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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63화 (63/120)
  • 63화. 대를 잇는 또 다른 방법

    정적,

    그야말로 정적이 흘렀다.

    “아직 두 분 젊으셔서 애 셋은 거뜬할 것 같은데요.”

    르니예가 큼큼 헛기침하며 입술을 앙다물고 읊조렸다.

    “손자야, 조용히 가자.”

    벨데메르와 아이라니.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또 있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미래였다.

    그리고 아이가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과정이라는 게 있는데…….

    상상하다가 르니예는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할 거라면 입을 다무는 게 좋겠군.”

    조용히 따라오던 벨데메르가 결국 한마디 했다. 르니예와 아이라. 르니예를 닮으면 분명 귀여울…….

    벨데메르는 무심코 상상하다가 멈칫했다. 그런 삶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삶. 벨데메르는 그런 삶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에게 의미 있는 삶이란 성취하고 극복하고 이뤄 냈던 것이었으니.

    “쓸데없는 말이 아니라요, 할아버님.”

    “펙 님, 저 부동산입니까?”

    다행히 부동산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덕분에 어색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다.

    “아이고, 라인허트 경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인사하던 부동산 업자는 펙을 보자마자 반갑게 알은척을 해 왔다.

    “오늘은 무슨 일이십니까?”

    “라인허트 저택을 다시 살까 하네. 아직 팔리지 않았다던데, 맞소?”

    “예, 아직입니다.”

    업자는 손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살갑게 굴었다.

    “팔리기 전에 오셔서 다행입니다. 벌써 문의가 몇 건이나 들어왔거든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바로 계약하지.”

    “그런데 라인허트 경, 그사이에 저택 가격이 조금 올랐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르니예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원래 살 때는 싸게 사고 팔 때는 비싸게 파는 게 장사의 기본 아니겠는가.

    어느 정도 웃돈은 낼 용의가 있었다.

    “그사이에? 얼마나?”

    “2만 골드가 올라서 총 4만 골드입니다.”

    “두 배가 올랐다고?”

    펙은 2만 골드에 저택을 넘겼다. 그리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4만 골드로 두 배가 훌쩍 뛰었다.

    “두 배는 말도 안 되잖아요.”

    웃돈도 웃돈 나름이지 어떻게 두 배를 올려?

    “이 주변 땅값이 다 그렇게 올랐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업자가 손사래를 쳤다.

    “산다는 사람 많은데, 라인허트 경께 우선순위를 드린 겁니다. 안 사셔도 저희는 뭐 상관없어요.”

    펙은 어떻게 하냐는 듯 르니예를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해 먹겠단 말이지?

    르니예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럼 다른 사람한테 파세요.”

    팔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체 저택은 왜 파신 겁니까?”

    샤피로가 드디어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유령의 실체를 알아내는 건, 저택 안에서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유지 비용이 많이 들잖아요.”

    펙은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다. 유령을 쫓는 일은 돈이 되지 않으니, 죽을 때까지 먹고살 돈이 필요했다.

    “그 돈 아껴서 제 생활비로 쓰려고 했죠.”

    저택을 판 2만 골드에 재산 남은 것을 합치면 한 몸 먹고 살기는 충분했다. 벨데메르는 진심으로 저 머리통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 반으로 갈라 보고 싶었다.

    “근데 그냥 가서 일기장만 훔쳐 오면 안 되나요?”

    “오래간만에 좋은 아이디어를 내셨습니다, 펙 님.”

    샤피로가 벨데메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주인님, 제가 가서 일기장만 훔쳐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르니예는 생각이 달랐다. 몰랐으면 모를까, 저에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한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지는 것 같잖아.

    “르니예, 일기장만 가져오면 되니 너무 신경 쓸 것 없다.”

    “아니요, 벨데메르. 난 그 저택을 2만 골드보다 싸게 살 거예요. 두고 봐요.”

    * * *

    저쪽에서 공정하지 못하게 나온다면 이쪽도 마찬가지다. 르니예는 소문을 하나 흘렸다.

    마을을 우울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 안개가 실은 라인허트 저택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소문을.

    “라인허트 경이 피골이 상접해서 거의 죽기 직전 상태였다니까, 글쎄.”

    펙을 진료한 의원이 말을 살짝 보태자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라인허트가 안개를 만들어 낸 장본인인지, 아니면 안개를 사라지게 한 영웅인지에 관한 소문은 엇갈렸다.

    하지만 라인허트 저택에서 안개가 시작되었다는 건 빠르게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도 되지 않아 부동산 업자와 르니예는 다시 마주 앉았다.

    “만 오천 골드.”

    르니예는 선심 썼다는 듯 말했다. 만 골드로 깎으려다가 양심에 찔려 오천 골드만 깎은 걸 알려나 몰라.

    “이만 골드 아래로는 안 됩니다.”

    “안 되면 말고요. 근데 그 이상한 안개 나오는 저택을 이만 골드 주고 살 사람이 있겠어요?”

    안개가 실버리안 영지에 미친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영지 사람들은 안개라면 아주 치를 떨었다.

