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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76화 (76/120)
  • 76화. 궁금해서 죽을지도 몰라

    “생각보다 태연하게 잡혀가는군.”

    “마치 잡혀갈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말입니다.”

    벨데메르와 샤피로는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남자는 술을 마시지도 않으면서 잔을 들었다 놨다만 반복했다.

    “제가 가서 대화를 해 볼까요?”

    “아니, 조금 더 지켜보지.”

    소란이 잦아들자 남자는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그 뒤를 벨데메르와 샤피로가 따라붙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주인님.”

    갈림길에서 샤피로는 남자의 뒤를 따랐고, 벨데메르는 집으로 돌아왔다. 르니예의 소식을 가지고 누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많이 다친 건가.”

    불안함에 벨데메르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벨데메르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계속 집 안을 서성였다.

    “나를 이리 걱정시키다니, 르니예.”

    르니예가 영영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이대로 끝이면, 그러면……. 불안한 생각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차라리 누워 있는 르니예라도 볼 수 있다면 덜 불안했을 테지만, 당장 만나러 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쓰러진 르니예를 더 곤란하게 할 수는 없으니.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에드윈을 치워 놓는 건데.”

    에드윈의 존재가 내내 성가시긴 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직접 나서지 않은 것은 귀찮아서, 혹은 르니예가 처리할 것을 믿어서만은 아니었다.

    비록 정부의 처지이기는 했으나, 르니예와 함께하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좋았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소원이 이뤄지고 나면 조각상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해결 방법을 찾을 시간을 벌고 싶었다.

    그 방법이 바로 에드윈이었다. 성가시기는 했지만, 참아 줄 만하여 두고 본 것이었다.

    “이런 일은 생각지 못했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에드윈을 진작에 치워 버릴 것을 그랬다. 그랬다면 지금 르니예의 옆에는 벨데메르 자신이 있었을 텐데.

    물론 지금도 몰래 가려면 갈 수는 있었다.

    “가면, 할 수 있는 일은 있나.”

    간호는 해 본 적 없으니 서툴 테고, 르니예가 일어나지 못하면 마법도 쓸 수 없다.

    그저 옆에 앉아 얼굴만 보고 이불이나 덮어 줄 수 있겠지.

    그런데 고작 그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 웃기는 일이었다.

    “……그거라도, 해 볼까.”

    * * *

    에드윈은 에니를 르니예와 있게 두지 않으면서, 또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모시는 주인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그딴 명령을 듣고 싶지 않지만, 당장은 별수가 없었다. 에니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럼 주방에 있겠습니다. 아가씨 드실 스프 좀 만들고 있을게요.’

    결투에서 지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역효과만 날 게 분명했다.

    에드윈의 명령을 어기고 르니예를 빼돌릴 수는 없었지만, 다른 수가 있었다.

    ‘로이드.’

    에니는 체이스의 먹을 것을 챙기러 온 로이드와 접선했다. 직접 벨데메르에게 가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벨데메르의 존재를 알면서, 에드윈에게 그 존재를 들키지 않은 사람.

    ‘체이스에게 이걸 전해 주세요.’

    에니는 계획을 휘갈겨 쓴 쪽지를 체이스에게 전달했다. 오늘 밤, 르니예를 벨데메르 집으로 빼돌릴 계획이었다.

    르니예는 아직 상단을 몰래 빠져나갈 만큼 몸 상태가 좋질 못했다. 누군가 들어서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일단 에니는 불가능했다.

    체이스를 직접 시킬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좀.”

    미덥지 않았다. 벨데메르만 몰래 들어오게 할 수 있다면, 그 편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작은 주인님 주의만 잠깐 돌릴 수 있으면 완벽한데.”

    에드윈이 잠깐 한눈을 팔게 할 수 있다면, 그 틈에 르니예를 빼돌릴 수 있었다.

    고민하는 에니는 프리야의 존재를 떠올렸다.

    “우리 아가씨가 이걸 위해서 프리야를 안 내쳤나 보다.”

    프리야를 쓸모 있다고 생각할 날이 오다니.

    “근데 얘 어디 갔어?”

    * * *

    “작은 주인님, 제가 작은 마님 목욕 시중을 들까요?”

    프리야는 에드윈에게 와 있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르니예를 보러 온 거지만.

    “프리야, 네가?”

    “네. 사실 조금 아까 작은 마님 소리 지르는 걸 들었어요. 목욕이 하고 싶으신 모양이던데.”

    문밖으로까지 짜증이 잔뜩 난 목소리가 들렸다. 목욕하고 싶다고, 당장! 이라며 소리를 지르는데 평소에 알던 르니예가 맞나 싶었다.

    “작은 주인님께서 목욕 시중을 드시는 건 좀…….”

    프리야는 말끝을 흐리며 르니예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정말 기억을 잃은 걸까? 정말일까?

    그랬다면 아주 곤란한 일이었다.

    “네가 도와주면 고맙긴 한데.”

    르니예는 아까부터 목욕을 하고 싶다고 난리를 피웠다.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물병에 있는 물로라도 씻겠다고 옷을 벗기 시작하는 것을 간신히 말리고 나온 참이었다.

    그렇다고 에니와 단둘이 둘 수도, 정말 욕실에 따라 들어갈 수도 없어서 고민하던 찰나였다.

    프리야가 해 준다면 한시름 덜기는 하지만, 프리야를 믿어도 될까.

