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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82화 (82/120)
  • 82화.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네가 프리야에게 연심을 품은 걸 알아. 그리고 그건 네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이해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에드윈이 바딜의 목숨을 구해 준 날, 바딜은 스스로 에드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에드윈은 바딜에게 줄 봉급이 없다며 그 맹세를 거두라고까지 했다. 봉급도 필요 없으니 그저 목숨값을 치르게 해 달라고 따라다닌 게 바딜이었다.

    그래 놓고 에드윈의 여인을 마음에 품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나.

    “그러나 내 앞에서 티 내는 일은 그만하도록 해. 프리야는 도둑이야. 너에게 보인 모습도 진짜가 아닐 수 있어.”

    에드윈의 말은 걱정이 되어 하는 것이었다. 바딜 역시 그게 저를 책망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느꼈다.

    “프리야가 너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려 한 게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이렇게 변했을까.”

    “……죄송합니다, 도련님.”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변한 건 제가 아니라 도련님 아니시냐고.

    이 말을 하면, 이것도 프리야 탓이라고 하실 겁니까.

    “나가 봐.”

    바딜은 허리를 숙이고서 에드윈 방을 나왔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거웠다. 에드윈은 언제까지 이혼 서류를 책상에 올려 둘 셈일까.

    에드윈은 결투에서 지고도 이혼을 미루고 있다. 르니예가 아프다는 핑계로, 자신이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유로.

    예전의 예드윈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와 에드윈 중 변했다고 한다면, 확실히 에드윈이 변했다.

    “어이, 이봐요. 길 좀 물읍시다.”

    바딜은 자신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뱃사람인 듯 보이는 남자가 건들거리며 바딜을 향해 웃어 보였다.

    “여기 작은 주인님께서 계신 방이 어디요?”

    “내가 작은 주인님 직속 하인입니다. 작은 주인님은 왜 찾으시는 겁니까?”

    “아, 내가 이 집 작은 마님이 지난여름에 한 짓을 좀 알고 있거든.”

    “내 부인이 한 짓을 안다고.”

    “예, 그렇습니다.”

    에드윈은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일단 들어오라 손짓했다.

    “제 소개 먼저 올리겠습니다. 스텐이라고 합니다요.”

    “스텐이라.”

    에드윈은 그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전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부인께서 한 ‘짓’이라면, 선행은 아니겠지.”

    “예,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스텐은 거칠어진 두 손바닥을 문질렀다. 누구 덕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생을 한 탓에 손바닥은 사포처럼 거칠었다.

    “그 짓이 뭔가?”

    “그 전에, 제가 드린 정보가 값이 되면 얼마나 쳐주실 수 있습니까?”

    정보를 돈 받고 팔러 오셨다? 하긴, 그렇겠지.

    기대를 안 했으니 실망도 없었다.

    “정보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다르지.”

    “꽤 값질 겁니다.”

    스텐은 탐욕스레 입술을 혀로 핥았다.

    “이 상단의 주인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상단의 주인이 된다?”

    허풍이군. 스텐이라는 자에게 별 기대도 없었지만, 그나마 있던 기대도 사라지고 있었다.

    이왕 자리를 권했으니 이야기나 들어보자는 셈으로 에드윈은 그에게 대가를 약속했다.

    “내가 상단의 주인이 되면 자네가 원하는 만큼 값을 쳐주지.”

    “좋습니다.”

    스텐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서 에드윈 앞에 들이밀었다.

    “여기에 서명 좀 부탁드립니다.”

    “하.”

    무려 ‘계약서’였다. 에드윈은 기가 찼다.

    “제가 무역선에 타면서 몇 가지 배운 게 있습죠. 이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구두 약속을 받았다가 르니예에게 당한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정보를 먼저 들어 보고, 서명하지. 대략 어떤 정보인지도 모르고 서명부터 할 수는 없네. 내가 이미 아는 정보일 수도 있으니.”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건가?

    스텐은 큼큼 목을 또 가다듬었다. 어차피 방 안에 들을 사람도 없는데 그는 허리를 숙여 에드윈 쪽으로 가까이 왔다.

    “여기 작은 마님께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아, 그 정보였나? 두 집을 왔다 갔다 하시더니 결국 또 꼬리를 밟히셨군요, 부인.

    이미 아주 잘 아는 정보에 에드윈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 아셨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렇네.”

    “하지만 이건 모르셨을걸요?”

    조급해진 스텐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 남자랑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그걸 빌미로 르니예에게 협박을 했다가 무역선에 노예로 잡혀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 악독한 여자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이쪽으로 오는 건데.

    그 무역선에서 도망쳐 복수하러 오기까지의 그 고난을 떠올리면 스텐은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왕국법에 중혼은,”

    “불법이지.”

    결혼식까지 올렸단 말입니까, 부인.

    에드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몰래 결혼식까지 올릴 정도로 그 남자가 좋았나?

    “증거는?”

    “예?”

    “증거는 없나?”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몰래 한 결혼식이니 증인도 없었을 거고, 하객도 안 불렀겠지.

    증인이라고 해 봐야 에니나 그 재수 없는 벨데메르 하인 놈뿐인데 그들이 증언해 줄 리는 없다.

    그리고 스텐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어, 증인으로 쓰기 어려웠다.

    “증거, 아, 있습니다, 증거.”

