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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72화 (72/120)
  • 72화. 결투

    “도련님, 아무래도 결투에 응하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바딜은 에드윈을 말렸다. 예감이 영 좋질 않았다.

    “이미 받아들였다.”

    이미 허락한 싸움이었다. 별 이유도 없이, 그저 느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물러서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스승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기사 서품을 받았다는 자부심, 검사라는 자존심, 그게 에드윈을 버티고 서게 했다.

    에드윈은 절대 먼저 물러설 수 없었다.

    “하지만.”

    “바딜, 그만.”

    에드윈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섞였다.

    “주인의 사기를 북돋아도 모자랄 마당에 초를 치지는 말아야지.”

    본분을 잊었군. 내가 너무 막역하게 대한 탓인가? 바딜을 형제처럼 아꼈는데,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주인에 대한 불신, 무례라니.

    “저는 도련님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라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낫겠어.”

    에드윈은 바딜의 말허리를 잘랐다. 바딜은 에드윈의 가지런히 접힌 제복을 두 손으로 받쳐 건네며 입술을 꾹 닫았다.

    “나도 이 결투가 내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야.”

    에드윈은 벨데메르의 존재가 아주 거슬렸다. 그가 아니었다면 르니예는 제가 미행을 하는지도 몰랐을 것인데.

    “만에 하나 그자가.”

    ‘2왕자의 하수인이라면’이라고 말을 하려던 에드윈은 순간 멈칫했다. 바딜이 듣고 있었다.

    바딜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극비여야만 했다. 만에 하나, 그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그자가 상단을 노리고 있을지도 몰라.”

    증거는 충분했다. 망한 가문의 일원, 가진 거라고 잘나 빠진 얼굴밖에 없는 자. 그런 벨데메르 앞에 2왕자가 나타난다.

    2왕자는 무기를 원한다. 벨데메르는 무기를 밀매하기 위해 해안가 무역지구로 온다. 거기서 가장 큰 무역상의 딸을 유혹한다.

    “그자도 내 존재가 거슬리겠지.”

    어차피 르니예를 유혹한 김에 르니예를 잘 구슬려 상단을 꿀꺽할 계획을 세웠겠지.

    그렇다면 수도에 무기뿐 아니라 뇌물도 가져다 바칠 수 있을 테니. 그런데 르니예의 남편이라는 자가 갑자기 상단 운영에 개입한다.

    “얼마나 성가시겠어.”

    벨데메르는 르니예에게 이혼을 종용하고, 르니예는 꼭두각시처럼 따른다. 하지만 이혼해 주지 않고 버티니 결국 제거하려 드는 것이었다.

    “그쪽에서 성가셔하게 두면 안 되는 겁니까?”

    에드윈의 혼잣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바딜은 의문이 생겼다. 르니예의 정부가 성가셔하든 말든 그것이 에드윈과 무슨 상관일까.

    에드윈은 적법한 남편이니 무시해 버려도 그만이었다.

    “나 또한 그자가 성가시다.”

    성가시고 또 궁금했다. 만에 하나 이혼을 못 하게 되면 벨데메르가 어떻게 나올까.

    허둥대다가 2왕자의 하수인이라는 증거를 흘릴지도 모른다. 얼마 뒤면 셰론 후작이 펠레포네 영지에 들르기로 한 날이었다.

    에드윈은 알아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를 보기에 면목이 없었고,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최소한 벨데메르의 정체라도 알아내 보고하고 싶었다.

    “결투가 길진 않을 거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도련님. 다치실까 염려됩니다.”

    “그럴 일 없다는데도.”

    에드윈은 눈썹을 찌푸리며 바딜이 내미는 검을 채가듯 받았다. 신경이 예민해졌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 그런 듯했다. 어쩌면 오늘 한바탕 검을 휘두르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지도 모른다.

    에드윈은 그런 생각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에드윈 라포어 경, 오셨습니까?”

    에드윈을 맞이한 건 샤피로였다. 샤피로는 환히 웃으며 바딜에게도 가볍게 목 인사를 건넸다.

    “승패를 가르는 방법에 관해 제안하려 합니다. 검을 먼저 놓치는 쪽이 지는 것으로, 어떻습니까?”

    “그대 주인은 제법 온건한 방법을 선호하시는군.”

    “저희 주인님께서 배려심이 워낙 넘치셔 그럽니다.”

    묘하게 너를 위해서 온건한 방식을 골랐다는 뉘앙스가 흘렀다.

    하여간 그 종이나 주인이나 기분 나쁜 것은 비슷하군.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배려를 해 드려야겠지. 받아들인다고 전하게.”

    샤피로는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벨데메르에게로 향했다. 샤피로가 몇 마디 속닥거리고 나자 벨데메르가 에드윈을 향해 다가왔다.

    에드윈 역시 벨데메르를 향해, 딱 그가 온 만큼 걸어갔다. 관객은 없었으나, 수많은 관중이 입을 다물고 있는 듯한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예를 갖췄다. 에드윈은 벨데메르에게서 기묘한 기운을 느꼈다. 벨데메르의 몸 전체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이 흘렀다.

