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55화 (55/120)
  • 55화. 한심해도 괜찮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다고요?”

    “그래, 그런 소원을 들어준 적이 있었나?”

    벨데메르는 턱을 매만지며 몇 초간 고민했다.

    “그, 그냥 어디서 들어 본 거 아닐까요?”

    “흠, 그런 것 같군.”

    르니예는 조용히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제아무리 벨데메르라도 시간을 되돌린 건 모르겠지.

    “어, 저기, 마크 왔네요.”

    시기적절하게 마크가 흙을 싣고 다가왔다. 그는 공방 마당에 수레를 세우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제인.”

    그는 공방 문을 두드리며 제인을 불렀다.

    “열려있어.”

    마크는 다시 심호흡하고 문을 열었다. 오늘이야말로 제인에게 확답을 받을 셈이었다.

    “나 잠깐 할 말이……, 손님이 계셨네.”

    마크는 물레 앞에 앉아있는 샤피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 꾸벅 가볍게 인사했다.

    “사장님은 어디 가시고 네가 가르쳐?”

    마크는 물수건에 손을 닦으며 다가오는 제인에게 물었다.

    보통 수강생을 가르치는 일은 공방 사장의 몫이었는데 오늘은 제인이 샤피로 곁에 붙어 물레질을 가르치고 있었다.

    “상점에 일손이 부족해서 그리 가셨어.”

    제인이 흐르는 물에 손을 씻는 동안 마크는 샤피로를 힐끗거렸다. 귀족인가 싶다가도, 귀족이 이런 곳에 올 리 없으니 평민일 텐데.

    차림새를 보아하니 재산깨나 모은 사람처럼 보였다. 거기에 외관도 아주 훌륭했으므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자, 여기.”

    손을 닦은 제인은 금고에서 흙값을 꺼내 건넸다.

    “저기, 제인.”

    돈을 받으며 마크가 작은 소리로 제인을 불렀다.

    “혹시 오늘 끝나고 시간 있어?”

    “일 끝나고?”

    “할 말이 있어.”

    할 말. 결혼 생활 내내 그는 제인에게 할 말이 있단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할 말이 생겼을 때는 그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였다.

    불길한 예감에 제인이 버릇처럼 입술을 깨무는데, 저쪽에서 샤피로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런.”

    “왜 그러세요?”

    “컵이 휘어졌습니다.”

    샤피로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손아귀 안에 망가진 반죽을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다시 하면 돼요.”

    제인은 곤란한 얼굴로 마크를 쳐다보았고, 마크는 가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이렇게 수평으로, 아니, 그게 아니라.”

    샤피로는 무엇이든 빨리 배우는 편이었다. 물레질쯤이야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못 하는 척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군.

    하지만 샤피로는 그 일도 해냈다. 그는 제법 서툰 척을 잘 해냈고, 결국 제인이 직접 자기 손을 잡아 자세를 교정하게 만들었다.

    내가 연기에도 재능이 있는 건가? 샤피로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말씀 실례겠지만, 손이 되게 딱딱하시네요.”

    “제인 님 손이 부드러운 거 아닐까요?”

    샤피로는 고개를 틀어 제인과 눈을 맞추었다. 샤피로와 손을 겹치고 있던 제인은 저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 샤피로 때문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제인은 황급히 시선을 물레로 돌렸다.

    “소, 손에 힘을 좀 빼시면…….”

    “이렇게요?”

    샤피로는 붉게 물든 제인의 귀를 바라보고, 고개를 들어 아직도 문간에 서 있는 마크를 쳐다보았다.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이러다 정말 작전이 성공해서 제인이 소원을 바꿀지도 모른다.

    아, 이놈의 재능이란.

    * * *

    “……제인 님?”

    제인은 소원을 바꾸지 않았다. 내 연기가 부족했던 건가? 샤피로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제인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제인은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마크가 여전히 이혼하자고 해요?”

    “그게 실은, 모르겠어요.”

    일 끝나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 제인은 나가지 않았다. 이 작전이 실패해 마크가 이혼하자고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애써 주셨는데.”

    “아니에요.”

    제인은 결국 마크를 선택했다.

    “그래도 소원을 비는 문장은 바꾸는 게 좋겠어요. 제 남편이 저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같은 걸로요.”

    ‘죽어서도’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은 참사에 가까우니까.

    “난 제인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만난 지 얼마 안 됐어도 그건 진심이에요.”

    “알아요. 그래서 저도 진심으로 감사해요.”

    제인의 손바닥 위에 블러디 사파이어를 올려 주면서 르니예가 말했다.

    “오지랖 떤 김에 한마디만 더 할게요. 인생에 두 번 오지 않을 기회를 부디 본인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데 쓰지 말아요.”

    제인에게 하는 말이면서, 르니예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소원을 빌고서 마크가 제인에게 돌아온다고 한들, 그게 소원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데 제인이 행복할까요?”

