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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80화 (80/120)
  • 80화. 나를 풀어주지 않을 건가?

    불길한 예감이 단전에서부터 피어올랐다.

    “같다고? 그럼 확실한 건 아닐 수도 있겠군.”

    “그래서 조사원을 하나 심어뒀나 봐요.”

    조사원을 심어 둔 사람은 셰론 후작이라고 했다.

    셰론 후작이라.

    “셰론 후작이면 에드윈이 수도에 있을 때, 기사 단장이던 분이라고 했는데.”

    설마 그 조사원이 에드윈인가? 그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그간 에드윈의 수상한 행동이 한 번에 이해되었다.

    “수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일이 이거였어?”

    에드윈과 식을 올리고 난 다음 날이었던가. 에드윈에게 편지 한 장이 왔다. 에드윈은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누가 보낸 편지예요?’

    그땐 그들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기 전이었으므로, 에드윈은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제가 기사단에 있을 때 단장으로 모시던 분입니다.’

    ‘에드윈을 많이 아꼈나 봐요. 편지도 보내 주시고.’

    ‘많이 뵙지도 못했는데, 편지를 해 주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랬던 기억이 있었다. 에드윈이 틈만 나면 그 편지를 보곤 해서, 기억이 유난히 남아 있었다.

    “에드윈이 왜 나랑 이혼을 안 하는지 이제야 알겠네요. 우리 상단에서 무기를 반입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장부를 보자고 하고, 금고 열쇠를 군말 없이 받았던 거지.

    “그대의 상단에서 무기도 밀반입하나?”

    “안 하죠.”

    아버지가 반란에 가담할 리가 없었다. 절대 정치권이랑 엮이면 안 된다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펠레포네 영지까지 와 상단을 연 사람인데.

    “아, 설마.”

    머릿속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영주가 갑자기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 이유, 가택 연금이라면서 어디 별장에 처박아 놓은 이유.

    그리고 상단 안에서 화살촉이 발견된 이유.

    “카밀 숙부.”

    서신을 든 르니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 아니기를 빌었는데.

    “하나는 반란에 필요한 무기를 대주고, 하나는 그걸 조사하고.”

    우리 상단에서 별 지랄을 다 하는구나. 르니예는 이를 깍 깨물었다.

    “감히.”

    아버지만 감옥에 보내면 될 줄 알았던 거야?

    “나를 뭘로 보고, 이것들이.”

    아무리 제가 상단에 관심이 없다지만, 어떻게 저만 쏙 빼놓고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적어도 그대를 물로 보지는 않았어.”

    “네?”

    “그대가 신경 쓰지 않았다면 그대를 죽이려고 했겠나.”

    어리둥절한 르니예를 위해 샤피로가 나섰다.

    “르니예 님을 친 마차 말입니다.”

    “그게 그냥 사고가 아니었구나.”

    “예. 그날 마부가 술에 잔뜩 취한 채 마차를 몰았다더군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마차 바퀴 나사가 느슨해져 있었답니다.”

    잡혀간 마부가 진술한 내용과 마차를 조사해 나온 내용이었다.

    “고의로 르니예 님을 친 게 아니니 살인 미수 판결을 받지 않을 겁니다.”

    음주 운전 정도로 처벌이 논의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부는 르니예 님을 친 다음에 술을 마셨습니다.”

    “마차 바퀴의 나사도 그대가 사고를 당한 이후에 풀렸다.”

    “나사를 푼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뒀습니다.”

    샤피로가 르니예와 벨데메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르니예 님 정신도 돌아왔으니, 이제 가서 잡아 올까요?”

    * * *

    ‘실은, 아버지 빚 때문이 아니라 뭘 좀 훔치러 들어왔어요.’

    에드윈은 긴 한숨을 쉬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분노가 에드윈 안에서 들끓었다.

    그러니까 저를 속였다는 거지, 감쪽같이. 그것도 모르고 에드윈은 프리야에게 맹세까지 했다.

    ‘내 마음은 너의 것이다. 그건 죽어서도 변하지 않아.’

    프리야의 미소를 지켜 주고 싶었다. 집안의 가장으로,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노예로 들어온 그 마음을 아꼈다.

    “그런데 다 거짓이었다? 하.”

    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었다. 프리야는 그저 도둑질하러 들어온 것이었다. 금고 열쇠를 훔치기 위해 저에게 접근했다.

    그래 놓고 상단을 나가란 말에 뻔뻔하게 대응했다.

    ‘죽어서도 저를 지켜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그 약속 거짓이었어요?’

    도둑이라 그런가, 아주 뻔뻔하군. 프리야를 선택하면서 에드윈은 많은 것을 잃었다.

    르니예의 마음을 잃었고, 그 때문에 수사에도 큰 차질이 있었다.

    결국 일이 성공해서 기사단에 다시 합류한다고 해도, 르니예와는 이혼을 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따라오는 구설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프리야와 함께 수도로 가려고 다짐했다.

    프리야를 위해서라면 명예가 약간 실추되는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프리야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니! 그 거짓을 위해 포기한 것을 생각하면 에드윈은 열불이 끓었다.

    “도련님, 저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바딜이 조심스레 들어왔다. 바딜은 알았을까, 프리야의 정체를?

    “바딜.”

    “예, 도련님.”

    “프리야가 도둑 길드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나?”

    에드윈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제발 솔직하게 말해 다오.”

    너만은, 바딜 적어도 너만은 내게 충직하기를.

    에드윈은 간절하기까지 했다.

    “도둑 길드요? 프리야가 도둑이란 말씀이십니까?”

    바딜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도련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제 입으로 말했어.”

    “프리야가요?”

