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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77화 (77/120)

77화. 개방적인 어른

“이 몸을 해서 어딜 가려는 거지?”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벨데메르의 품에 안긴 르니예는 그의 날렵한 턱 선을 보며 짧은 감탄을 삼켰다.

“얘가 내 이거냐?”

르니예는 프리야에게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내가 그대의 새끼손가락이냐고 묻는 건가?”

“아뇨, 그, 작은 마님의 정부이시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벨데메르는 의문이 서린 눈으로 제 품에 안긴 르니예를 내려다보았다.

“그걸 왜 묻는 거지?”

“아.”

프리야는 탄식을 내뱉었다. 저 사람,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

“……작은 마님께서 16살 이후의 기억을 잃으셨어요.”

프리야는 방문을 자꾸 흘긋거리며 대답했다.

“문밖에 누가 있나 보군.”

벨데메르는 대뜸 자기 턱을 쓰다듬는 르니예의 손을 잡아서 목 뒤로 돌리며 프리야에게 물었다.

“내 남편이 나를 감시하고 있어.”

의외로 대답은 르니예에게서 나왔다.

“내가 너 보러 가는 게 싫은가 봐.”

르니예는 한시도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벨데메르의 뒤통수를 쓰다듬고 그의 머리칼을 쓱쓱 빗어 내리며 다리까지 달랑달랑 흔들었다.

“프리야, 아직 멀었나?”

에드윈이 문을 똑똑 두드리며 물었고, 프리야는 곤란해 입술을 깨물었다.

“데려가실 거면 저 기절이라도 시켜 주시면 안 돼요?”

이대로 르니예가 나가 버리면 의심받는 쪽은 프리야였다.

“얼른요.”

자꾸 자기를 만지는 르니예와 문을 두드리는 에드윈과 재촉하는 프리야 때문에 벨데메르는 정신이 사나웠다.

“원하는 대로 해 줘. 할 수 있으면 남편도 기절시켜 버렸으면 좋겠다. 시끄러워.”

“그대가 원한다면.”

마침 르니예가 원했으므로, 벨데메르는 마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아, 잠깐만요, 저 이거…….”

프리야는 르니예가 써 준 각서를 품 안에 숨기려다가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문을 연신 두드리던 소리도 딱 멈춘 것을 보니 에드윈도 쓰러진 듯했다.

“그럼 일단 갈까.”

“응.”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르니예는 꽤 신나 보였다.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안고서 빠르게 상단 밖으로 빠져나갔다.

벨데메르는 로브를 앞으로 최대한 여며 르니예의 얼굴을 가리고 광장을 가로질렀다. 다행히 르니예는 얌전했다.

“주인님, 상단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품에는 르니예 님?”

“그래. 바로 눕힐 거니까 침실을 준비하도록.”

벨데메르의 로브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르니예는, 그의 로브를 젖히고 고개를 쏙 내밀며 말했다.

“아니, 목욕 먼저.”

“작은 주인님, 작은 주인님!”

에드윈은 저를 흔드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어디 안 좋으십니까?”

“……무슨 일이지?”

“여기 쓰러져 계셨습니다.”

“내가?”

에드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르니예의 방문 앞이었다.

프리야에게 다 되었느냐고 물어보고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프리야!”

에드윈은 벌떡 일어나 문을 잡고 흔들었다. 잠긴 문이 열리지 않자, 에드윈은 건물을 나가 르니예 방의 창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하.”

창문은 열려 있었다. 창문 너머 보이는 침대는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보나 마나 뻔했다.

벨데메르, 그자겠지.

“프리야? 프리야!”

허탈해 실소를 터트리던 에드윈은 침대 밑에 쓰러져 있는 프리야를 발견하고, 창문을 넘어 들어갔다.

나와 프리야를 기절시키고 르니예를 데려간 건가? 마법사? 아니면 무슨 약물이라도 쓴 건가?

에드윈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프리야를 안아 들었다.

