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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83화 (83/120)
  • 83화. 덜 행복하길 바라

    “그럼 에드윈 그자를 돕는 셈이 되겠군.”

    결과적으로 그런 셈이었다. 둘 중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그래도 제 목숨을 노린 사람보다는 바람피운 남편 쪽이 낫지 않겠나.

    “에드윈이 제 뜻대로 기사단으로 되돌아가도 그대는 괜찮아?”

    “음, 글쎄, 잘 모르겠어요.”

    에드윈이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해서 막 불행하길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보다 좀 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있을 때 잘할걸, 하고 후회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미련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에드윈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아도 상관없다?”

    “벨데메르, 지금 질투하는 거 아니죠?”

    “질투라니. 난 질투 같은 건 하지 않아.”

    그래 놓고 미간은 왜 저렇게 찌푸리고 있는 건지.

    그 유려한 입술이 튀어나올 듯 말 듯 했고, 르니예는 못 본 척해 주기로 했다.

    “에드윈을 돕겠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난 에드윈을 돕겠다고 한 적 없는데요.”

    벨데메르가 의아한 듯 물었다.

    “1왕자에게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하지만 그건 에드윈을 돕는 게 아니에요.”

    르니예의 입매가 비스듬히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우리 손자가 후작 작위를 받게 돕는 거지.”

    * * *

    “이거 먹어.”

    바딜은 과일과 비스킷, 따뜻한 차를 가지고 왔다.

    “도련님 드리려고 한 건데, 어차피 안 드신다고 할 거야.”

    다과가 놓인 쟁반을 프리야 앞으로 쓱 밀었다. 주방에서 프리야를 발견한 바딜은 제 방으로 프리야를 데려왔다.

    다른 하인들은 여럿이 한방을 쓰지만, 바딜은 에드윈의 몸종이라는 이유로 독방을 썼다.

    덕분에 프리야를 숨겨 줄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먹어.”

    프리야는 바딜을 쓱 보고 비스킷부터 입에 쑤셔 넣었다. 입에서 살살 녹았다.

    “도망친 줄 알았더니, 왜 안 간 거야?”

    “못 간 거야.”

    비스킷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프리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다가 들킬 뻔했거든.”

    들켰을지도 모른다. 길드 사람인 걸 알아차리자마자 다시 상단으로 도망쳐서, 그건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어?”

    “작은 마님 방.”

    “진짜 작은 마님한테 우리 도련님 팔아넘겼어?”

    사과를 아득 깨물던 프리야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딜을 쳐다보았다.

    “팔아넘기다니. 난 그냥, 작은 주인님이 작은 마님 미행한다는 정보만 알려 준 거야.”

    “왜?”

    “작은 마님한테 받아야 할 게 있거든.”

    잠시 어두워진 분위기에 프리야는 괜히 손으로 비스킷을 두 동강 냈다.

    “근데 넌 그걸 알면서 왜 나를 숨겨 줘? 설마, 신고하려고?”

    “내가 널?”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신고 안 해, 걱정하지 마.”

    “내가 도둑이라는 얘기 들었잖아. 내가 네 물건 훔쳐 가면 어쩌려고?”

    재미있는 질문이었는지 바딜이 낮게 웃었다.

    “넌 이미 내 걸 하나 훔쳐 갔어.”

    “내가? 뭘?”

    “내 마음.”

    순간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동그랗게 떴던 눈이 가늘어지고, 미간에 주름이 생겼으며,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한마디로 프리야는 질색을 했다.

    “아으.”

    프리야가 진저리를 치며 한마디 했다.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느끼하게 그게 뭐냐.”

    “느끼했어?”

    “어.”

    단호한 대답은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머쓱해하는 바딜을 보며 프리야는, 저도 모르게 킥킥 웃기 시작했다.

    진짜 멍청이야, 너는. 그래도 덕분에 웃었다.

    * * *

    “찰리 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어젯밤에도 파발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파발을 보내는 이유가 있을 텐데.”

    야밤의 파발은 규칙적이지 않았다. 정기적인 소식 전달이 아니란 뜻인데, 그렇다면 서신을 전달해야 할 이유가 생겼단 뜻이었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 르니예는 다시 상단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찰리가 의외로 도움이 되네.”

    “잘생겨지고 싶다는 열망으로 아주 열심입니다.”

    열망이 커서 다행이었다.

    “잘생겨 봐야 피곤하기만 한데 말이죠.”

    샤피로는 혀를 쯧쯧 찼다. 저게 무슨 배부른 소리야. 찰리가 들었으면 부러워서 데굴데굴 굴렀겠다.

    “그건 뭐야?”

    “붕대입니다. 적어도 붕대 정도는 새것으로 갈고 가셔야죠.”

    르니예는 거울로 제 얼굴을 쳐다보았다. 붕대가 확실히 꼬질꼬질하긴 했다.

    “약도 바르고 경호원도 데리고 가시죠.”

    “경호원?”

    경호원이라니. 벨데메르가 밤새 보이지 않던데, 새로 사역마라도 만든 건가? 하지만 난 뭘 만들어 달라고 소원을 빈 적이 없는데.

    “르니예 님, 움직이지 마십시오.”

    “어어.”

    “예쁘게 감아 드리겠습니다.”

    “뭘 예쁘게 감아, 대충 감아.”

    상처만 가리면 되는 게 붕대인 것을.

    “붕대를 대충 감으면 르니예 님 하녀께서 분명 비웃을 겁니다.”