    “목욕은 아직 무리실 테니, 물수건으로 몸만 닦아 드릴게요.”

    그 정도는 괜찮으려나. 에드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니는 바딜이 지키고 있고, 문 앞은 자신이 지키면 그만이었다.

    르니예도 조금 개운해지면 저 생떼를 멈추겠지.

    “몸을 닦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구나. 그러도록 해.”

    “네, 작은 주인님.”

    프리야는 얼른 가서 따뜻한 물과 깨끗한 수건을 준비해 왔다.

    “부인, 이 아이가 부인의 목욕 시중을 들 겁니다.”

    르니예가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문으로 걸어왔다.

    “제가 목욕 시중을 들겠습니다, 작은 마님.”

    르니예는 프리야를 아래위로 훑었다. 초면이었으나 옷차림을 보니 저택에서 고용한 사용인인 듯했다.

    “그래, 네가 들도록 해.”

    선뜻 르니예가 허락하자, 프리야는 얼른 대야를 내려놓고 에드윈을 내보냈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는 에드윈의 얼굴 앞으로 방문이 굳게 닫혔다.

    “얘, 와서 옷 좀 벗겨 봐. 대가리를 다쳤는데 왜 팔이 아프고 난리야.”

    “……작은 마님, 정말, 정말로 기억을 다 잃으신 거예요?”

    주섬주섬 옷을 벗고 있는 르니예 앞으로 프리야는 무너져 내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르니예가 기억을 잃다니.

    그렇다면 자신과 거래한 것도 다 잊었다는 것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소원을 빌었던 것도, 소원을 빌어주는 조각상의 위치도 까맣게, 아주 새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야.”

    르니예가 황망한 표정을 하고서 주저앉은 프리야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잡아 올렸다.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네가 기억을 잃은 줄 알겠다. 왜 내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게 있어?”

    그게 아니라면 세상 다 잃은 표정일 리가 없지 않나.

    “네, 저랑 약속하신 게 있다구요. 그걸 잊으시면 어떡해요.”

    “하녀치고 예의가 없네. 투정을 다 부리고. 나랑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지는 않고.”

    그랬다면 에드윈이 들여보내 주지 않았겠지.

    기억을 잃었어도 수상한 건, 수상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감옥에 가 있고, 남편이란 작자는 감시를 하지 않나, 이제는 웬 하녀가 들어와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네가 혹시 그 내연녀야?”

    얼굴이 반반한 걸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내 기억에 너무 집착하는데. 내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게 뭔데?”

    쫓겨나기 전 에니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했다. 독수공방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게 아닌가. 혹시 하렘이라도 만든 건가, 나?

    “말해 봐. 혹시 알아? 내가 그건 또 기억해 낼지?”

    “어차피 기억나도 안 알려 주실 거면서.”

    프리야는 입술을 삐죽였다. 르니예는 그 통통한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서 꾹 눌렀다.

    “으!”

    “잘 들어, 이름 모를 하녀야. 여기서는 내 말에 토 다는 거 아니야. 내 남편이랑 바람피우고도 사지 멀쩡한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프리야는 점점 세기를 높여가는 르니예의 손가락에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내가 너한테 거래라는 걸 제안할게.”

    비록 거절 옵션은 없는, 강요에 가까운 거래겠지만.

    “네가 나에 대해서 아는 걸 전부 말해. 그럼 나도 네가 필요한 그 기억이 났을 때, 알려 주지.”

    기억이 안 났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알려 줘도 되는 기억이라면 알려 주면 되는 거고.

    지금 당장은 상황 파악이 더 중요했다.

    “가, 각서 써 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 각서 써 줄게.”

    온전한 정신이 아닐 때 쓴 각서는 무효다. 얘는 그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겠지.

    “혹시 나한테 다른 남자가 있었어?”

    혹은 남자들이라거나.

    “예, 정부를 한 명 두고 계세요.”

    각서를 써 준다는 말에 프리야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나도 정부를 두고 있었구나.”

    그러면 그렇지.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두고 보지만은 않았겠지.

    “정부는 어디에 있지?”

    “유령 들린 집이요.”

    “유령 들린 집?”

    프리야는 아차 했다. 콜론이 그 집을 산 건 3년쯤 되었다고 했으니 16살 르니예가 알 턱이 없지.

    “광장에서 서쪽으로, 과일 가게 옆길로 쭉 들어가면 나오는 이 층 집이에요. 담이 엄청 높은.”

    거기에 내 세컨드가 있단 말이지. 르니예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마님……? 가시려고요, 설마? 저, 저는 이렇게 두고?”

    “넌 여기서 시간 좀 끌어.”

    “시간을 어떻게 끌어요, 작은 마님, 작은 마님!”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르니예는 저를 잡는 프리야를 뿌리치며 창문을 열었다.

    들어오는 찬 바람에 현기증이 살짝 일었지만 르니예는 자신의 정부를 만나기 위해서 한 발을 내디뎠다.

    “꼭 지금 가셔야 해요?”

    “너무 궁금하잖아. 이 정도로 궁금하면 사람이 죽어 버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르니예는 창틀에 발을 올렸다. 회복되지 않은 몸이 아슬아슬하게 휘청거렸다.

    “작은 마님, 그러다 다치시겠…….”

    프리야가 황급히 르니예의 허리를 잡으려던 순간, 그보다 먼저 르니예를 안아 드는 손길이 있었다.

    “그래, 르니예. 이러다가 다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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