    바딜은 놀라서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그는 몰랐던 게 분명하다.

    적어도 바딜은 저를 속이지 않았다. 바딜이 알고도 묵인했다면 에드윈은 그 배신감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대로 상단을 나가면 길드장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프리야의 고백을 듣고 밤을 새워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쫓아내고 싶었으나, 살려 달라는 애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을 두고 미련이라 하는가.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다.”

    프리야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는 것이다.

    “프리야를 자수시킬까 한다.”

    “예?”

    “감옥이라면 안전할 것이다. 죗값을 치르고 나오면 새 인생을 살 수도 있지.”

    그게 옳은 일이었다. 도둑질한 것을 알고도 눈감아 줄 순 없지 않나.

    신고를 할 수도 있지만, 에드윈은 그간 정을 생각해서 자수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 프리야가, 감옥을 견디겠습니까?”

    “바딜, 죄를 지었으면 값을 치러야지. 그 값에 나를 속인 죗값은 들어가 있지도 않아.”

    에드윈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결연한지, 창밖에서 엿듣는 프리야도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릴 정도였다.

    “뭐, 자수를 시켜?”

    바딜이 에드윈에게 불려가는데,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몰래 따라왔는데, 따라온 보람이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감옥에 갈 뻔했다.

    “내가 순순히 감옥에 갈 줄 알아?”

    프리야는 이를 갈았다. 자수를 할 거였으면, 진작 했다.

    자수를 시키다니, 어림도 없지.

    “저기, 벨데메르?”

    “응.”

    “바닥은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

    샤피로가 그 남자를 데리러 간다고 나간 후, 벨데메르는 내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뭐라도 있나 해서 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샤피로가 워낙 깨끗하게 청소해 놓아서, 먼지 한 톨 굴러다니지 않았다.

    “거기 뭐 있어요?”

    게다가 심지어 벨데메르가 쳐다보고 있는 곳은 자기 발밑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르니예 발을 보고 있었다.

    “유령?”

    “뭐, 뭐요?”

    르니예는 경기를 일으키면서 후다닥 발을 뗐다. 유령, 유령이라고?

    “진짜 유령이에요? 벨데메르도 유령 볼 수 있어요?”

    “아니.”

    “그럼 어떻게 알았는데?”

    “농담이었는데.”

    그는 바닥이 아니라 발을 쳐다보고 있었다. 르니예의 발. 작고 여려서 어떻게 걸어 다니는지 모르겠는 저 발을.

    르니예가 다리를 주무르라고 했을 때부터 자꾸만 르니예의 발이 신경 쓰였다.

    앙증맞아. 너무 앙증맞다고. 사람 발이 저럴 필요가 없잖아?

    “무슨 그런 농담을 해요!”

    농담이래도 찝찝했다. 르니예는 일어서서 슬금슬금 벨데메르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유령 무서워하는 거 알면서.”

    “그런 그대는 내 마음이 아직 안 풀린 거 알고 있나?”

    풀렸을 리가 없었다. 왜? 르니예가 풀어준 적이 없으니까.

    저는 남의 발이나 보면서 귀엽다고 감탄하는 변태처럼 만들어 놓고, 르니예는 너무 멀쩡했다.

    이제는 제 얼굴이 잘생겨 보이지도 않는 건지, 예전처럼 감탄하는 눈빛으로 보지도 않았다.

    “에이, 내가 벨데메르 기억 못 해서 그래요?”

    “난 기억하는데.”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눈과 똑바로 마주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기억을 잃어도 나를 위해서 소원을 빌 수 있어요, 벨데메르? 하고 묻던 그대의 얼굴을 난 똑똑히 기억하는데.”

    “그, 그건 말이죠.”

    변명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지 입술만 달싹거리던 르니예는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벨데메르도 기억 잃어 봐요. 나 같은 건 쳐다도 안 볼 거면서.”

    “난 안 그럴걸.”

    “그건 기억 잃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죠.”

    르니예는 좀 뻔뻔하게 나왔다.

    “그래서 나 풀어준다고, 만다고?”

    “어떻게 해야 풀리는데요?”

    선심을 쓰듯 르니예가 이야기해 보라고 손짓했다. 벨데메르는 기가 차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대 다리를 또 주무르게 해 주면.”

    “네?”

    “다리.”

    벨데메르가 정확히 르니예의 다리를 가리켰다.

    “내 다리를…… 주무르고 싶다고요?”

    “응.”

    혼란스러웠다. 벨데메르도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벨데메르가 이렇게 된 데에 내 책임이 있는 걸까?

    내가 다리를 주무르라고 해서 충격받아 이렇게 된 건가?

    르니예는 갑자기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벨데메르, 방금 그거 되게 변태 같았어요. 안 그랬잖아요, 왜 이러는 거예요.”

    “글쎄, 그대에게 옮았나?”

    옮다니, 그게 병도 아니고.

    “나 변태 아니에요.”

    “그래? 그럼 내 조각상이 부서졌을 때.”

    “에헤, 그 얘기 안 하기로 했으면서.”

    르니예는 벨데메르가 말을 못 하도록 막았다. 변태 이야기도 괜히 꺼냈다. 이길 수가 없네, 이길 수가 없어.

    “아이, 샤피로, 얘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르니예는 괜히 샤피로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돌렸다.

    “말 돌리는 재주도 느는군. 이번엔 넘어가 주지.”

    이런 걸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왜 넘어가 주는 거예요?”

    왜 넘어가 주는지 궁금했다. 이유를 알면 다음번에 또 써먹을 수 있을 테니.

    “왜인지 궁금해?”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그 시꺼먼 머릿속을 읽었다.

    “하지만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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