    만만치 않은 자다.

    에드윈은 검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 주다니. 치정으로 얽힌 상대에게 배려심이 넘치는군.”

    벨데메르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에드윈은 그 낯짝을 꿰뚫으려는 듯 검 끝을 세워 찌르는 공격을 해 왔다.

    목을 표적으로 삼고 들어오는 공격에 벨데메르는 그저 몸을 살짝 트는 것으로 응수했다.

    에드윈의 검은 그의 머리칼이나 휘날리게 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여유로웠다. 벨데메르에게는 여유가 넘쳤다. 그냥 들어오지 않고 일부러 말을 하는 건, 에드윈이 보여 주었던 배려를 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벨데메르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큭.”

    기다란 검날이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에드윈의 목 끝을 향해 휘어져 들어왔다. 방금 에드윈이 한 것과 똑같은 검법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공격을 당한 쪽의 반응이었다. 에드윈은 제 급소를 향해 들어오는 검을 간신히 쳐냈다.

    그 뒤로도 똑같은 행위의 연속이었다. 에드윈은 검은 벨데메르에데 닿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허물어졌다.

    그에 비해 벨데메르의 검은 번번이 에드윈의 살 끝을 스쳤다. 에드윈은 그의 검을 막아내기에도 급급했다.

    “이 정도였나.”

    이것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벨데메르는 실망감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끝내는 것으로 상대방에 대한 예를 차리고자 했다.

    짧게 한 발. 벨데메르의 검 끝과 에드윈의 검 끝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보폭을 크게 하여 한 발. 그들의 검은 쇠가 긁히는 소리를 내며 위로 치솟았다. 벨데메르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가 손목을 틀어서 에드윈의 검을 쳐냈다.

    순발력과 완력이 적절하게 섞인 공격에 에드윈의 손목이 꺾이고, 그의 검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보며 에드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패배를 인정해야 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인님.”

    얄미운 목소리가 청명하게 흘러나왔다. 에드윈은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샤피로가 벨데메르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있었다. 에드윈도 익히 아는 손수건이었다.

    르니예의 손수건. 귀부인이 되었으니 맞춤 손수건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콜론이 르니예를 위해 제작한 그 손수건이었다.

    르니예가 그를 응원하는 것이야 당연했다. 그런데 왜 창자가 꼬이는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에드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들고 가 희희낙락 웃는 목을 베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샤피로가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바딜을 향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혼 서류입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서명하여 판사에게 보내시기를.”

    그 서류를 보며 주먹을 쥔 에드윈의 손등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패배의 결과물이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그는 패배했다.

    * * *

    펙은 이든에게 된통 깨졌다. 이든은 펙이 마음에 들지 않는 티를 숨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팍팍 냈다.

    “요즘 예민한 시기라 다들 날이 서서 그렇네. 자네가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 주게.”

    “아닙니다, 후작님. 제가 부족해서 그런걸요.”

    이래서야 공을 쌓아서 후작은커녕 남작 작위라도 받으려나 모르겠다. 펙은 의기소침해서 어깨를 툭 내려뜨렸다.

    “잘해 보려는 의지가 보여서 좋군. 공작께 듣기로 가문을 일으켜 보고자 한다지?”

    “예, 그렇습니다.”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데 공을 세우는 것만큼 좋은 기회도 없는데 말이야.”

    셰론은 보았다. 공을 세운다는 문장에 펙이 눈을 반짝이는 것을.

    “그럴 기회만 있다면 뭐든 할 겁니다.”

    “그래? 그 기회가 지금 당장 자네 앞에 있어도?”

    펙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위를 두고 두 왕자가 싸운다. 펙은 그중에서도 가능성이 큰 1왕자의 줄에 섰다.

    셰론 후작은 1왕자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고, 그런 그가 펙에게 일을 맡기려 하는 중이었다.

    “패러히트 공작저에 드나드는 사람을 빠짐없이 감시하게.”

    “그중 2왕자의 사람이 있는지 지켜보란 뜻이십니까?”

    소공작과 의형제를 맺었다더니, 나름대로 정보력은 있는 편이로군. 셰론은 제법이라는 듯 펙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본인이 어떤 일에 개입했는지 정확히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경각심을 가지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2왕자께서 반란을 준비하는 정황을 포착했다.”

    “예?”

    “패러히트 공작께서 2왕자 쪽으로 넘어가고 그래서 반란이 성공하면, 자네와 나는 둘 다 단두대행이야. 그러니 두 눈 똑바로 뜨고 감시하도록.”

    펙은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냥 정치 싸움이 아니라 반란이었어?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

    하지만 할아버님께서 내 목 정도는 붙여 주실 수 있지 않을까?

    펙은 이 사실을 낱낱이 편지에 써 벨데메르에게 보냈다.

    “아, 세사르 편지도 보내 줘야지.”

    물론, 세사르의 연서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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