    르니예는 제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래도 마크의 마음을 돌리고 싶다면, 소원을 빌어요.”

    르니예는 제인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달빛을 받아 홀로 선 벨데메르의 조각상이 희게 빛났다.

    제인은 그 성스러운 빛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조각상의 입술 위로 피를 닮은 새빨간 보석을 올리자, 이내 어디서 들리는지 모를 목소리가 들렸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제 소원은.”

    바라고 또 바라던 소원을 말하려는데, 목구멍이 턱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제, 제 소원은요…….”

    어째서 남편의 마음을 갖게 해 달란 소리가 나오지 않는 거지? 제인은 입 안 여린 살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좋은 흙이 나오는 곳에 공방을 차리는 거예요.”

    * * *

    “……정말 잘하시네요. 원래 할 줄 아셨어요?”

    제인은 숙련된 사람처럼 물레질하는 샤피로에게 놀랐다.

    “이렇게 잘하시면서 실력을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셨어요?”

    “아닙니다. 그날 처음 배웠습니다. 이게 다 좋은 스승을 만나서죠.”

    샤피로의 눈웃음에 제인은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샤피로는 자신이 연기까지 잘한다는 사실에 뿌듯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마저도 태연히 참아냈다.

    “차 안 드세요?”

    “전 이거 마무리하고 들겠습니다.”

    제인은 주전자를 들고 르니예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좋은 흙이 나오는 곳에 위치한 공방.

    막판에 바꾼 소원으로 얻은 곳에서 제인은 소소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자기 이름으로 된 상점을 내는 것이었다.

    “드세요.”

    “주전자가 예쁘네요.”

    제인은 확실히 손재주가 좋았다.

    “감사해요. 그리고 또 감사해요.”

    “맛있는 차를 주셔서 내가 더 고맙죠.”

    르니예와 제인은 마주 보며 씩 웃었다. 비슷한 상처가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미소가 오갔다.

    “마지막에 왜 소원을 바꾼 거예요?”

    “사랑을 구걸하고 싶지 않아서요. 또 저를 비참하게 하는 소원을 빌고 싶지도 않았고요.”

    제인은 샤피로를 살짝 눈짓했다.

    “저 얼굴을 보고 나니 마크가 좀 못생겨 보이기도 했고.”

    제인의 농담에 르니예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제인이 소원을 바꾸었을 때, 르니예는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혼하는 거예요?”

    “네.”

    “괜찮은 거죠?”

    제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주 괜찮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르니예의 말이 맞았다.

    마음이 조금 아프다고 해서, 자신을 내버리는 일에 소원을 쓸 수는 없었다.

    “저 많이 한심해 보이죠?”

    저 싫다고 하는 남자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제인은 부끄러웠다.

    “네.”

    하지만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제인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근데 사람이 살다 보면 한심한 짓도 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르니예가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먼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후회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중요한 건 앞으로 한심하게 굴지 않는 거지.”

    혼잣말임이 분명한 말에도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르니예와 제인은 다시 마주 보며 웃었다.

    제인은 현명한 소원을 빌었다. 좋은 흙과 공방, 하나의 소원으로 두 가지를 야무지게 챙겨 갔다.

    그렇다면 이미 멍청한 소원을 빈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

    르니예는 뇌리를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다시 소원을 빌 때로 돌아가면, 현명한 소원을 빌 거라고 했었지. ‘제 남편이’까지 소원을 빌었을 때로 돌려보내신 건, 멍청한 소원을 현명하게 활용해 보라는 뜻이었나.

    * * *

    벨데메르는 부쩍 외모에 관심이 늘었다.

    “오늘도 멋있으십니다, 주인님.”

    “그런가.”

    샤피로의 칭찬에도 벨데메르는 감흥이 없었다. 그는 르니예의 칭찬과 감탄이 듣고 싶었다.

    예전에는 자주 흑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는데 요즘 르니예의 눈은 건조했다.

    “자주 보면 무뎌지는 법이기는 하다만.”

    르니예가 무뎌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허무하고 허전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샤피로, 나갈 채비를 해라.”

    “어디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검이 손에 맞질 않아.”

    무기상이나 대장간을 갈 것처럼 말해 놓고 막상 벨데메르가 온 곳은 부티크였다.

    “새 옷이 필요하시면 말씀을 하지 그러셨습니까, 주인님.”

    “온 김에 보는 것이다.”

    벨데메르는 부티크 안을 쓱 둘러보았다. 르니예가 사 오는 옷을 보니 짙은 색 셔츠를 선호하는 듯했다.

    그가 점원에게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 셔츠를 손으로 가리켰을 때, 동시에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었다.

    “저것으로…….”

    “저 옷을…….”

    그들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고, 반가운 듯 높아진 샤피로의 목소리가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기서 뵙는군요, 에드윈 라포어 경.”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