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59화 (59/120)
  • 59화. 범인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세상에.”

    “어머나.”

    르니예를 뒤따라온 에니도 남사스러운 장면에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렸다.

    “저거를, 저렇게…….”

    르니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벨데메르의 조각은 창문 옆 협탁에 놓여 있었다. 고급스러운 받침대 위에 유리돔을 쓰고서.

    그 옆으로 새빨간 장미 꽃잎이 흩뿌려져 있었고, 창문을 통해 햇살이 한 줄기 비쳤다. 쓸데없이 성스러웠고 매우 남사스러웠다.

    “라, 라포어 부인.”

    저도 잘못을 아는지 클로젯 부티크의 사장 클로에는 파리한 얼굴로 일어났다.

    “다, 다시 돌려놓으려고 했어요. 제발 영주님께 고발하지 말아 주세요, 네?”

    “고발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설명은 좀 들어야겠는데.”

    무척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조각을 보니 화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정말 아기 때문에 그랬어요?”

    클로에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오랜 꿈이었어요. 단란한 가족을 만드는 거요.”

    담담한 목소리에 숨겨지지 않는 슬픔이 깔렸다.

    “그게 불가능한 걸 알았을 때 죽고 싶더군요.”

    실제로 그녀는 죽음을 택했다. 그러나 죽기도 쉽지 않았다. 그녀는 살아남았고, 죽음보다 짙은 슬픔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남편이 어디서 소문을 듣고 저걸 떼 온 거예요.”

    “근데 왜 창가에 놔뒀어요?”

    설명하려던 클로에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그, 저 조각이 달빛을 받고 있는 동안 아이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던데…….”

    대체 그런 뜬소문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달빛을 받는 동안 아이 만들기를 시도했다.

    방 분위기가 후끈 뜨거워졌다. 르니예도 괜히 큼큼 목을 다듬고, 에니는 못 들은 척을 했다.

    “아무튼 그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있어요.”

    “혹시 찬 바람을 맞으며 하는 거라면 감기만 걸리고,”

    “아니, 그거 아니에요.”

    르니예는 황급히 클로에의 말을 잘랐다. 찬 바람을 맞으며 하다니, 대체 뭘? 르니예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저건 가져갈게요. 그리고 오늘 자정에 조각상 앞으로 나오세요.”

    “네?”

    “아무도 몰래, 클로에 혼자 나와야 해요. 안 나오면 이거 확 영주님한테 일러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요.”

    르니예는 받침대에 유리돔까지 닫은 채 야무지게 벨데메르의 조각을 챙겼다. 그것을 품 안에 안고 나오는 르니예의 뒷모습이 의기양양했다.

    “에니, 덕분에 빨리 찾았어. 역시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니까.”

    “그럼 한 말씀 드려도 돼요?”

    환희로 가득 찬 르니예의 표정에 물음표가 떴다.

    “소원이 이뤄지기 전까지 어쩔 수 없으니 즐기겠다고 하셨던 거 기억하세요?”

    “응, 기억하지.”

    “그런데 왜 제 눈에는 작은 마님께서 단순히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에니는 최선을 다해서 벨데메르의 조각을 찾았다. 벨데메르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예전의 르니예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했다. 에드윈과 이혼을 결정하면서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애정을 쏟는 상대가 에드윈에서 벨데메르로 변한 수준이었다.

    “제인은 마크랑 이혼하기로 했대요.”

    갑자기 제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같은 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소원이 작은 마님을 또 슬프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에요.”

    “알지.”

    르니예는 애써 웃었다. 그래, 에니의 말이 맞았다.

    이 소원이 또 저를 비참하게 만들도록 놔두어서는 안 되었다. 벨데메르를 향해 기울어지는 마음에 자꾸만 그것을 까먹었다.

    “예전처럼 그럴 일 없을 거야.”

    에니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좋은 끝. 르니예는 벨데메르와 예쁜 안녕을 하고 싶었다. 가끔 이때를 추억할 때 웃을 수 있도록, 그렇게.

    어쩌다가 얼굴을 보게 되어도 안부를 물을 수 있게, 그렇게.

    * * *

    자정.

    클로에는 잠옷 위에 로브를 걸쳐 입고 잠이 든 남편 몰래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광장으로 나가 저를 기다리는 르니예를 만났다.

    “정말 소원을 이뤄 주는 거예요?”

    “네, 그렇다니까요.”

    르니예는 클로에의 손바닥 위에 블러디 사파이어를 올렸다.

    “자, 가서 그 간절한 소원을 빌어 봐요.”

    클로에는 조심스레 벨데메르의 조각상 앞으로 다가갔다.

    “건강한 아이가 생기게 해 주세요.”

    “네 소원은 이뤄졌다.”

    달빛 어스름처럼 깔리는 목소리에 클로에는 가쁜 숨을 뱉어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다.”

    앞뒤 설명은 없었지만, 클로에는 이해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 거사를 치르라는 뜻임을.

    “크흠, 얼른 들어가 봐요, 클로에.”

    민망함에 헛기침하며 르니예는 클로에의 등을 떠밀었다.

    “저기.”

    집으로 돌아가려던 클로에가 르니예를 바짝 끌어당기고 속삭였다.

    “점원에게 들었는데, 그제 라포어 경께서 상점에 방문하셨다더군요.”

    “에드윈이요?”

    “네, 하인도 없이 혼자서요. 평소에 부인께서 사 가시던 옷과는 다른 걸 사 가셨어요. 검은 옷들요.”

    에드윈이 혼자 상점에 가서 검은 옷을 샀다?

    “어디 장례식이라도 가시나 싶었는데 그런 자리에 입고 갈 수는 없는 옷이고, 또 라포어 부인 없이 혼자 오신 게 조금 마음에 걸리네요.”