“이건 뭐지?”

그는 프리야의 옷 안에 반쯤 들어가 있는 종이를 발견하고 꺼냈다.

“각서?”

그것은 각서이자 계약서였다. 프리야가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도와주면, 프리야가 원하는 것을 알려 주겠다는 각서.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프리야는 미끼가 아니라, 르니예의 첩자였다.

“르니예 님이 기억을 잃으신 건 어떻게 알고 데리러 가셨습니까?”

“그건, 몰랐는데.”

벨데메르는 몰래 가서 르니예 얼굴이나 보고 오려고 했다. 괜찮은지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넌 그걸 어떻게 알았지, 샤피로?”

“체이스 님이 왔다 가셨습니다. 일개 하녀님께서 보내셨더군요.”

에니는 일단 벨데메르에게 르니예의 상태와 상황을 알리고자 체이스를 보냈다.

벨데메르와 엇갈린 체이스는 때마침 집으로 돌아오던 샤피로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돌아갔다.

“많이 사람이 되셨다고 하시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에니는 말을 돌려 전했다. 르니예가 많이 사람이 되었다고. 그건 곧 이전에는 사람답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르니예는 에드윈을 만나고 나서야 변했다. 르니예는 저를 구해 준 에드윈에게 반했고,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막연히 꿈꿨다.

그러면서 변했다. 하지만 지금 르니예는 변하기 전이었고, 질풍노도의 절정을 지나고 있으며, 목욕을 굉장히 하고 싶어 했다.

“제가 잘 달래면서 씻기겠습니다.”

“그러다가 몸부림이라도 치면 또 다칠 수도 있다.”

그리고 르니예는 목욕 시중을 벨데메르가 들길 원했다.

아무래도 정부의 개념을 좀 이상하게 알고 있는 듯한데, 아픈 사람이니 그 비위를 맞춰 주기로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주인님께서 먼저 다치시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샤피로. 욕실 구조는 확실히 외웠으니까.”

그러면서 벨데메르는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 기억이 돌아올 르니예가 민망해지지 않도록 해 주고 싶었다.

“……르니예 님 먼저 욕실로 모시겠습니다.”

샤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역력히 내며 르니예를 욕실로 데려갔다.

“르니예 님, 조심하세요.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덧날지도 모릅니다.”

“응.”

의외로 얌전한데. 어쩌면 목욕이 순탄히 끝날지도 모르겠다고 샤피로는 생각했다.

“그런데 넌 왜 눈을 안 가려?”

하지만 그 생각은 채 오 분도 가지 못했는데, 눈을 가리고 들어온 벨데메르를 아래위로 끈적하게 훑는 르니예 때문이었다.

그 눈빛이 16살이 아니라 46살 아저씨 같아서 샤피로는 몇 번이나 흠칫했다.

“전 평소에도 르니예 님의 착복 시중을 들었습니다.”

“와.”

르니예는 감탄했다.

“나 그런 개방적인 어른이 된 거야?”

하인에게 옷시중을 들게 시키는 어른이 되다니. 꽤 괜찮은 어른으로 컸네, 나.

“굉장히 뿌듯하신가 봅니다.”

“그럼, 뿌듯하지.”

르니예는 벨데메르가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음흉하게 웃었다.

“이런 정부도 두고 말이야.”

보면 볼수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선이 굵은 강인한 얼굴이었는데 거기에 안대를 씌워 놓으니, 묘한 색기가 흘렀다.

정복 심리를 자극한다고나 할까. 르니예는 손을 들어 벨데메르의 뺨을 어루만졌다.

“…….”

벨데메르는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촉촉한 온기가 서린 손길이 제 뺨을 어루만지는 감각이 노골적이었다. 눈을 가려 예민하진 촉각은 온통 르니예의 손이 닿는 곳으로 몰렸다.

“네가 남편보다 더 잘생겼어.”

노골적인 칭찬이었다.

