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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47화 (47/120)
  • 47화. 하늘이 두 쪽 나도 아닌 것

    “주인님은 같이 안 오십니까?”

    “응, 갑자기 뭐가 생각났대.”

    혼자 중얼거리던 벨데메르는 아침도 사양하고 다시 책 속에 파묻혔다.

    “샤피로, 피곤하면 들어가서 좀 쉬어.”

    “피곤한 게 아닙니다.”

    충격을 받은 것이지.

    샤피로는 벨데메르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제 주인의 입술에 키스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좀 쉬어, 안색이 창백하다.”

    사역마도 안색이 창백할 수가 있나. 르니예는 정신 나간 둘을 한 집에 놔두고서 상단으로 출근했다.

    상단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월급날이다. 이날만큼은 상단이든 저택이든 활기가 넘쳐났다.

    “메리 아주머니?”

    “어유, 작은 마님.”

    누구나 활기 넘치는 날은 아닌가 보다. 뒷문으로 들어오던 르니예는 구석에서 눈물을 훔치는 메리와 마주쳤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닙니다, 일은요.”

    “아무 일도 아닌데 울었어요? 말해 봐요, 누가 괴롭혔어요?”

    메리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일 아닙니다.”

    그녀는 끝까지 사정을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결국 르니예는 에니를 불렀다.

    “메리 아주머니한테 무슨 일 있어? 울고 있던데.”

    “그게, 아들 약값이 없나 봐요. 부단주께 가불을 해 달라고 한 모양인데.”

    에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콜론의 상단에 가불은 없었다.

    “당연히 안 된다고 하셨대요. 돈이 필요하면 빌리라고 했다는데, 이자 아시잖아요.”

    르니예는 마른세수를 하며 의자에 앉았다.

    “내가 가까운 데를 잊고 있었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마리아와 로이드의 결혼식은 치러 주고, 십오 년을 함께한 메리의 사정은 까마득히 몰랐다.

    르니예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메리는 상단에서 일했다. 그녀는 이모처럼, 가끔은 엄마처럼 르니예를 살뜰히 보살폈다.

    “이래서야 착한 일 한다고 소리친 면목이 없네.”

    메리가 상단에 빚이 있다는 것도, 그 빚이 터무니없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 해결해 주려고 했는데,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잊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도와드리면 되죠. 그런데 작은 마님.”

    아무도 없는데 에니가 목소리를 낮췄다.

    “제 생각에, 조용히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소문이 나면 시끄러워질 거예요.”

    “동감이야.”

    안 그래도 부당하게 받은 이자를 어떻게 돌려줘야 하나 생각 중이었다. 한꺼번에 다 줘 버리면 상단 전체가 흔들릴 것이고 난장판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일단 메리 아주머니부터 시작해 보자고.”

    “약값을 준비할까요?”

    “그것도 해 줘야지.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잖아.”

    르니예는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메리 아주머니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지.”

    * * *

    “주인님, 뭐라도 찾아내셨습니까?”

    벨데메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상황이 저주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주인님께서 르니예 님에게 호감을 느끼는 상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바로, 그 감정이 생겨난 것 말이다.”

    봉인이 저주라고 여겼지만, 들어가고 나올 수 있으니 저주라고 보기 어려웠다. 신이 그런 허술한 저주를 내렸을 리 없으니까.

    그러니 이것이 저주가 아닐까 의심했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 속으로 빠트리려는 교묘한 술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게 저주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더군.”

    하루 종일 고서를 읽으며 깨달은 한 가지는, 저를 좋아하는 상대방을 좋아하게 하는 저주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를 좋아하게 만들어야 저주가 아니겠느냐.”

    “하긴, 그렇습니다. 르니예 님은 주인님을 워낙 좋아하시니까요.”

    그리하여 벨데메르는 다시 시름에 빠졌다. 그리고 여기 시름이 빠진 사역마가 또 있었으니, 바로 샤피로였다.

    샤피로는 벨데메르를 위하여 무엇이든 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어젯밤, 입맞춤만큼은 할 수가 없었고, 샤피로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까짓 입술 한 번, 내어 드릴 수도 있지 않았나.

    “주인님.”

    목소리를 깔며 벨데메르를 불렀다.

    “잠깐, 샤피로.”

    벨데메르는 어쩐지 샤피로가 하려는 말이 짐작이 갔다.

    “혹시 어제 그 일을 이야기하려는 거라면…….”

