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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57화 (57/120)
  • 57화. xx 실종사건

    “그대를 마중 나온 거지.”

    “벨데메르?”

    르니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나를 마중 나온 거예요?”

    “그래, 저번에도 영주 성에 갔다가 납치를 당하지 않았나.”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손을 도로 르니예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마차는 빠르게 영주 성을 빠져나왔다.

    “저기, 벨데메르, 그런데…….”

    에드윈이 아직 안 탔다. 벨데메르 앞에서 에드윈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던 르니예는 말을 얼버무리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자가 아직 안 탔지. 나도 안다.”

    벨데메르는 더욱 빨리 달리라는 듯 마차 벽을 두드렸다.

    “두 다리 멀쩡하니 걸어가라고 하지.”

    그 농담 아닌 농담에 르니예는 결국 웃어 버렸다. 그래, 영주 성에서 상단까지 엄청 멀지도 않은데 걸어가라지.

    “하지만 그대는 앞으로 마차를 탈 때 주의를 좀 더 기울일 필요가 있겠어.”

    아무리 밖이 깜깜하다지만, 샤피로가 모자로 금발을 감춘 것만으로 속아서 마차에 타다니.

    이러니 얼마나 납치하기가 쉬운가.

    “오늘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요.”

    영주는 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에드윈은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그리고 상단 내부 소식을 전해 주는 영주의 세작은 누구인지.

    르니예는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자가 이혼을 해 주지 않겠다고 버티는 건가?”

    “네.”

    부티크에서도 그래 보였다.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정부인 것을 알면서도 태연히 옷을 양보했다.

    통성명을 제안하고, 악수를 건넸다. 그러면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에드윈은 우위를 점한 채 내려올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나서 볼까 한다.”

    “벨데메르가요?”

    “그래, 이혼을 너무 그대에게만 맡겨 두었어.”

    안온했다. 정략결혼이라는 르니예의 말을 듣고 이혼에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 믿었다. 르니예 역시 이혼이 이리 험난할 줄 몰랐겠지.

    “에드윈은 다른 목적이 있어요. 나를 좋아해서 이혼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에요.”

    “알아.”

    에드윈을 부티크에서 마주쳤을 때, 좋은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도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야.”

    에드윈이 내내 남편으로 붙어 있는 것이 꼴 보기 싫었다. 그는 남편 자격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남편이고 기사였다면, 르니예 혼자 마차를 기다리게 하지는 말았어야 한다.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말고, 이번 여행은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지.”

    “그런데 후손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해요?”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네 조상이니 내 말을 들어라’ 하면 잘도 듣겠다.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더군. 그러니 잠시 방황하는 중이겠지. 가서 잘 타이르면 알아들을 것이다. 그 녀석에게도 라인허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금방 정신 차리겠지.”

    벨데메르가 다정하게 눈을 맞춰 왔다. 왜 눈을 저렇게 다정하게 떠?

    르니예는 마차 안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다정한 눈빛에 피어오르는 복잡한 속내는 이 어둠이 아니라면 숨기지 못했을 테니까.

    “떠날 채비는 다 되었다. 내일은 피곤할 테니, 내일모레쯤 출발하려고 하는데 괜찮나?”

    르니예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원이 완전히 이뤄지기 전까지 시간은 많았다. 그러니 여행 정도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자, 했다.

    하지만 르니예는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 * *

    광장에 있는 조각상이 아이를 점지해 준다.

    그 소문의 시작은 마을 외곽에 사는 한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광장에 있는 조각상에서 어떤 특별함을 느꼈다.

    신이 보호하고 있는 듯한 성스러움 같은 것이 조각상에서 막 줄줄 흘렀다. 해서 그 여인은 뭇사람들처럼 소원을 빌었다.

    “건강한 아이를 갖게 해 주세요. 어지간하면 한 번에 키우게 쌍둥이로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로, 그 여인은 쌍둥이를 가졌다.

    “그 조각상이 내 소원을 들어줬다니까.”

    “조각상이? 그 광장에 서 있는 그거가?”

    그 여인이 낸 소문은 영지 외곽에서부터 서서히 퍼졌다. 조각상이 소원을 이뤄 준다. 신빙성은 그다지 없었고, 근거도 빈약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체이스도 이 소문을 믿고 소원을 빌러 왔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지나가는 길이니, 소원 한번 빌어 볼까 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까지는 그랬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리아와 로이드 사이에 아기가 생겼다. 그들은 벨데메르가 아니면 아이를 가지지 못했을 거라 여겼다.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는 그들은 꽃을 사다 벨데메르 발치에 내려놓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다음으로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빈 부부가 왔다.

