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61화 (61/120)
  • 61화. 꿈의 꿈속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벨데메르.”

    벨데메르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뭐, 뭐야.”

    르니예가 누워 있던 자리에, 어느새 에드윈이 누워 있었다. 에드윈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왜 그렇게 놀랍니까.”

    가운 안으로 보이는 에드윈의 맨살에 벨데메르는 시선을 돌렸다.

    “하하, 벨데메르,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겁니까? 같이 목욕도 했으면서.”

    “내가, 네 녀석이랑?”

    “어제도 같이 목욕하지 않았습니까.”

    태연히 대꾸하며 에드윈이 가운을 벗었다. 벨데메르는 이번에는 아예 몸을 반쯤 틀어 시야를 막았다.

    “내가 너와 같이 목욕을 했을 리 없어.”

    빌어먹을 악몽. 하고 많은 악몽 중에 에드윈 라포어와 같이 목욕하는 내용일 게 무엇인가.

    “또 왜 그러십니까.”

    에드윈은 약간 지친 목소리였다.

    “우리 잘 지내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네, 벨데메르 당신이요. 부인께서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

    르니예한테 그런 약속을 했다고? 아무리 꿈이라지만 허무맹랑하군.

    “아직도 정실 남편 자리를 탐내는 겁니까.”

    “꿈속인데도 내가 정부란 말인가.”

    “그거야 벨데메르가 나와의 결투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에드윈은 어느새 옷을 다 차려입고 있었다.

    “결과에 승복한다고 직접 본인 입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잘 때 당신이 왼쪽, 내가 오른쪽에서 자기로 한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

    벨데메르는 말을 하다 멈췄다. 눈을 깜빡하는 사이, 벨데메르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운데에는 르니예가 누워 있었고 르니예의 오른쪽에는 에드윈이, 그 왼쪽에는 자신이 누워 있었다.

    벨데메르는 르니예 쪽으로 몸을 반쯤 틀고서, 르니예를 끌어안고 있었다.

    “너, 너 하지 마.”

    에드윈도 르니예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고는 르니예의 배 위에 올려진 벨데메르의 손등 위로 제 손을 올리려고 했다.

    벨데메르는 피할 수 없었다.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야 부인께서도 편안하실 겁니다.”

    “젠장, 내가 편안하지 않다고! 안 돼, 아, 안……!”

    손이 포개졌다. 벨데메르의 손등 위에 에드윈의 손이 나란히 겹쳐져 하나가 되었다.

    손등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벨데메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짧게 숨을 들이쉬다가 기절했다.

    “주인님, 주인님!”

    “……샤피로?”

    “네, 샤피로입니다. 갑자기 잠드셔서 놀랐습니다.”

    벨데메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옆으로 르니예가 잠들어 있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꿈이요?”

    “아니, 아니다.”

    벨데메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안개. 아주 오래전 그가 봉인했던 것이 풀려났다.

    “당장 문을 닫으러 가야겠다.”

    그딴 거지 같은 꿈을 꾸게 하다니. 벨데메르는 치를 떨었다.

    “르니예 님은 어쩌시고요?”

    “일단 깨워야겠군. 여기 두고 갈 수는 없으니. 라인허트 저택에 르니예를 맡기고 문까지는 너랑 나만 간다.”

    * * *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이 있다. 벨데메르에게는 오늘이 그랬다.

    “이건 팔렸다는 표신데요.”

    저택 앞에 부동산 소유를 알리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이 미친.”

    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험한 말을 내뱉을 뻔했다. 유서 깊은 저택이었다. 라인허트 가문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집이었다.

    그런데 그 망할 후손이 저택을 홀랑 팔아 버린 것이다.

    “죽이겠다.”

    “그러면 가문의 대가 끊깁니다, 주인님.”

    “그래요, 벨데메르. 잠깐 방황하는 중일지 몰라요.”

    저택은 다시 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후손은 한번 죽이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대는 다시 여인숙으로 가 있는 게 좋겠어.”

    “벨데메르랑 샤피로는 어디 가는데요?”

    “문을 닫으러 갈 것이다. 그대는 위험해.”

    시야를 가리는 안개를 애써 무시하며 르니예가 벨데메르에게 바짝 붙었다.

    “무슨 문인데요? 이 안개랑 관련 있는 거예요?”

    “이 안개가 갇혀 있던 문이다.”

    “자연적으로 생긴 안개가 아닌 것 같긴 했는데, 정말 아니었네요.”

    수백 년 전, 실버리안 영지가 라인허트 가문의 영토이고, 고대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때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실수로 몽마를 소환했지.”

    꿈을 꾸게 하고 정기를 빼앗아가는 몽마는 종종 출몰했다. 그러나 이놈은 달랐다.

