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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48화 (48/120)
  • 48화. 북쪽으로 가라

    메리의 남편인 하르딘이 소원을 빌기 약 이십 분 전.

    “가서 우리 루이 살려 달라고, 빌어라도 봐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여보.”

    메리는 아주 실낱같은 희망으로 하르딘의 등을 떠밀었다.

    “이거, 이거 가져가요.”

    메리는 종이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르니예가 소원 규칙이라며 적어 준 종이였다.

    “이건 저번에도 봤지 않소.”

    “아기씨한테 내가 보냈다는 증표로 보여 줘요.”

    하르딘은 규칙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규칙이 많고 세밀했다. 그것을 보며, 하르딘은 어쩌면 진짜 소원이 이뤄질지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기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다가 달빛을 받고 있는 그 환상적인 조각상과 마주한 순간, 그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이 진실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아들이 많이 아파서 메리가 직접 올 수 없었습니다. 제가 대신 소원을 빌어도 되겠습니까?”

    “음…….”

    르니예는 조금 고민했다. 메리 아주머니의 소원을 직접 들어주고 싶었는데.

    “같은 소원을 비시는 거죠? 아들의 병이 낫게 해 달라는 소원요.”

    “그럼요.”

    르니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빌든, 아들의 병이 낫기만 한다면 메리는 기뻐할 것이다.

    그래서 르니예는 하르딘에게 선뜻 블러디 사파이어를 내밀었다. 그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들을 두고 다른 소원을 빌 거라고 예상을 할까.

    “제 소원은.”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진짜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자 하르딘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피어올랐다.

    꼭 그 소원을 빌어야 할까? 루이가 아픈 것도 실은 돈이 없어 제때 치료를 못 받았기 때문인데, 돈만 있으면 낫는 거 아닌가?

    “5만 골드를 버는 겁니다.”

    부자가 될 기회가 눈앞에 있었고, 하르딘은 그 기회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뭐, 뭐요?”

    한 3초간 르니예는 상황 파악을 하느라 눈만 깜빡이고 서 있었다. 그러다 상황 파악이 된 순간, 소원을 빌지 못하게 하려고 튀어 나갔다.

    “안 돼!”

    그러나 이미 블러디 사파이어는 벨데메르의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소원을 빌었습니다.”

    “처음에 말한 소원이랑 다르잖아요!”

    하르딘은 메리가 준 쪽지를 꺼내서 다시 보고, 르니예에게 건넸다.

    “여기 어디에도, 이미 말한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르니예는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벨데메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소원은 이뤄졌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고, 벨데메르의 낮은 음성이 텅 빈 거리에 음산하게 깔렸다.

    “동화 10닢을 가지고 북쪽으로 가라.”

    하르딘은 당장 주머니를 뒤졌다. 기가 막히게 딱 10닢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각상님.”

    그대로 북쪽을 향해 달려가려는 하르딘의 앞을 르니예가 막고 섰다.

    “이러시면 루이는 어떡해요!”

    “돈만 있으면 다 되는 겁니다, 아기씨.”

    르니예가 한 마디 더 쏘아붙이려는데, 샤피로가 넌지시 르니예에게 속삭였다.

    “주인님께서 곧 나오실 겁니다.”

    르니예는 입술을 깨물고 옆으로 비켜섰다. 하르딘은 그 누구보다 잽싸게 북쪽으로 향했다.

    동화 10닢과 북쪽.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다리가 뻐근하게 아파 올 무렵 하르딘은 그 답을 찾았다.

    “뭐야, 뭘 그렇게 쳐다봅니까? 왜, 아저씨도 한판 하게?”

    도박장. 하르딘은 어느새 도박장 앞에 서 있었다.

    “돈이 별로 없는데, 그래도 상관없소?”

    “한 푼 없는 놈도 일확천금 가져가는 데가 여기야.”

    호객꾼으로 보이는 남자가 천막 입구를 걷으며 손짓했다. 하르딘은 주머니 속 동화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열 푼이나 있는 놈은 아주 부자가 되겠구만.”

    “물론입죠, 손님. 손님에게 운만 따른다면야.”

    하르딘은 허허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평생 운을 따라다녔으나, 오늘만큼은 운이 그를 따르는 날이었다.

    * * *

    “샤피로, 당장 규칙 하나 추가한다. 종이에 써서 낸 소원만 빌 수 있다고.”

    르니예는 씩씩거리다가 발치에 차이는 돌을 힘껏 걷어찼다. 묵직한 돌멩이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잠깐, 루이가 많이 아프다고 그랬는데.”

    얼마나 많이 아프면 메리 아주머니가 직접 오지 않고 남편을 보냈을까. 그 생각이 나자 르니예는 마음이 급해졌다.

    “샤피로, 벨데메르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어디 가실 겁니까?”

    “응, 갈 데가 있어.”

    르니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메리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의원을 데려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루이는 그날 밤을 넘겼다. 메리는 하르딘의 배신에 충격을 받았다. 남편을 믿었던 만큼, 메리의 배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이러다가 아주머니까지 병나는 거 아니에요?”

    사정을 들은 에니는 걱정스럽게 한마디 했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 * *

    “오늘은 못 들어올 거 같아요.”

    르니예는 요즘 바빴다.

    “하르딘, 그자 때문인가?”

    “네.”

    하르딘은 북쪽 도박장의 전설이 되었다. 그는 하룻밤에 5만 골드를 땄고, 영지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메리에게 돈 몇 푼과 이혼 서류를 보냈다. 메리가 그에게 따지러 찾아갔지만, 철통같은 경비에 문전 박대를 당했다.