    스텐은 신관을 떠올렸다. 주례를 서 주었던 신관 말이다. 듣기로 그 신관은 돈을 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례를 서 준다고 했다.

    “주례를 서 준 신관이 있습니다.”

    “그 신관의 이름은? 사는 곳은?”

    “그, 그것이.”

    그런 자세한 정보까지는 몰랐다. 에드윈은 한숨을 짧게 쉬며 소파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스텐은 제 계획이 어그러진 것을 깨닫곤 전전긍긍했다.

    “신관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오면,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럼 생각해 보지.”

    스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역선에서 도망쳐, 다른 배에 숨어들어 펠레포네 영지로 돌아오기까지 겪은 고초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르니예에게 복수하고, 그때 못 받은 돈도 확실히 받아낼 것이었다.

    “좋습니다요. 제가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스텐은 호기롭게 나갔다. 에드윈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만약에 벨데메르와 식을 올렸다면 중혼으로 소송을 걸 수 있었다. 중혼은 불법이니, 징역을 살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그걸 가지고 이혼을 무르자고 할 수도 있을…….

    “완전히, 무르려는 건 아니니까.”

    증거를 잡고, 반란을 제압할 때까지만이다. 왕국이 안정되고 나면 원하는 대로 이혼을 해 줄 테니까, 이건 르니예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대의를 위해서.”

    대의를 위해 잠시 명예를 내려놓는 것뿐이다. 더 큰 뜻을 위해서.

    * * *

    “르니예는 어디 갔지, 에니?”

    “부단주 말씀대로 여기서는 회복이 힘들 것 같아서 요양 가셨어요.”

    “요양? 너도 없이?”

    에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카밀을 쳐다보았다.

    “저는 작은 주인님이 상단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명령하셔서 못 나가요.”

    “라포어 경이? 어째서?”

    “저야 모르죠.”

    에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시키셔서 시키는 대로 할 뿐.”

    카밀은 르니예를 멀리 보내려고 하고, 에드윈은 르니예를 잡아두려고 한다.

    하나는 르니예가 없어야 상단의 주인이 되고, 하나는 르니예가 있어야 상단의 주인이 되니, 그들의 목적은 상단이 분명했다.

    그걸로 무얼 할 것인지가 다르겠지.

    “그런데 부단주께서는 어디 가실 건가 봐요?”

    에니는 코트까지 차려입은 카밀을 아래위로 쓱 보고 물었다.

    “오늘 무역선이 들어오는 날 아니냐.”

    “아, 그러네요.”

    무역선이 들어오는 날은 콜론이나 카밀이 직접 나가서 물건을 확인했다. 물건을 확인하고 대금을 지급하고 창고로 옮기고, 바쁜 날이었다.

    모두가 정신없는 날이기도 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부단주님.”

    “그래. 르니예 돌아오면 바로 알려 주고. 정신도 온전치 못한 애가 너도 없이 돌아다닌다니 걱정되는구나.”

    걱정은 무슨. 에니는 애써 알겠다고 대답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작은 마님은 괜찮으신가? 정신은 돌아오셨나? 나가볼 수가 있어야지.”

    에니는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르니예 침대 시트를 걷어서,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히고 잠깐 정적이 흐른 뒤, 아무도 없는 르니예의 방에서 옷장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아직도 정신이 안 돌아왔어?”

    프리야는 옷장 밖으로 나오며 험한 말을 짓씹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프리야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에드윈이 신고한다는 말에 프리야는 그길로 짐을 쌌다.

    어디 먼 영지로 떠날 셈이었다. 그러나 짐을 싸서 나오자마자 도둑 길드에서 나온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프리야가 도망칠 곳은 상단뿐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비어 있는 르니예 방으로 몸을 숨겼다.

    “이러다가 잡히면.”

    프리야는 에드윈이 던져 준 르니예의 각서를 만지작거렸다. 잡히고 싶지 않았다. 잡히지 않을 것이다.

    르니예에게 무릎 꿇고 빌든, 떼를 쓰든 반드시 소원을 이루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르니예의 정신이 돌아와야 할 것 아닌가.

    “아, 배고파.”

    꼬르륵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뱃가죽이 등에 붙기 직전이었다. 프리야는 밤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어둠을 틈타 프리야는 주방으로 향했다. 굳은 빵 한 덩이라도 떨어져 있기를. 프리야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주방 여기저기를 뒤졌다.

    “아니, 어떻게 아무것도 없어?”

    안 익은 감자 먹어도 되나? 야채실을 뒤지던 프리야는 흙이 묻은 당근을 하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프리야?”

    “……!”

    오이를 옷에 쓱쓱 닦아서 입에 집어넣던 프리야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입에 쑤셔 넣은 오이가 아니었다면 분명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바딜?”

    * * *

    “내일 아침에 상단으로 돌아갈까 해요.”

    르니예는 상단을, 그리고 에니를 계속 저렇게 둘 수는 없었다.

    “몸도 성치 않은데 괜찮겠나?”

    “괜찮지 않아도 가야죠.”

    가야 한다. 도망칠 수가 없다. 이대로 반란에 연루되면 반란이 성공하든 말든 아버지는 다칠 것이다.

    반란이 실패하면 반란을 도운 죄로 잡혀갈 테고, 반란이 성공하면 카밀이 상단을 장악하고 아버지를 죽일 테지.

    “증거를 찾아서 1왕자에게 알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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