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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68화 (68/120)
  • 68화. 집착으로 말하자면

    “화살촉?”

    분명 화살촉이었다. 흙이 약간 묻기는 했지만, 완전히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게 왜 여기에 있지?”

    르니예가 피터를 불러낸 곳은 마구간 근처. 화살, 그것도 화살촉만 떨어져 있기에는 아주 이상한 장소였다.

    “순찰할 때 쓰나? 아니지, 그것도 이상한데?”

    순찰을 도는데 왜 화살촉만 떨어져 있겠어. 르니예는 일단 화살촉을 챙겼다.

    “우리 상단에서 무기도 파나? 나중에 카밀 숙부에게 물어봐야겠어.”

    에드윈은 후,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길게 내쉬었다.

    “도련님, 이제 그만하세요. 몸살 나시겠습니다.”

    “내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바딜.”

    에드윈은 잡은 검을 허공에 찔러 넣었다. 속이 답답했다.

    에드윈은 미궁에 빠졌다. 그의 수사는 진행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진창에 처박힌 수준이었다.

    무기가 반출되고 있다는데, 에드윈은 무기를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

    “이래서는 후작을 뵐 면목이 없군.”

    셰론 후작을 다시 보기로 약속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에드윈은 답지 않게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

    집중하지 못해서였을까. 에드윈은 그대로 검을 놓쳤다. 검은 흙먼지를 날리며 저 멀리까지 미끄러졌다.

    검까지 제대로 안 되는군. 실력이 녹슬었다. 한때는 검술로 가문을 일으키고 기사로 명예롭게 살아가는 것을 꿈꿨던 적도 있건만.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그저 검을 놓쳤을 뿐이다, 바딜.”

    에드윈의 대답이 까칠했다.

    “검은 손을 봐서 제자리에 가져다 두어라.”

    “……예.”

    에드윈은 그대로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속이 답답하여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역시 그 손을 잡아서는 안 되었다.”

    콜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악마처럼 속삭여서 에드윈을 이런 수렁에 빠지게 했다.

    애초에, 그래, 애초에 콜론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건 모두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젠장!”

    “이상하게 어지럽네.”

    열도 좀 나는 거 같고. 르니예는 이마를 짚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한숨 자면 나을 것도 같은데 잠이 올락 말락 한데, 꿀벌이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워.”

    르니예는 가볍게 타일렀다. 그러나 꿀벌은 계속 빙글빙글 돌았다. 르니예는 결국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얼른 들어와야 해.”

    꿀벌은 신속하게 창밖으로 나갔다. 르니예는 대답을 들은 셈 쳤다. 르니예가 다시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이번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니?”

    “저예요. 작은 마님.”

    프리야의 목소리였다.

    “들어와.”

    르니예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좀 쓸만한 걸 가져왔기를 바랄게.”

    르니예는 자기 앞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흥미로우실걸요.”

    “그래?”

    “오늘 작은 주인님 서재에 잠깐 들어갔는데, 책상에 지도가 있더라고요.”

    상단 소유의 창고와 상점을 그린 지도였다. 블러디 사파이어를 훔치러 들어오기 전, 달달 외웠던 바로 그 지도였다.

    “거기에 무슨 표시가 되어 있더라고요.”

    동그라미와 세모 표시가 되어 있었다. 동그라미 표시는 몇 개 있었고 세모 표시는 딱 한 군데였다.

    “바닷가 근처 창고였어요.”

    자세히는 못 봤지만, 언뜻 보기에 그랬다. 거기에 책장 아래 서랍에 마른 흙이 조금 떨어져 있었다.

    “거기서 흙을 묻혀 오신 것 같아요. 바딜한테 물어보니 마구간에 가셨다가 그렇게 됐다고 하셨지만.”

    프리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에드윈은 마구간에 간 적이 없겠지. 바닥에 흙이 떨어져 있던 게 언제래?”

    “바딜이 발견한 건 엊그제 아침이래요.”

    그리고 그 전날 밤, 르니예는 바닷가 창고에 갔었다. 르니예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픽 내뱉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괜찮은 정보죠?”

    “그냥저냥.”

    “그냥저냥이라뇨, 작은 주인님이 상단 창고를 뒤지고 있다는 정보잖아요.”

    프리야는 투정이라도 부리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작은 마님도 얼른 알려 주세요.”

    “그럴까?”

    르니예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나도 그 신전에 다녀왔어. 버려진 신전.”

    “그리고요?”

    “오늘은 거기까지.”

    프리야는 심한 말을 뱉을 뻔했다. 르니예는 정보를 주기는 줬다. 중요한 정보는 쏙 빼고.

    “이러실 거예요?”

    “나가 봐.”

    프리야는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나갔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자 르니예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에드윈이 나를 미행했다는 거네.”