    “메리 아주머니가 앓아누웠어요.”

    그 심정, 내가 잘 알지.

    르니예는 프리야와 에드윈이 손잡던 것을 처음 본 날 느꼈던 감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피가 거꾸로 솟는 그 기분.

    멀쩡한 사람도 뒷목을 잡고 쓰러지게 만드는 게 바로 배신감이었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르니예는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암살자라도 보내서 내일의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 소원을 들어준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은가?”

    “무슨 소리예요, 벨데메르.”

    르니예는 손사래를 치며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벨데메르는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잖아요. 그리고 나도 속았는데요, 뭘.”

    규칙의 허점을 찾아서, 아픈 아들을 버리고 다른 소원을 빌 줄은 꿈에도 몰랐다.

    “르니예 님, 그러지 마시고 메리 아주머니에게 다시 소원을 빌라고 하시지요. 남편이 가진 것을 전부 다 빼앗아 달라고 말입니다.”

    “아니야, 메리 아주머니는 아마 루이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빌 거야.”

    메리에게 다른 소원을 빌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복수를 하긴 해야 하는데, 영 방법이 안 떠올라.”

    하르딘이 땅을 치다 못해 눈 감는 직전까지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르니예.”

    그런 르니예를 벨데메르가 나직하게 불렀다.

    “북쪽으로 가면 뭐가 나오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라.”

    “도박장이잖아요.”

    깨달았다는 듯 르니예의 입이 벌어졌다.

    “도박장. 그래, 도박장.”

    르니예의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벌어졌다. 르니예는 팔짝 뛰어 벨데메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벨데메르는 정말 천재예요.”

    수도 없이 들은 칭찬이었다. 그러나 그 칭찬이 르니예의 입에서 나오니 조금 다르게 들렸다.

    “이제 방법을 찾았으니, 오늘 들어오는 거지?”

    “아니요.”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허리를 감싸 안기도 전에, 르니예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작업 들어가면 내일도 못 들어올 것 같은데요. 기다리지 마세요.”

    르니예는 로브 자락을 다급하게 여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를 기다리고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러고는 뭐라 해 줄 새도 없이 집을 나가 버렸다. 기다리지 않는다니. 르니예는 정녕 모르는 모양이었다.

    벨데메르의 하루는 르니예를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해, 르니예가 돌아오면 끝이 난다는 것을.

    조각상에서 나온 후부터 내내 그랬고, 요즘 들어 그 기다림의 시간이 더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르니예는 모르겠지만.

    도박으로 흥한 자, 도박으로 망할 것이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원래 도박이라는 게,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사람은 없는 법이다. 게다가 하르딘처럼 돈맛을 본 사람은 그 재미를 잊지 못해 반드시 도박장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처음으로 부자가 되었으니 이것저것 사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겠지. 도박으로 번 돈이니 거저 번 돈 같아 쓰기도 더욱 쉬울 터였다.

    하지만 결국 돈은 동이 나겠지. 5만 골드가 벌긴 어렵지만 마음먹고 쓰면 또 꽤 금방 썼다.

    재산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면 하르딘은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씀씀이를 줄이거나, 돈을 벌어서 채우거나.

    그러나 씀씀이 줄이는 일은 아주 어려웠고, 한 번 도박으로 돈 번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카드 한 장으로 일확천금을 얻는 재미와 세상에 비견할 것이 있을까.

    그러니 하르딘은 결국 다시 도박장을 찾게 될 것이다. 르니예는 딱 한 가지 계획만 세우면 되었다. 그가 도박장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어떻게 단축할 것이냐, 그 방법만 생각해 내면 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긴 남자가 오면 작업 들어가라 이거죠?”

    그 밖의 다른 것은 ‘선수’들이 해 줄 테니까. 콜론은 말했다.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이 돈을 벌어 오게 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콜론은 어떻게 돈이 돈을 벌어오게 했는가. 제일 먼저 콜론이 한 일은 도박장을 운영하는 사람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타짜를 고용, 벗겨 먹을 대상을 물색한다. 돈을 잃은 그 먹잇감이 돈을 빌린다고 말하는 순간, 콜론이 차용증을 들고 짠, 나타난다.

    ‘담보도 없이 이 금액 빌려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그러면 백에 구십은 콜론에게서 돈을 빌린다. 해가 뜨고 정신을 차린 뒤 그들은 이자가 복리에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땐 늦었다.

    “전 재산을 걸게 만들어요, 무조건.”

    “전 재산에 손가락까지 걸게 만들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작은 마님.”

    르니예는 콜론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하르딘만 도박장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들면, 이 계획은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방식이 합법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었다. 따지고 보면 사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착한 일 하겠다고 맹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의 방법이 옳지 않다고 해 놓고 아버지의 방법을 그대로 쓰는 것이 어째 모순적으로 보였다.

    “그, 이건 빼앗는 게 아니라 되찾는 거예요.”

    르니예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메리 아주머니의 소원이었다고요. 그러니 그 5만 골드도 메리 아주머니가 가져야 하잖아요. 저는 한 푼도 가지지 않을 거니까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시죠? 네?”

    르니예는 신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대답은 없었다. 침묵은 긍정인 법. 신도 허락한 착한 사기라고 르니예는 애써 합리화했다.

    “작은 마님!”

    방으로 돌아오는 르니예를 에니가 기다리고 있다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왜 그래?”

    “왔어요.”

    에니는 품 안에 안고 있던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르니예는 편지 봉투에 쓰여 있는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

    헉슬리 네이쳐드. 판사 이름이다.

    “이혼 신청에 대한 답신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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