어났다. 그래서 그 야밤에 파발을 보내는 것이었다.

    무기를 보내는 날에는 서신을 보내 대충 검사하게 만든다.

    그러나 무기를 보내지 않는 날은 꼼꼼하게 검사해서 의심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젯밤, 파발이 출발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지금 당장 수도로 사람을 보내야 돼.”

    이 정보를 펙에게 알려야 했다.

    “믿을 만한 사람 없을까? 상단 사람이 아니면 더 좋고.”

    에니가 씩 웃었다,

    “딱 적당한 사람을 제가 알죠, 아가씨.”

    “여기인가.”

    에드윈은 르니예가 화살촉을 주웠다는 곳으로 향했다.

    상단이 워낙 규모가 커 작업실은 두세 군데가 더 있었다.

    그중에서 르니예가 갔다는 작업실은 가장 외진 곳. 제일 바쁜 날 빼고는 쓰지 않는 작업실로 알고 있었다.

    “수레바퀴 자국이 있군.”

    하지만 바퀴 자국은 의심할 만한 증거는 아니다. 엊그제가 무역선이 들어오는 날이었으니, 모든 작업실이 동원되겠지.

    “무역선.”

    에드윈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르니예가 가지고 있던 화살촉은 옆 왕국에서 주로 쓰는 물건이었다.

    “외국에서 밀수해 왔던 거로군.”

    영주가 한패일 테니, 영지 안으로 들여오는 건 식은 수프 먹기였겠지.

    에드윈은 작업실 밖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수상한 차림을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멀리서 보아도 그 기골이 장대했다. 허리에 검을 찬 채로 걷는 걸음걸이가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걸음걸이가, 매우 눈에 익었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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