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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66화 (66/120)
  • 66화. 비상금

    모두가 잠든 밤, 르니예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미안해.”

    르니예는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바람 한 줄기만 지나가도 르니예는 흠칫하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아니야, 유령은 나를 해코지하지 않는다고 했어.”

    자꾸 스스로를 안심시켜야 했다. 유령은 그냥 있는 거다. 원래 거기에 있었는데 몰랐을 뿐인 거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다.

    르니예는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을 꾹 부여잡으며 또 두리번거렸다.

    이번에는 야간 경비가 지나가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지금인가? 지금? 지금.”

    횃불 두 개가 나란히 지나가고 난 뒤로 르니예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콜론 상단은 아주 넓었다. 르니예가 사는 저택의 동쪽으로 상점과 창고, 점원 숙소가 있었다.

    그것뿐 아니라 바닷가 쪽으로 수출입 하는 물건을 따로 보관하는 창고 동이 있었다. 르니예는 지금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

    무심코 발을 디디던 르니예는 질척한 바닥을 밟고 소리를 냈다. 입을 황급히 틀어막은 르니예는 또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르니예가 들어가려고 하는 창고는 삼엄한 경비에서 제외된 곳이었다. 이 창고는 엄밀히 따지자면 비품실에 가까웠다.

    삽이나 낫, 장화, 칼 등 간혹 사용하는 물건을 넣어두고 쓰는 곳이었다.

    언젠가 콜론이 말했다.

    ‘그런 곳에 귀중품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할 거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장소가 안전할 때도 있는 법이지.’

    그의 말은 정답이었다. 르니예는 구석에 처박힌 아주 오래된 와인 상자를 밀어냈다.

    “아오, 왜 이렇게 무거워.”

    그 와인은 너무 오래되어 식초에 가까웠다. 먹기에는 시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상태로 몇 년째 거기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금고가 있었다. 르니예는 바닥 판자를 몇 개 들춰냈다.

    “그렇지.”

    예상대로 그곳에 있었다. 르니예는 금고 문을 열었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르니예의 얼굴로 반짝이는 빛이 물결쳤다.

    “아, 역시 우리 아버지야.”

    르니예는 금고 가득한 다이아몬드를 보고 손뼉을 칠 뻔했다. 솔직히 금괴나 금화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그것들은 무거워서 르니예 혼자 옮기기에 어려웠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라면 말이 달랐다.

    르니예는 챙길 수 있을 만큼 다이아몬드를 챙겨 나왔다. 또다시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둑질하는 기분인데.”

    르니예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근데 어차피 아버지 돌아가시면 다 내 거잖아.”

    르니예는 착착 합리화를 했고, 그 합리화에 콜론의 의견은 요만큼도 들어가지 않았다.

    “응?”

    몰래 창고를 나가는 르니예의 눈앞으로 꿀벌이 8자를 그렸다.

    그 신호는 보통 두 가지였다. 위험하거나, 벨데메르가 르니예를 부르거나.

    “위험하다는 건가?”

    하지만 들키지 않았는데. 르니예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누군가 르니예의 어깨를 탁 잡았다.

    “……!”

    르니예는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튼 그랬다.

    “르니예.”

    “벨데메르?”

    르니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대를 데리러 상단으로 갔더니 그대의 하녀가 알려 주더군.”

    “나를 데리러 왔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벨데메르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두워지면 그대가 무서워할 것 같아서.”

    그뿐이었다. 어제도 촛불을 켜고 나서야 르니예는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럼 갈까.”

    벨데메르는 다이아몬드 자루를 받아 들고 손을 내밀었다. 르니예는 쭈뼛거리면서 그 손을 잡았다.

    벨데메르의 커다란 손에 르니예의 손은 보이지도 않게 폭 가려졌다.

    “벨데메르, 그쪽이 아닌데.”

    그는 르니예의 손을 끌어서 집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알아, 그냥 그대랑 좀 더 걷고 싶어서. 힘든가?”

    “아뇨, 힘들지는 않은데.”

    르니예는 의아해하면서도 그를 따라 걸었다. 벨데메르는 중간중간 잠깐씩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르니예도 듣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실소를 터트렸다.

    “웃기는군.”

    미행이 이리 어설퍼서야.

    “어디로 갔지?”

    어느 순간 에드윈은 르니예와 벨데메르를 놓쳤다.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으니까.”

    르니예와 벨데메르가 향하는 곳이야 당연히 벨데메르의 집일 것이 뻔하니. 에드윈은 그리 합리화를 하며 미행을 멈췄다.

    그리고 왔던 걸음을 돌아갔다. 르니예가 창고에서 무얼 했는지 알아볼 셈이었다.

    “이런.”

    그는 르니예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한쪽 발이 진창에 빠진 것이다. 발을 대충 툭툭 턴 에드윈은 주변을 쓱 살피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도 안 잠겨 있고.”

    있는 거라고는 삽, 톱, 밧줄 따위의 용품들이었다. 훔쳐서 팔아도 돈이 될 법한 물건이 없는 비품 창고. 르니예는 여기서 무얼 가지고 나갔을까?

