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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79화 (79/120)

79화. 창피해서 죽을 수도 있을까

“프리야.”

“네, 작은 주인님.”

프리야는 에드윈의 눈치를 쓱 살폈다. 르니예를 놓치긴 했지만, 나도 기절해 있었으니 의심을 하진 않겠지?

“이틀 안으로 상단을 나가라.”

“……네?”

“이틀이면 짐을 쌀 시간은 충분하겠지. 집은 내가 알아봐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치 소풍을 하자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에드윈은 프리야를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

“저기, 작은 주인님, 저는…….”

“아, 이게 있어야 나가는 건가?”

에드윈은 프리야가 가지고 있던 르니예의 각서를 내밀었다. 각서를 본 프리야의 눈동자가 적나라하게 흔들렸다.

언제부터였을까, 프리야와 르니예가 손을 잡은 것이.

“부인께 받기로 한 게 뭐지?”

“그, 그게, 뭐냐면요.”

정신 똑바로 차리자, 프리야. 지금 쫓겨나면 다 망하는 거다.

“그, 나중에, 작은 주인님과 이혼을 하고 난 뒤에 위자료를 넉넉히 챙겨 달라고, 그러니까, 어차피 이혼하실 거니까…….”

“그만해라, 프리야. 끝까지 날 기만하는구나.”

여기서 확실한 건 하나였다. 프리야가 저를 배신했다는 것.

에드윈은 각서를 프리야의 발치로 던졌다.

“오늘 안에 짐을 싸서 나가라. 내가 널 쫓아내게 만들지 마.”

그것이 프리야에게 해 주는 마지막 배려였다.

“작은 주인님.”

프리야는 에드윈의 팔뚝을 붙들었다.

“저 나가면, 나가면 안 돼요! 제발요……. 작은 주인님이 자꾸 나가라고 하시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단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서 나를 배신했다?”

에드윈은 프리야의 턱을 쥐어 저를 보게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상단에 있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지?”

“그게 실은 제가 양아버지가 하나 있는데, 상단 밖으로 나가면 또 저를 찾아올 거예요. 찾아와서,”

“찾아오지 못할 곳으로 거처를 마련해 주마.”

겨우 양아버지 때문에? 그 도박 빚을 졌다는 아버지가 양아버지였나?

양아버지인 줄은 몰랐으나 도박이나 하고 다니는 놈 정도는 프리야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보내 줄 수 있었다.

그것이 프리야에게 해 주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런 곳은 없어요. 어디든 찾아올 거예요.”

“있어, 있으니.”

“없다니까요!”

프리야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이상하군. 양아버지가 뭐 하는 사람이기에 이리 두려워하지? 양아버지가 대체 누구기에.”

“아, 아니에요.”

프리야는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에드윈은 그런 프리야의 앞을 가로막았다.

“양아버지가 누군데.”

수상했다. 프리야는 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을 저에게 숨기고 있었던 걸까.

“말을 해, 프리야.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돕겠다.”

돕는다는 말을, 믿어도 될까? 프리야는 바짝 마른 입술을 연신 깨물었다.

에드윈이 화가 나긴 했지만 프리야의 사정을 들으면 내치지는 않을지 몰랐다. 그간의 정도 있는데, 설마 죽으라고 등 떠밀기야 하겠어?

“……도둑 길드 수장이에요, 제 양아버지.”

* * *

“으.”

르니예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깨어났다.

“에니, 나 물.”

“일어났나? 물?”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에니는 절대 아니고.

르니예는 힘겹게 눈을 떴다.

“벨데메르?”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등 뒤에 팔을 받쳐 주며 일어나 앉는 것을 도왔다.

“나 어제 여기 와서 잤어요?”

“내가 직접 데리고 왔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아니, 잠깐, 르니예?”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두 볼을 붙들고서 르니예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억이 돌아온 건가?”

밤갈색 눈동자에 날 것의 그 느낌이 빠져 있었다.

말투도 점잖아지고, 제 이름도 다정하게 부르고.

그 다정한 목소리에 벨데메르는 울컥할 뻔했다.

“기억이요? 내가 기억을 잃었어요?”