    한 마디로 혼자 옷을 사러 왔다는 게 수상하다는 뜻이었다. 클로에는 아마도 에드윈이 바람을 피우러 다니는 것이 아니냐, 돌려 말한 것이었다.

    부인의 눈을 속이는 남편들이 종종 쓰는 수법이었으니 그런 의심을 할 법도 했다.

    “고마워요, 클로에.”

    하지만 에드윈은 그 목적이 아닐 가능성이 더 컸다. 프리야랑 몰래 데이트를 나가려는 것이었으면 바딜을 시켰겠지.

    그런데 혼자 왔다는 건, 그 옷을 입고 할 일이 바딜에게도 비밀인 중요한 일인 것이다. 거기에 심지어 격식 있는 옷이 아니었다. 이거 뭐, 전문적으로 누구 뒤를 밟는 사람 같잖아. 설마, 그런가?

    “얼른 들어가 봐요.”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르니예는 어서 가라며 클로에의 등을 떠밀었다.

    “주인님.”

    클로에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슬아슬한 시간 차를 두고 조각상이 갈라지며 벨데메르가 나왔다. 샤피로는 빠른 몸놀림으로 그의 어깨에 로브를 걸쳤다.

    “하.”

    벨데메르는 로브를 제대로 입으며 기가 차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기운이 넘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활력이 솟구쳤다.

    “봉인의 끝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소원을 하나하나 이룰수록 잊고 있던 감각들이 돌아왔다. 피가 펄펄 끓었다. 벨데메르는 떨어진 머리카락 조각 하나를 주웠다.

    “그저 평범한 대리석일 뿐인데, 신기하군.”

    샤피로를 시켜 자신의 조각을 약간 가져오게 시켰었다. 연구 결과 그의 조각상은 평범한 대리석이었다.

    “신이 직접 만든 조각상이니 인간 따위는 비법을 알 수 없다는 건가.”

    벨데메르는 조각을 툭 던졌다. 예전처럼 분노가 차오르지 않았다. 다만, 진심으로 궁금했다.

    대체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저주인지, 저주가 아니라면 그저 단순한 시련인지, 시험인지.

    “그게 무엇이든 끝이 다가오고 있어. 느껴진다.”

    벨데메르의 목소리가 확신에 찼다. 르니예의 눈빛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래, 끝이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깔끔하고 무탈한 안녕을 하기 위해서 두 발로 서 있어야 할 것이다.

    벨데메르에게 기댄 채, 그에게 손을 흔들어 줄 수는 없을 테니까.

    * * *

    “작은 마님이 어디 가셨는지가 왜 궁금한데.”

    에니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르니예가 프리야를 내보내지 않고 둔 이유를 안다. 알지만 프리야가 얄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궁금할 수도 있지, 왜 짜증을 내고 그래.”

    프리야가 사근사근 말했다.

    “우리 한배를 탄 사이잖아.”

    햇살처럼 웃는 미소가 상당히 꼴 보기 싫었다. 에드윈에게 마음이 멀어지면서, 르니예는 프리야를 미워하던 마음에서도 멀어졌다.

    르니예는 그게 가능했다. 에드윈이 살아 있는 시체가 된 후부터 다시 소원을 빌러 돌아가기까지 르니예에게는 한 달이란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니는 아니었다. 에니는 여전히 프리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 수상한 행동까지 하니,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작은 마님은 몰라도 나는 너 안 믿어.”

    “안 궁금했지만 말해 줘서 고마워.”

    착한 척 조곤조곤한 말투도 듣기 싫었다.

    “별걸 다 고마워하네.”

    에니가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그럼 저 빨래 좀 널어. 메리 아주머니 허리 아파서 빨래 못 너니까.”

    갓 빨아 물을 잔뜩 머금은 이불이 빨래 바구니 안에 가득했다.

    “일거리도 주고, 고맙지?”

    에니는 프리야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빨래를 널러 다시 나온 메리를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

    “내가 그것만 찾으면,”

    “뭘 찾아야 하는데?”

    “아, 깜짝이야!”

    빨래집게를 앞치마 안에 주섬주섬 넣던 프리야는 놀라 넘어질 뻔했다.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심장은 그리 쉽게 떨어지지 않아, 프리야.”

    “방금 떨어질 뻔했거든?”

    프리야는 바딜을 밀치고 빨래 바구니를 들었다.

    “줘, 내가 들게.”

    바딜은 프리야의 눈치를 보며 빨래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작은 마님 어디 갔는지 왜 물어서 괜히 일거리만 얻어.”

    “그래야 작은 주인님이 나를 밖으로 안 내보내실 거 아니야.”

    프리야는 빨랫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작은 주인님한테 못 들었어? 내가 작은 마님 정보 캐서 알려 드리기로 했잖아. 그 대가로 상단에서 지내는 거고.”

    바딜은 금시초문이었다.

    “우리 도련님이 너한테 그런 일을 시키셨어?”

    “왜, 너희 도련님은 그런 일 안 시킬 사람 같아?”

    저 올곧은 믿음이란. 바딜이 멍청한 건지 아니면 믿음이 바딜을 멍청하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

    “수도로 올라갈 기회가 코앞인데 나 같은 천것 안위를 신경이나 쓸 것 같아?”

    프리야는 복잡한 표정의 바딜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구니 손잡이를 든 그의 손등을 겹쳐 잡았다.

    “난 이용당해도 괜찮아. 작은 주인님이 그걸로 출세할 수 있으시다면 영광이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속삭이며 프리야가 바딜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었다.

    “그 기회가 정확히 뭔지 안다면, 더 쓸모 있는 정보를 제공해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난 상단에 더 오래 남아 있을 수 있고, 우리도 더 오래 볼 수 있잖아. 안 그래, 바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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