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헷갈린다면
나는? 나는 어떻지? 벨데메르를 좋아하나?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웃기는 일이지만 그와 입을 맞출 때마저도.
“……나 되게 쓰레기 같잖아.”
아니지, 내가 쓰레기 같은 게 아니지.
“마법사가 왜 그렇게 잘생긴 건데? 아니, 사람이 굳이 그렇게까지 잘생길 필요는 없잖아.”
벨데메르가 다가올 때마다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잘생김을 뛰어넘는 그 얼굴에 늘 정신이 흐려졌다.
“하여간 얼굴에 약해서는! 에드윈 때도 당하고 또 당할래?”
눈을 뽑아야 돼. 아냐, 그건 너무 극단적이야. 뽑지 않아도 벨데메르만큼 잘생긴 남자는 많지 않다고.
그냥 벨데메르를 만날 때만 좀 감고 있거나, 어디 허공을 쳐다보거나 해야겠다. 그러면 좀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겠지.
“그래야…… 하나?”
굳이 그를 거부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자꾸 들었다. 귀 옆에서 악마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건 네 소원이잖아, 르니예. 너는 합법적, 아니 합소원적으로 벨데메르를 소유한 거라고.
“그런데 벨데메르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어떡해?”
여기서 문제는 르니예가 본인의 마음을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벨데메르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의 마음을 받아 주는 것처럼 애매하게 굴 수는 없었다.
그거야말로 벨데메르를 기만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벨데메르를 좋아하는 건가?”
호감은 있다. 벨데메르는 멋있고, 다정하고, 또 아버지를 위해 힘을 써 주기도 했다.
“이건 고마움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야.”
그를 보면 설레는가?
“……설레지.”
특히 벨데메르가 벗고 있을 때 심장이 유독 빨리 뛰었다.
“변태냐?”
르니예는 두 뺨을 짝짝 쳤다. 변태도 이런 변태가 따로 없었다. 르니예는 정신 사납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런 르니예의 시야로 서랍장이 들어왔다. 서랍장에 살짝 끼워 놓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서랍장 안에 가짜 블러디 사파이어를 넣어두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오라기를 잘 보이지 않는 틈에 살짝 껴 두었다.
프리야가 이걸 또 훔치러 오겠어, 싶었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겠지.”
르니예는 서랍장을 열었다.
“너를 어쩌면 좋니, 프리야.”
빈 보석함을 보면서 르니예는 혀를 쯧쯧 찼다. 이제 그 행동이 너무 뻔해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가짜인지도 모르고 좋다고 훔쳐 갔겠네.”
실제 사파이어로 만들었으니 가짜 보석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소원을 들어주는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뿐.
“어차피 정보를 물어 오면 적당한 보상을 해 주기로 했으니, 그거 팔아 쓰라고 해야겠네.”
서랍이 탁 소리가 나며 닫혔다.
“어휴, 훔칠 거면 들키지나 말라고 말을 해 줘도.”
* * *
“바퀴가 두 개 달린 마차를 타고 왔어요.”
“지하실로 가 보시오.”
“하여간 지하실 엄청 좋아해.”
프리야는 투덜거리면서 가죽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거기에는 상당히 복잡한 과거를 지닌 새빨간 보석이 들어 있었다.
맨 처음 르니예는 프리야를 떠보기 위해 가짜 보석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프리야는 그 보석을 훔치러 가서 자신이 만든 가짜로 바꿔 놓고 왔다.
그리고 그것을 또 훔쳐 왔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프리야.”
“금방 가져온다고 했잖아요.”
결과적으로 르니예의 계획이 성공했다. 프리야의 손에 들어온 보석은 두 개가 모두 가짜였다. 그걸 모르는 프리야는 자신이 바꿔치기하고 가져온 보석이 진짜라고 믿었다.
“자, 여기요.”
맨 처음 훔쳐 온 보석이 진짜라고 믿으면서도 굳이 르니예의 방에 들어가, 자신이 바꿔치기해 둔 가짜를 훔쳐 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마코야데스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확인해 보세요.”
마코야데스는 가죽 주머니 안에서 보석을 꺼냈다. 그게 이번에 르니예의 방에서 훔쳐 온 가짜였다.
가짜를 가져다주고 시간을 번다. 이게 프리야의 새로운 계획이었다.
“어디 보자.”
물론 르니예의 방에서 훔치지 않고 새로 가짜를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돈이 꽤 들었고, 프리야는 돈이 없었다. 르니예가 금방 알아차리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르니예보다 마코야데스가 훨씬 무서운 사람이니까.
“이게 다야?”
“네?”
“보석 말고 다른 건 없었어?”
다른 거라면, 버려진 신전의 위치가 있는 지도를 말하는 건가? 프리야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거 뭐요?”
“보석함에 다른 게 있었을 텐데, 수첩 같은 거.”
“수첩요?”
프리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간을 좁히며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석을 훔쳐 오라면서요.”
“보석함까지 다 들고 오라고 했잖아!”
마코야데스의 언성이 높아졌다. 프리야는 흠칫하며 일단 눈을 내리깔았다.
“보석이 중요한 거 아니었어요? 보석함을 어떻게 들고나와요.”
“젠장!”