    비어 있던 자루가 제법 빵빵해져서 나가던데.

    “밧줄을 들고 간 건 아닐 테고.”

    무언가가 이 창고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리라. 그리고 르니예는 그걸 벨데메르에게 전해 주었다.

    “프리야의 말이 사실이군.”

    르니예가 자꾸 어디를 쏘다닌다는 프리야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프리야가 임기응변으로 한 거짓말이 공교롭게도 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르니예나 프리야가 알면 땅을 칠 일이었지만.

    벨데메르와 돌아온 르니예는 우는 소리에 또 흠칫했다. 유령이 우는 소리인가?

    그러나 잠깐 들어 보니 펙의 울음소리였다.

    그는 무서움에 떨고 있었고, 우리 냉정한 사역마께서는 개의치 않고 야식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왜 그런 쓸데없는 소원을 빌어서!”

    르니예는 손수건을 잡아 주며 훌쩍이는 펙을 달랬다.

    “그게 제 유일한 꿈이었단 말입니다.”

    펙이 상상한 유령과 마주한 유령은 너무 달랐다.

    마치 꿈과 현실의 괴리처럼. 대화도 통하지 않는데 오만 유령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딱히 무슨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펙을 빤히 쳐다보고, 아니면 그의 발목이나 손목을 덥석덥석 잡았다.

    “너무 무서워요.”

    “하지만 한번 빈 소원은 되돌릴 수 없답니다, 펙 님.”

    유령 같은 건 무섭지 않은 사역마는, 펙 때문에 편한 밤을 보내지 못해 심기가 불편했다.

    “내가 벨데메르한테 잘 말해 볼게.”

    질질 짜는 펙을 보니 짠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에드윈과 결혼할 때 르니예도 핑크빛 신혼 생활을 꿈꿨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가끔 멍청한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어깨 펴, 손자.”

    “흡, 할머님.”

    펙은 몸을 구겨서 르니예의 어깨에 기댔다.

    “……?”

    하필이면 그 장면을 벨데메르가 보았다. 그는 매우 불쾌했다. 후손이고 뭐고 발로 차 버릴 만큼.

    저 커다란 덩치로 왜 르니예에게 안겨 있는 거지? 르니예의 저 가느다란 어깨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비켜.”

    그렇다. 그의 눈에는 르니예에게 밟혀 아직도 붙지 않은 펙의 팔 뼈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님!”

    펙이 저를 툭툭 치는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벨데메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르니예는 펙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도 유령의 존재를 좀 잊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펙이 중간중간 꽥꽥 소리 지르고, 덜덜 떨면서 허공을 쳐다보면 르니예도 덩달아 무서웠다.

    “방법은 있지만, 내가 소원도 들어주고 방법까지 알려 줘야 하나? 왜 그래야 하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펙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뭐든?”

    “예, 뭐든.”

    이럴 줄 알았다. 처음 펙을 본 순간 계획했던 그대로 이뤄졌다.

    “샤피로, 지하실에 가서 그것을 가져와라.”

    “예, 주인님.”

    펠레포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만든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녹슬지 않은 지식으로 만들어 낸 약이었다.

    “잠시나마 영안을 흐리게 해 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펙은 샤피로의 손에서 약을 채가려고 했다. 그러나 샤피로가 빨랐다.

    “백작.”

    벨데메르의 목소리에 펙과 르니예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예?”

    “백작 작위를 받아 와라.”

    그것이 거래 조건이었다. 펙은 어리둥절했다.

    “백작요? 남작도 아니고 백작요?”

    “그래.”

    최소한 백작 작위는 있어야 테메르 볼 면이 설 것 같았다.

    “못하겠으면, 이대로 살아야겠지.”

    “하, 할게요, 할게요.”

    펙은 무릎 꿇은 채로 샤피로에게 다가가 결국 약병을 받았다.

    일단 한다고 하고, 해 봤더니 못 하겠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한 달에 한 번 약을 마시지 않으면 영안이 다시 열립니다, 펙 님.”

    샤피로가 주의사항을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한 달 동안 백작이 되기 위해서 무얼 했는지 보고서를 보내시면, 검토하고 약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니, 기사 작위도 못 받은 제가 어떻게 백작을…….”

    “알아서.”

    벨데메르의 대답은 짧았다. 그런 방법까지 일일이 일러 줘야 하나.

    그는 혀를 짧게 찼다. 테메르의 핏줄에서 저런 게 나오다니.

    “백작 가문의 안주인이 되게 해 주지, 르니예.”

    벨데메르가 청혼하듯 르니예에게 손을 내밀었다. 르니예는 그 손을 잡으면서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괜찮아요, 벨데메르.”

    벨데메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귀족으로 만들고 싶어 에드윈과 결혼시킨 아비를 생각해서라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미적지근한 반응에 의문스러워하던 벨데메르는 알았다는 듯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백작은 너무 낮은가 보군. 그럼 후작으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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