    사역마라 그런지 붕대도 똑바로 못 감나 봐요, 하는 에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에니가 워낙 사소한 것도 잘 챙겨서 그래.”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뭐, 그래도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벨데메르를 불러서 르니예를 데리고 나가게 한 방법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체이스를 부르고, 에드윈의 연인을 이용해서 방심하게 했다. 거기에 확실히 르니예의 편인 사용인의 도움을 적절히 이용했다.

    “자, 다 되었습니다.”

    샤피로가 거울을 돌려 르니예의 얼굴이 잘 보이게 해 주었다.

    “깔끔하네. 수고했어, 샤피로.”

    “과찬이십니다.”

    샤피로는 헌 붕대를 챙겨 일어섰다. 르니예는 그가 열어 주는 문으로 방에서 나와 일 층으로 내려갔다.

    “준비가 끝난 건가?”

    “네.”

    벨데메르는 손바닥에 가두고 있던 것을 풀어놓았다. 꿀벌이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르니예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이제부터 그대의 경호원이 될 거야.”

    “꿀벌이요?”

    “무기를 하나 달아 줬지.”

    벨데메르가 처음 꿀벌을 만들 땐 오로지 자신의 귀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르니예가 위험에 처하면 언제든 자신이 달려가기 위해서.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누군가 르니예를 따라다니며 지켜 주어야 하는데, 상단 안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벌침을 달았다. 독도 살짝 묻혔으니 그대도 막 만지지 않는 게 좋아.”

    “도, 독이요?”

    그럼 꿀벌이 아니라 말벌 아냐?

    “든든하네요.”

    뭐……, 꿀벌이든 말벌이든 아무튼 든든하기만 하면 된 거 아닌가.

    “몸조심해, 르니예.”

    “걱정하지 말아요, 벨데메르.”

    르니예는 씩씩하게 상단으로 출발했다. 카밀과 에드윈을 속일 생각을 하니 좀 떨렸다.

    “잊고 싶은 기억이었는데.”

    열여섯 살 때 나대고 다닌 건, 그녀의 흑역사였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서 잊으려 했건만 다시 떠올려야 할 순간이 올 줄이야.

    “상단 앞까지 데려다주지.”

    “괜찮은데…….”

    “가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아직 완전히 나은 것도 아니잖아.”

    라고 말하면서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두 볼을 감싸 쥐었다.

    르니예는 자연스럽게 벨데메르를 마주 보게 되고, 그의 짙은 자안과 시선이 딱 마주치게 되었으며,

    “베, 벨데메르, 정말 너무해요.”

    르니예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터질 듯한 얼굴로 울상을 짓는 것에 벨데메르는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픈 사람 놀리면 재미있어요?”

    르니예는 달아오르는 두 볼에 손부채질하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직, 아직 부끄러워.

    “놀리다니. 난 그냥 그대가 괜찮은지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그게 놀리는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까부터 달아오른 목이며 귀끝은 영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부끄러워서, 상단에서는 어떻게 16살인 척할 거지?”

    “그러게요.”

    르니예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잊고 싶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도 괴로운데, 연기까지 해야 하다니.

    차라리 미친 척을 하는 편이 더 쉽겠다.

    “똑같은지 아닌지 봐줄 테니 한번 해 봐.”

    “여기서요?”

    “그래. 어차피 상단 사람들이며 에드윈 그자 앞에서도 연기를 해야 하지 않나. 어설프게 속이는 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지.”

    일리가 있었다. 그래, 어차피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르니예는 부끄러움을 한번 극복해 보기로 했다.

    “르니예 님, 약 드실 시간이니, 드시고 가시죠.”

    마침 샤피로가 약을 달여 왔다. 16살의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르니예는 일단 짝다리를 짚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열여섯 살 연기.”

    “아, 그렇다면 표정도 좀 더 뚱하게 지으셔야죠. 잊지 마십시오, 르니예 님. 열여섯 살의 르니예 님은 여전히 르니예 님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을.”

    그 말을 들으니 르니예는 더욱 부끄러웠다. 저거 일부러 놀리려고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조언이야?

    볼에 또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르니예는 찬물을 들이켜듯 쟁반 위에 있는 약을 들어 한 번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게 아니지, 르니예. 열여섯의 그대라면 먹여 달라고 했을 것이다.”

    “아.”

    왜 그랬을까, 열여섯의 나는? 두 손이 멀쩡한데 왜 먹여 달라고 한 거지?

    짙은 의문을 느낀 르니예는 쟁반 위 하얀 냅킨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입이라도 닦아 줘.”

    여전히 쑥스러워하는 르니예를 보며 벨데메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그는 쟁반 위 냅킨을 들고 르니예에게로 다가갔다. 꽃물이 든 것 같은 얼굴을 들어 올린 그는, 르니예의 입가에 묻은 약을 혀를 내어 핥았다.

    “……베, 벨데메르.”

    여린 살을 쓸고 지나가는 뭉근한 살덩이의 감촉에 르니예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쓰네.”

    아무렇지 않게 떨어진 벨데메르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사탕을 쏙 넣어주고는 친절히 그 입술을 닫아 주기까지 했다.

    멍하니 벨데메르를 보는 르니예는 손에 힘이 빠졌고 들고 있던 약 그릇을 놓치고 말았다.

    그릇은 바닥에 떨어지며 떼구르르 굴렀고, 조금 남아 있던 약이 여기저기 튀었다. 그걸 닦는 것은,

    “르니예 님의 연기는 전혀 늘지 않으셨으나, 제 일은 이렇게 착실히 느는군요.”

    오로지 샤피로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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