    “아이가 생겼어요, 조각상님.”

    여자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남자는 벨데메르의 발치에 꽃을 놓으며 그 발등에 묻은 먼지까지 싹싹 닦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문이 약간 변형되었다.

    “저 조각상이 아이를 갖게 해 준대.”

    소원의 범위가 한층 좁아져 버린 것이다. 거기까지는, 큰 문제라고 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오래 산 나무에도 소원을 빌지 않나.

    그러나 소문이 왜곡되어 퍼졌고, 아이가 간절한 사람은 꽤 대담한 짓을 할 수 있다는 건 문제가 됐다.

    “오늘도 잘 있네.”

    “오늘은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네요.”

    라인허트 저택을 방문하러 영지를 떠나기로 한 날, 르니예는 에니와 함께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중이었다.

    벨데메르를 보러 가는 길이면서도, 르니예는 광장 중앙에 서 있는 벨데메르 조각상을 꼭 지나쳐 갔다.

    그렇게 몇 걸음 지나쳐 가던 르니예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멈췄다.

    “저, 저게 왜 저래?”

    르니예는 짐 가방을 떨어뜨리는 것도 모르고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세상에, 벨, 벨……!”

    르니예는 처참하게, 한 군데만 부서진 조각상 앞에서 넋을 놓고야 말았다. 벨데메르 조각상의 남근이 사라졌다.

    “이로써 하나는 확실해졌군. 조각상이 부서져도 내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

    “그렇다면 실력 있는 조각가를 찾아 복구를 맡기겠습니다.”

    “이상 없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봉인이 풀리고 나면 어차피 부숴 버리려고 했으니.”

    샤피로와 벨데메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벨데메르는 조각상을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조각상은 그저 그를 닮은 감옥일 뿐이었다. 그러나 르니예는 달랐다.

    “그럼 이제 출발하지.”

    “예, 주인님.”

    “잠시만요.”

    그런 그들을 에니가 나지막이 불렀다.

    “우리 작은 마님은 전혀 괜찮지 않으십니다.”

    에니가 손바닥으로 르니예를 가리켰다. 르니예는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황망하게 앉아 있었다.

    “르니예,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 별일 아니니까. 황소 조각상이나 남근상에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초점 없는 눈으로 르니예는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내 몸은 멀쩡하니 아무 문제 없어.”

    벨데메르는 직접 보여 줘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걱정하고 출발을,”

    “아니요.”

    맥이 풀린 사람처럼 앉아 있던 르니예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건 별일이 아닌 게 아니에요.”

    르니예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얀 손등 위로 핏줄이 튀어나오고, 힘을 준 팔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샤피로는 살짝 뒷걸음질 쳤다.

    “르니예 님, 눈을 왜 그렇게 뜨십니까? 대체 어딜 보시는 거예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하는 목소리와 달리 르니예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이 보이는 것 같아 샤피로는 조금 무서웠다.

    “그건 그냥 조각상일 뿐이다.”

    “아니야!”

    르니예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잘 정돈한 머리가 헝클어졌다. 거기서 에니는 깨달았다.

    “지금 작은 마님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르니예가 다음에 할 일이야 뻔했으므로, 에니는 르니예의 로브 단추를 꼼꼼하게 잠갔다.

    “그걸 찾으러 가실 거죠?”

    “물론이지. 그깟 조각상이 아니니까.”

    단전에서부터 피가 끓었다. 외간 여자가 그의 남근을 가지고 있다는 상상만 하면, 정수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았다.

    “반드시 찾아오겠어. 반드시!”

    르니예는 기강 분개하여 일어섰다. 한시라도 빨리 되찾아오지 않으면, 온몸의 피가 다 증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걸 어디 가서 찾는, 르니예, 르니예?”

    벨데메르가 부르든 말든 르니예는 벌써 저택을 나가 버렸다. 펠레포네 영지를 쥐 잡듯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쾅 닫힌 문에서 느껴졌다.

    “여행은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미뤄야겠지.”

    여행 한번 가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벨데메르는 닫힌 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왜 웃으십니까?”

    “귀여워서.”

    “누구요? 르니예 님이요?”

    샤피로는 생각했다. 저의 위대한 주인과 르니예 둘 다 딱히 정상은 아니라고.

    “작은 마님, 잠깐만요, 잠깐만 서 보세요, 네?”

    에니는 무작정 걸어가는 르니예의 팔을 붙들었다. 르니예라면, 정말 마을의 모든 집을 다 뒤질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두 집 살림을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에니는 자신의 아가씨가 감옥에 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말렸다.

    “작은 마님, 지금 정말 변태 같은 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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