    “이 안개가 몽마 그 자체입니다. 햇빛을 가려 어둡게 만드니, 사람들은 더욱 잠들었죠. 어떤 사람들은 반쯤 잠든 상태로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반가사 상태로 악몽을 꾸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크고 작은 사고가 이어졌다. 그 두려움과 핏방울을 먹고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잠시 집을 떠나있던 벨데메르는 몽마를 봉인하기 위해 돌아왔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몽마는 지하실 안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풀어놨군요. 누굴까요?”

    “귀하디귀한 내 후손님이시지.”

    범인은 찾을 것도 없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라인허트의 피로만 봉인을 풀 수 있다.”

    그러니 이 사태에 라인허트 가문의 후계는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 그대는 여인숙으로 돌아가 있도록. 샤피로가 데려다줄 것이다.”

    “나도 같이 갈게요. 내가 없으면 벨데메르는 마법을 못 쓰잖아요.”

    “……그렇군.”

    또 그 생각을 잊고 있었다. 결국 르니예는 벨데메르와 동행했다. 르니예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는 않지만, 이 안개를 걷어내려면 방법이 없었다.

    “갈수록 안개가 짙어지는 것 같아요.”

    “문에 가까이 와 그렇다.”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바짝 끌어당겼다. 르니예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갈수록 서늘한 기운에 뒤통수까지 오싹했다.

    “오랜만에 오는군.”

    “여기에 봉인했어요?”

    평범한 건물이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건물.

    “자물쇠가 열려 있습니다.”

    샤피로가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 들어가서 못 나왔거나, 허겁지겁 도망쳤나 보군.”

    벨데메르는 혀를 찼다.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와. 절대 잠들면 안 돼, 르니예.”

    르니예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로브 자락을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시금털털한 향에 르니예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근데 왜 이런 건물에 봉인했어요?”

    “그놈이 넘어오는 입구가 이 지하에 있다.”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따라 지하실로 들어갔다. 갈수록 어두워지고, 공기는 탁해졌다. 르니예는 조심조심 걸었다.

    “주인님, 문이 다 열려 있지 않습니다.”

    “봉인을 완전히 풀지 못했군. 놈도 많이 약해졌고. 문을 닫아라, 샤피로.”

    샤피로가 육중한 문을 닫았다. 그런데도 문틈 사이로 안개가 계속 흘러나왔다.

    “이제 비켜라. 봉인할 테니.”

    “남은 안개는 이대로 놔두실 겁니까?”

    “문이 닫히면 놈은 힘을 쓰지 못할 거다. 알아서 소멸하겠지.”

    갇혀 있는 동안, 안개는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봉인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의 힘이었다. 아무리 강한 것도 시간이 흐르면 시들기 마련이었으므로.

    “르니예, 저쪽으로 가 있도록.”

    그는 르니예를 벽 쪽으로 가 있게 했다.

    “벨데메르, 그 문을 닫아 주세요. 아주 꼭꼭.”

    르니예는 그가 마법을 쓸 수 있도록 소원을 빌었다. 르니예의 목소리에 벨데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샤피로가 문을 잡고, 벨데메르는 주문을 읊었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반쯤 열린 문으로 안개가 빨려 들어갔다. 르니예는 바람을 피해 뒷걸음질 쳤다.

    “으으, 어.”

    “……어?”

    벽에 등을 붙이고 선 순간, 르니예는 발목으로 와 닿는 미적지근한 감촉에 얼어 버렸다.

    르니예의 시선이 삐거덕거리며 자신의 발목으로 내려갔다.

    “어머, 손이네.”

    가죽만 간신히 붙어 있는 손이 르니예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발목에서부터 소름이 끼치고, 온몸의 솜털이 서고, 르니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까지 약 삼 초가 걸렸다.

    “꺄악!”

    르니예는 비명을 지르며 발목을 마구 털었다.

    “꺅!”

    그리고 꿈틀 움직이는 손목을 발로 퍽퍽 밟았다. 무자비한 발길질이었다. 무언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거 놔, 악!”

    이미 놓았다. 손목은 르니예의 발목을 놓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르니예는 멈추지 않았다.

    “르니예, 무슨 일이야?”

    “뭐가 내 발목을 잡았어요. 그 몽마인가 봐요!”

    벨데메르의 품으로 숨으러 가는 와중에도 르니예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요, 르니예 님. 사람 같은데요.”

    샤피로는 르니예가 열심히 발길질하던 곳으로 향했다. 얼추 걷히는 안개 속에서 쓰러져 있는 사람이 보였다.

    “해골 아냐?”

    여전히 겁에 질린 목소리로 르니예가 물었다.

    “피 흘리는 해골도 있습니까?”

    피골이 상접해 해골이나 마찬가지의 모습을 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곧 해골이 될 것 같긴 하군요.”

    누구 덕분에. 샤피로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샤피로는 르니예를 올려다보았다.

    “……그거 몇 대 맞았다고 죽었겠어?”

    “괜찮아, 르니예. 저 문 잠깐 다시 열고 넣으면 아무도 모를 거다.”

    “아니야, 죽인 거 아니에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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