    부티크에서 시꺼먼 옷을 샀다고 했을 때 받은 느낌이 맞았다.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요, 에드윈.”

    르니예는 끙 소리를 내며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 * *

    한숨 자고 일어나도 몸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앓아누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몸이 축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실버리안 영지를 다녀오고, 유령 때문에 잠을 못 자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다닌 탓에 감기에 걸린 듯싶었다.

    “오늘도 내가 먹여 주는 밥은 먹지 않을 셈인가?”

    삐졌나? 아무래도 삐진 것 같다. 의도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은 걸까?

    그래, 어떻게 들으면 서운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르니예는 다시 한번 차분하게 말했다.

    “벨데메르, 내가 한 말에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그대가 한 말은 이해했다.”

    그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서늘했다.

    “소원이 이뤄지고서 내가 그대에게 놓아달라 말하면 놓아주고 싶다고.”

    “네, 그게 벨데메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고 벨데메르를 좋아하니까, 내가 집착할까 봐 그런 거예요.”

    설명이 구구절절 이어졌다.

    “옛날에 벨데메르를 좋다고 따라왔던 사람들처럼 되면 안 되잖아요.”

    샤피로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저택에 몰래 침입하거나, 문 앞에서 매일 벨데메르를 기다리거나, 만나 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시위를 하는 등등.

    “그렇게 되지 않겠다는 말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반대라면?”

    “네?”

    그 반대라니. 르니예는 반대의 상황을 쉬이 상상하지 못했다.

    “그대가 내게 놓아달라고 애원하는데 내가 놓아주지 않는다면?”

    “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근데 벨데메르가 가라고 했는데 내가 안 간다고 버티면요?”

    “그럴 일이 없다면?”

    아, 그 말이었구나. 영원을 약속하는 그런 덧없는 말.

    르니예는 이제야 이해했다.

    “벨데메르는 지금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 같아요?”

    마음이란 변한다. 누구의 마음이든. 에드윈을 절대 놓을 수 없을 것 같던 마음도 이리 변하지 않았는가.

    “아, 그러니까 그대는 내가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군.”

    드디어 벨데메르와 르니예의 대화가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소원이 이뤄지고 난 다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약속하지. 소원이 이뤄지고 난 다음에도 그대를 내치는 일은 없어.”

    벨데메르의 약속을 받고도 르니예는 말이 없었다.

    “왜, 내 약속이 못 미더운가?”

    “아니요. 믿어요. 그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요. 그런데 난 벨데메르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내 옆에 있는 걸 원하지 않아요.”

    르니예는 단호해져야만 했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비록 멍청한 소원을 빌었지만, 소원의 끝은 현명하게 내고 싶었다.

    그게 어쩌면 신이 르니예를 되살린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런 약속은 소원이 이뤄지고 난 다음에 해 줄래요?”

    “못 믿겠다, 그런 뜻이군.”

    벨데메르는 다정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그럼 그대의 소원을 이루고 난 뒤에 또 이야기해 보지.”

    드디어 대화가 통했나. 르니예는 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르니예, 난 쉽게 약속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르니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벨데메르가 가로막았다.

    “약속을 쉽게 저버리는 사람도 아니지.”

    그의 말투는 다정했다. 그의 입은 르니예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벨데메르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난 내 손아귀에 틀어쥔 건 잘 놓지 않아, 그게 뭐라도.”

    르니예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니까 나를 틀어쥐고 놓지 않겠다는 건가? 틀어쥐고 놓지 않는 건 내 전공인데?

    에드윈에게 어떻게 집착했는지 알면 벨데메르가 깜짝 놀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벨데메르.”

    르니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벨데메르를 불렀다.

    “놓아준다고 할 때 받아들이는 게 좋을걸요.”

    르니예는 경고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페롤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니까.”

    현명하게 처신하라는 신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벨데메르는 지금쯤…….

    르니예는 말을 아꼈다.

    “아무튼 내가 봐주는 건 줄이나 알아요.”

    * * *

    르니예는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졸려서 눈을 감으면 옆에서 또렷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눈꺼풀이 들썩였다.

    “크흠.”

    그래서 결국 눈을 뜨면,

    “벨데메르, 안 자요?”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벨데메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대가 어떻게 혼자 두려움을 견뎌내는지 구경하는 중이야.”

    “그, 별로 재미가 없을 텐데.”

    “아니, 아주 재미있군. 밤새워서 봐도 질리지 않겠어.”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말을 결투 신청으로 받아들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해 보자는 뜻이 아닌가.

    누가 더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지. 이런 걸 대결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상하게 경쟁심이 일었다.

    “그래도 자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일을 위해서?”

    “걱정은 고맙지만, 내일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아, 그렇구나.”

    벨데메르에게 할 일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걸까. 르니예가 어색하게 웃고 다시 눈을 감는 이 순간, 까맣게 잊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꿀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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