마코야데스는 성질을 못 이겨 보석을 패대기치려다, 귀한 보석임을 깨닫고 멈췄다.
“당장 가서 보석함도 들고 와.”
“보석함을 어떻게 훔쳐요, 바로 들킨다니까?”
“못하겠다는 뜻이야?”
화상으로 일그러진 마코야데스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프리야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프리야, 대답을 해야지. 못하겠다는 거냐?”
“해, 해요. 하면 되잖아요.”
프리야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여인숙을 빠져나오고서야, 프리야는 표정을 풀었다.
계획대로 됐다. 가짜 보석으로 마코야데스를 속이고, 지도를 가져다주지 않아서 시간을 벌었다.
“이제 에드윈의 꿍꿍이만 알아내면 돼.”
르니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럴 때 써먹으라고 바딜이 있는 거지.”
* * *
하르딘은 정신을 못 차리고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도박장을 들락거렸다. 금고에 둔 돈이 다 떨어져 집문서를 들고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하르딘 씨 되십니까?”
“내가 하르딘이오만.”
하르딘의 저택으로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용병단이 찾아왔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하르딘 앞에 차용증을 턱 꺼내 보였다.
“돈을 빌리셨으면 갚아야지.”
“아니, 이, 이게 말이 됩니까?”
하르딘은 갚아야 할 금액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 빌린 지 일주일 남짓 지났는데 금액은 세 배가 넘게 불어나 있었다.
“그러니까 돈을 빌릴 때 조건을 잘 읽어 보지 그러셨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돼요. 나는, 나는 못 냅니다.”
낼 수도 없었다. 이 돈을 갚으려면 집문서를 내놓아야만 했다. 그러나 집문서는 하르딘이 가진 마지막 재산이었다.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던 하르딘은 눈치를 살살 보더니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잡아.”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잡히고 말았다.
“대장, 이 아저씨 이거, 집문서 들고 튀려고 했는데요?”
가뿐하게 하르딘을 잡은 사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하르딘의 손에서 집문서를 빼냈다.
“안 돼, 안 돼, 컥.”
하르딘은 저항했지만, 무릎 뒤를 차 넘어뜨리는 힘에 속수무책이었다. 집문서는 하르딘의 손을 떠나 용병 대장의 손에 들어갔다.
“이건 집주인께 드려야지.”
그리고 문서는 순식간에 새로운 집주인에게로 넘어갔다.
“자,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뭐, 정리할 것도 없이 바로 입주하시면 되겠습니다.”
집문서를 건네받은 사람과 눈이 마주친 하르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메리?”
메리는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믿을 수 없다는 듯 저를 쳐다보는 하르딘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메리, 여보!”
“여보는 무슨.”
메리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구질구질한 전남편을 버리고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건강해진 아들과 새 인생을 살 텐데, 왜 돌아본단 말인가.
그녀에게는 돌아볼 이유가 없었다.
하르딘은 한 푼 없이 쫓겨났다. 이제 그에게는 돈도, 가족도, 아무도 없었다. 다 빼앗기고 나니 오히려 정신은 맑아졌다.
“콜론 상단 놈들이었어, 확실해.”
그날 본 용병단 놈들 어디서 봤다 했더니, 콜론 상단의 놈들이었다. 하르딘은 이제야 이 모든 것이 르니예의 농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잃을 거 없는 사람이야.”
하르딘은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의 대리석 조각상 앞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스케치를 하는 사람도 있고, 지나가며 감탄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몰랐다.
“이봐요, 이 조각상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거, 압니까? 예? 내가 소원을 빌었더니 이뤄 주더라니까?”
하르딘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목이 터지라고 비밀을 이야기해 주는데,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젠장, 이런 등신 같은 놈들.”
하르딘은 저를 피해 가는 사람을 향해 침을 퉤 뱉고 조각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 잠깐 잠이 든 그는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당신은 그때…….”
“샤피로라고 합니다.”
샤피로는 상냥하게 하르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실 곳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요정 같아서 하르딘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혹시 소원을 또 빌 수 있는 겁니까?”
하르딘의 말에 샤피로는 입매를 예쁘게 틀어 올릴 뿐, 답이 없었다.
* * *
“깔끔하게 처리했겠지?”
“예, 주인님. 아마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중일 겁니다.”
하르딘은 비밀 유지 규칙을 어겼다. 규칙을 어겼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샤피로는 하르딘을 깊은 숲 속 나무에 묶어 두었다. 피를 살짝 내 피 냄새를 풍기게 했으니 지금쯤이면 짐승들이 피 냄새를 맡았으리라.
“잘했다, 샤피로.”
“감사합니다, 주인님.”
샤피로에게 칭찬을 해 주며 벨데메르는 갑갑한 듯 셔츠 윗단추를 풀었다.
“더우십니까?”
“아니, 덥다기보다 열이 들끓는 느낌이다.”
단전에서부터 힘이 솟아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샤피로가 찬물을 가지러 간 사이, 벨데메르는 르니예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르니예를 맞이하러 일 층으로 내려갔다. 벨데메르는 그저 르니예를 위해 직접 문을 열어 주려 한 것뿐이었다.
“……아?”
“음.”
그런데 문이 뽑힐 줄은, 벨데메르는 정녕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