“정말 기억나지 않아? 어제 내가 그대를 직접 상단에서 데려왔는데.”

“어제?”

르니예는 어제를 떠올려 보았다. 어제라.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사고를 당한 건 기억이 나는데.”

달려오는 마차, 에니를 밀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내 방에서 깨어났던 것 같은데.

에드윈이 병문안을 왔었고, 팔려 왔느니 뭐니 그런 말을 내가…… 내가 한 건가?

“……!”

르니예는 벌어지는 입을 두 손을 틀어막았다. 안개가 낀 듯 흐릿하던 기억이 어느새 투명한 물처럼 마구 밀려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벨데메르에게 다리를 주무르라고 막 시키고, 뽀뽀하자고 들이대고…….

“기억이 다 났나 보군.”

벨데메르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며 다정히 말했다.

“괜찮아, 아파서 그런 거였잖아.”

르니예는 새빨개진 얼굴을 이불 속에 숨겼다.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벨데메르, 내 이틀 동안의 기억을 지워 줘요. 제발, 제발요.”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데? 그대가 내게 한 짓들 전부 다.”

“잊어 주면, 안 될까요?”

르니예가 애처롭게 벨데메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벨데메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겠는데.”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불을 끌어 내렸다.

“어제 그대가 못다 한 걸 이어서 할 예정이라서.”

* * *

“부단주, 말씀하신 대로 작은 마님 유산을 찾아봤습니다.”

“찾아만 봤어? 옮겨 놓으라니까.”

“그게.”

필립은 머리를 긁적였다.

“없어요.”

“뭐가?”

“유산 말입니다.”

없다니? 유산이 없을 리가 있나. 콜론이 따로 르니예 몫을 챙기는 것을 카밀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제대로 찾아본 거 맞아?”

“예, 몇 번이나 찾아봤습니다.”

“하나도 없어?”

“예.”

유산이 없다니. 누가 훔쳐 간 게 아니라면 르니예가 썼다는 건데.

“르니예가 대체 그 큰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쓸 일이 뭐가 있지?”

카밀은 목을 벅벅 긁었다. 르니예가 영주와 손을 잡았나?

안 그래도 영주가 르니예를 포섭하려던 적이 있긴 했다. 지난 추수절이었다.

‘이번 추수절에 라포어 부인을 부를까 하네.’

‘르니예는 왜 부르시려는 겁니까?’

‘혹시 알아, 제 아비랑은 또 뜻이 다를지.’

영주는 추수절 초대장을 카밀에게 건넸다. 카밀은 그것을 르니예가 아닌 에드윈에게 전해 주었다.

르니예와 영주가 손을 잡게 놔둘 수 없었다. 상단을 차지하기 위해 콜론을 배신했다. 그런데 영주와 르니예가 손을 잡으면 상단은 자연스레 르니예의 것이 되어 버린다.

콜론에게 상단을 빼앗아서, 르니예에게 넘겨주면 카밀은 남는 게 없었다.

‘영주께서 추수절 무도회를 한다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초대장을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영주는 르니예에게만 전달하라고 했다. 하지만 카밀은 자세한 내막 같은 건 모르는 척 에드윈에게 초대장을 전달했다.

에드윈은 반드시 르니예를 따라갈 거라 예상했고,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장부를 보여 달라, 창고 열쇠를 달라, 귀찮게 해서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또 가끔 유용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영주에게 가져다 바쳤을 리가 없는데.”

그랬다면 영주가 르니예를 제거하려고 했을 리 없다.

“유산을 어디에 썼을까? 그 많은 것을.”

“이상한 소리도 돌던데요.”

“이상한 소리?”

필립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말했다.

“작은 마님께서 상단주 하실 때가 되었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상단주 자리를 언제까지 비워 놓느냐며…….”

필립은 카밀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나이도 차셨으니 마땅히 상단주가 되셔야 한다고요.”

“허.”

카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부단주인 제가 있는데 저를 뛰어넘고 르니예가 상단주?

콜론이야 그리 생각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무슨 자격으로? 자기들이 르니예 부모라도 되는가?