    혹여 영지 사정 모르는 누군가 저택을 사러 온다고 해도, 영지에 들어오자마자 그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다.

    “만 오천.”

    부동산 업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머릿속은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바빴다.

    소문이 쉽게 없어지진 않을 거고, 그동안 저택을 관리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만 팔천.”

    “만 오천.”

    만 오천 골드에서 한 푼도 더 주지 않고, 르니예는 저택 열쇠를 되찾았다.

    “멋있네요, 라인허트 저택.”

    안개가 걷힌 청명한 하늘에 곧게 뻗은 첨탑 같은 지붕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벨데메르는 여기서 자랐어요?”

    “그래, 성인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벨데메르는 오랜 추억에 잠겼다. 금방 다시 올 줄 알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오게 될 줄은 그조차 몰랐다.

    “관리는 제법 잘되어 있군.”

    많은 것이 변했지만, 저택에서 지낸 추억은 새록새록 떠올랐다.

    “여깁니다, 할아버님.”

    펙은 벨데메르를 서재로 안내했다.

    “여기를 누르니까 비밀 공간이 나오더라고요.”

    “테메르가 만들었겠지. 어렸을 때부터 비밀 공간을 종종 만들곤 했다. 그래서 별명이 다람쥐이기도 했고.”

    아, 형제여. 벨데메르는 잠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너무 늦은 애도를 용서해라, 테메르.

    “이 상자 전체가 다 일기입니다.”

    “다 챙기거라.”

    “예, 주인님.”

    샤피로가 상자의 먼지를 털어냈다.

    “마차에 실어두겠습니다.”

    마차. 그 단어를 듣자 르니예는 실버리안 영지까지 오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샤피로, 또 지름길로 갈 건 아니지? 응? 큰길로 갈 거지?”

    “어제 상단을 너무 오래 비워둔 게 걱정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최대한 빨리 상단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샤피로, 그거 아니야.”

    르니예가 손까지 휘저으며 아니라고 했지만, 샤피로는 싱긋 웃기만 했다. 르니예가 괴로워하는 걸 즐기는 게 분명했다.

    “벨데메르, 이번에는 아예 마차 출발하기 전에 나를 재워 줘요. 알았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깨지 않게 해 줘요.”

    르니예는 애원하고, 벨데메르의 약속까지 받아낸 뒤에야 마차에 탔다. 그리고 펙은 생각했다.

    할머님께서 멀미가 심하신 편이구나.

    “욱!”

    아니다. 이 마차를 타면 누구라도 멀미를 하게 된다. 멀미하지 않는 벨데메르와 샤피로가 이상한 것이었다.

    “샤피로, 잠시, 마차를 세워 보, 읍!”

    벨데메르는 펙을 샤피로와 함께 마부석에 태웠다. 귀족으로 태어나 작위는 못 받아 봤어도, 마부석에 타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 따위 없었다. 멀미로 곧 죽을 것 같았기에.

    “나도 할아버님께 재워 달라고, 우윽. 하겠어.”

    “아, 너무 늦으셨습니다, 펙 님.”

    벨데메르는 르니예가 있어야 마법을 쓸 수 있다. 하지만 펙을 재워 달라고 말해 줄 르니예는 지금 꿈나라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이틀만 버티세요, 이틀 금방 가니까.”

    “아니야, 그 전에 죽을 것, 욱!”

    마부석에서 그 난리가 난 사이, 벨데메르는 마차 안에서 테메르의 일기를 읽는 중이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르니예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마차가 덜컹거려 르니예가 떨어지지 않게 한 손으로 붙들었다.

    “잘 자는군.”

    다행히 표정이 편안했다. 벨데메르는 안심하고 테메르의 일기로 시선을 돌렸다.

    [벨데메르를 보았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의 몸종도 사라졌다.

    벨데메르의 사용인들을 데려와 추궁하였지만, 그들 중 벨데메르를 죽이거나 납치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벨데메르는 어디로 떠난 것일까? 아니면 그 몸종이 벨데메르를 살해하고 도망친 것일까?]

    벨데메르가 사라진 직후 테메르는 동생을 찾아 헤맸다.

    [오늘 저택으로 신관이 방문했다. 그녀는 내게 벨데메르를 찾는 일을 그만두라고 말했다.

    벨데메르는 지금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했다. 벨데메르가 신께 불경한 죄를 저지르기라도 한 것인가?

    신관은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사람 모양을 한 커다란 인형을 가져왔다. 벨데메르가 데리고 다니던 그 몸종이었다.]

    “샤피로로군.”

    [신관은 그 인형의 다친 곳을 고쳐 주고, 새 옷을 주라고 했다.

    나는 신관이 말한 대로 했다. 손재주 좋은 조각가를 불러 상한 곳을 고치고, 재단사에게 옷을 맞추라 했다.

    신관의 말에 의하면, 그가 깨어나 벨데메르가 사라진 날에 대해 말해 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그가 온 지 삼 일째 되는 아침,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샤피로가 다시 깨어났다.”

    이상하군, 벨데메르는 중얼거렸다.

    “내가 봉인되고서 단순히 인형으로 돌아간 샤피로를, 누군가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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