“……고맙군.”

왜 고마워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칭찬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를 해야겠지.

뭐, 남편보다 낫다는 말이 썩 나쁘지도 않으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에드윈보다는 나란 건가? 보는 눈은 있군.

벨데메르가 은근히 뿌듯해하는 순간, 욕조에서 튄 물로 그의 셔츠가 젖어 들었다.

“르니예 님, 뭐 하시는 겁니까?”

“실수.”

실수가 아니었다. 고의였다. 르니예는 벨데메르에게 물을 끼얹었다. 그러고는 그의 얇은 셔츠가 젖으며 그의 몸이 드러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너, 야해.”

젖은 셔츠 위를 쓸어내리는 손을 벨데메르가 잡아 세웠다.

“더는……, 안 돼.”

수증기가 내는 열기와 확연히 다른 열기가 벨데메르의 안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알았으니까 이제 놔줘.”

벨데메르는 순순히 그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그건 실수였다. 그가 손목을 놓아주자마자 르니예는 그의 안대를 벗겨 버렸다.

“……!”

“르니예 님!”

벨데메르는 순간 환해지는 시야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벨데메르를 보며 르니예는 꺄르르 웃었다.

“어차피 거품 때문에 뭐 보이지도 않아. 생긴 건 야하게 생겨서, 순진하네.”

“르니예 님께서 지나치게 순진하지 않으신 겁니다.”

샤피로는 욕조 안을 둥둥 떠다니는 검은 천을 집어 들었다.

“주인님.”

벨데메르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일어섰다. 잠깐 봤던 장면이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욕조에 들어가 있는 르니예라니.

그는 귀 끝까지 달아오른 열을 견디지 못하고 욕실을 뛰쳐나갔다.

“귀엽네.”

벨데메르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킥킥 웃은 르니예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내가 쟤도 돈 주고 산 거야?”

다사다난했던 목욕이 끝났다. 커다란 수건으로 르니예를 돌돌 말아 침대로 옮긴 샤피로는 진이 빠졌다.

“르니예 님이 얼른 기억을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배고파.”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 먹이고 재우자. 샤피로는 어서 빨리 르니예를 재우기로 마음먹었다.

“옷부터 갈아입으시고 식사하러 가시죠.”

“식사하러 가자고?”

르니예는 진심으로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식사를 하러 가자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데, 식사하러 내려가야 해?”

르니예는 샤피로가 영 못 알아듣자 답답해하며 말했다.

“방으로 가져와.”

벨데메르는 찬물을 연거푸 들이켜고서야 묵직하게 피어오르는 열기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르니예는 아프다. 아픈 사람이다. 아픈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적절하지 못했다.

“식사 시중도 제가 들겠습니다.”

“아니다, 샤피로.”

샤피로에게 모든 것을 떠넘길 수 없었다. 그러기엔 벨데메르의 양심이 매우 찔렸다.

벨데메르는 샤피로에게서 쟁반을 건네받아 침실로 들어왔다.

르니예는 수면 가운을 입고 침대 헤드에 기대 식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렇다. 샤피로는 르니예의 옷을 완전히 갈아입히는 데 실패했다.

그는 간신히 르니예에게 수면 가운을 입힐 수 있었을 뿐이었다. 벨데메르는 벌어지는 가운에 드러나는 하얀 살을 애써 못 본 척하며 테이블 위에 쟁반을 놓았다.

“어떻게 내가 거기까지 가? 기운 없어서 못 가겠어.”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안아서 옮겨 줘.”

이거저거 해 달라는 것은 귀찮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성가시도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조절할 수 없는 욕망이 난감하긴 했지만, 저를 향해 팔을 뻗는 르니예는, 안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먹어야 얼른 낫지.”

결국 르니예를 안아서 테이블까지 옮긴 벨데메르는 르니예에게 스푼을 건넸다.

하지만 르니예는 스푼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먹여 줘야지. 나 환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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