“작은 마님이 유산으로 사용인들을 매수하는 거 아닐까요?”

“하인 놈들을 뭐 하러? 걔들이 그런 소리 떠들고 다닌다고 해서 상단주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건 단지 카밀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분위기에 휩쓸리고 그러면 또 모르는,”

“필립.”

서늘한 목소리에 필립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 생각해야 돼.”

하인 놈들이 르니예를 상단주로 만들려고 해도, 르니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 르니예를 붙잡고 유산에 대해 물을 수도 없으니, 카밀도 골치가 아프게 되었다.

“금고에서 꺼내면 장부 처리하기가 곤란한데.”

에드윈만 아니면 몰래 꺼내서 보내면 그만이었다.

에드윈이 언제 장부를 또 보자고 할지 모르니 이중으로 작성해야 할 텐데, 그게 꽤 성가신 일이었다.

“콜론이 없으니 에드윈 눈치를 봐야 하고, 이거 원, 얼른 상단주가 되든 해야겠구먼.”

“고마워, 샤피로.”

르니예는 샤피로에게 다시 물컵을 건네며 말했다.

“그럼 저는 해고당하지 않는 겁니까?”

‘너 해고’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들은 샤피로는 그 앙금을 홀로 간직하지 않았다. 그는 틈틈이 르니예에게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진짜 해고하고 싶으니까 그만해라.”

르니예가 이를 악물었고 샤피로는 어깨를 으쓱하며 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그 방 안에는 앙금이 남은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기억이 다 돌아온 모양이군. 그럼 그것도 기억하나? 나한테 정부를 여럿 거느리게 해 달라고 한 것도?”

심지어 에드윈과 저를 반반 섞은 뒤 샤피로를 얹어서.

“그건.”

르니예는 입 안이 자꾸 말랐다. 환자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기억이 돌아왔어도 머리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는데.

“내가 철이 없었죠.”

르니예는 한숨 쉬듯 말했다.

“잘생긴 남자가 좋아서 정부를 여럿 두고 싶어 했다는 게.”

겨우 둘만으로도 이렇게 힘들 것을 모르고. 르니예는 과거의 자신을 향해 혀를 찼다.

철이 없었지, 아무것도 모를 때였어.

“그대가 예전에 물었지. 기억을 다 잃어도 그대를 위해서 소원을 빌 수 있을 것 같냐고.”

벨데메르는 미소 지으며 이어 말했다.

“적어도 그대는 아니더군.”

정정한다. 벨데메르는 미소 지은 게 아니었다. 입매가 올라가긴 했지만, 아무튼 미소는 아니었다.

그 미소 아닌 미소에 르니예는 오싹했다.

“하하, 벨데메르, 그거는, 음.”

과거의 나, 그딴 질문을 왜 했지?

“아, 머리야.”

르니예는 찢어진 머리가 아픈 척 벨데메르의 시선을 외면했다. 더 쳐다보고 있다간 어디가 뚫려도 뚫리겠어.

“주인님.”

그때 일 층으로 내려갔던 샤피로가 다시 올라왔다.

“펙 님이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펙이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 아주 적당한 타이밍에.

나보다 나이 많은 내 손자가 나를 살리네. 르니예는 얼른 달라고 손을 뻗었다.

“뭐라고 썼나 볼까요? 너무 궁금하네.”

과장되게 궁금해하면서 르니예는 봉투를 뜯었다. 편지지가 두 장이었다.

“샤피로, 이건 너한테 온 건데? 세사르가 보냈나 봐.”

패러히트 공작저에 잘 도착하기는 했나 보군. 르니예는 나머지 편지를 꺼냈다.

“친애하는 할아버님께.”

르니예가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는 몸 건강히 잘 도착했습니다.”

“그런 건 궁금하지 않으니 본론으로 가지.”

쓸데없이 기나긴 안부 글을 지나자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2왕자가 반란을 꾸미고 있습니다. 1왕자 측에서도 정황을 잡고 반격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편지를 쭉 읽어 내려가던 르니예의 입술이 중간에 딱 굳었다.

“왜 그러지?”

“……우리 영지에서 무기 반입을 하는 것 같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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