    말을 하다 말고 벨데메르는 다시금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주인님이 원하시면 다시 해 보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벨데메르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아니, 너는 증명했다. 너의 충성을 의심하지 않아. 다만,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뿐이다.”

    어젯밤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끔찍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하지만…….”

    “샤피로, 어제 그 순간을 다시 기억해 보아라.”

    말을 꺼낸 순간 벨데메르는 깨달았다. 자신이 실수했음을. 어제 그 순간을 다시 기억해 보라는 말을 꺼내는 동시에, 어제 그 순간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 내가 실수했다. 떠올리지 마.”

    “이미 떠올려 버렸습니다, 주인님.”

    샤피로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충성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샤피로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괴로움에 떨었다.

    벨데메르는 책상에 팔을 짚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심호흡을 했다.

    “벨데메르, 샤피로, 왜 일 층에 아무도 없……, 둘이 왜 그래요?”

    르니예는 일 층에 아무도 없자 바로 올라왔다가, 샤피로와 벨데메르가 각기 떨어져 괴로워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무슨 일 있어요?”

    일단 외관상 보이는 상처는 없었으므로, 르니예는 차분히 벨데메르에게 다가갔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또? 대체 무슨 연구를 하는 거예요?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르니예의 하얀 손이 벨데메르의 어깨에 다정히 올라왔다.

    “괜찮아요, 벨데메르? 물이라도 가져다줄까요?”

    허리를 숙이고 있던 벨데메르는 고개만 틀어 르니예를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 늪에 빠진 듯 온몸을 휘감은 불쾌함이 순간 사라졌다.

    르니예로부터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고,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다.”

    벨데메르는 천천히 일어섰다. 르니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여린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는 대신 르니예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아무 일 없어.”

    이제 인정해야만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별것도 아닌 행동으로 인정하게 될 줄은 몰랐으나, 그런 평범한 순간이라서 더 확실한 것일지도 몰랐다.

    벨데메르의 시간은 르니예가 나타난 그때부터 흐르기 시작했음을, 그는 이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 * *

    르니예는 15년으로 기억하지만, 메리가 콜론의 상단에 들어온 건 17년 전의 일이었다.

    아이를 낳고 생활이 어려워 빌린 적은 돈이 삽시간에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집까지 날릴 정도로 불어났다.

    메리는 한창 제 치마폭에 안기는 아들을 떼놓고 콜론의 상단에 빚을 갚으러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서 엄마를 잃은 어린 르니예를 만났다.

    “아기씨가 어렸을 때부터 심성은 고왔어요.”

    메리는 아직도 아기씨란 호칭이 익숙했다. 결혼까지 했지만 르니예가 아직도 아기로 보이는 탓이었다.

    “그런 아기씨가 언제 다 커서…….”

    메리는 눈물을 훔쳤다. 르니예가 메리를 잘 따라 준 덕에, 메리는 콜론에게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르니예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정말 빚을 없애 주신다고 했소?”

    “그렇다니까요. 거기에 소원까지 들어주신다는데.”

    도움의 손을 내미는 동시에 르니예는 약간 뜻밖의 제안을 했다.

    “소원? 등불에 소원을 빌고 날리는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

    처음 르니예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메리도 그 비슷한 것을 떠올렸다.

    “아니에요. 조각상에 소원을 비는 거라고 하시던데요.”

    “조각상에? 뭐, 아무튼 감사한 일이니, 아기씨가 하자는 대로 합시다.”

    그들 부부는 르니예가 무릎이라도 꿇으라고 하면, 그 앞에 이마까지 조아릴 수도 있었다.

    빚도 사라지고 아픈 아들의 병원비도 대준다는데, 무슨 짓이든 못 하랴.

    “그래서 무슨 소원을 빌 거요, 메리?”

    “당연히 우리 루이의 병이 낫게 해 달라고 빌어야죠.”

    루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그러더니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거의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내가 얼른 가야 엄마 아빠가 고생 안 하는데.’

    루이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아픈 것도 싫었지만, 부모님이 저로 인해 고생하는 것도 싫었다.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어서 빨리 죽어 부모님을 이 고생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었다.

    야속하게도 신은 그의 소원을 전혀 들어주고 있지 않았지만, 그건 아마도 메리가 루이를 너무 일찍 데려가지 말라고 간절히 빌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 엄마, 엄마!”

    “그래, 엄마 여기 있다, 엄마 여기 있어.”

    그런데 소원을 빌기로 한 날, 루이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다.

    루이는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에 대고 필사적으로 엄마를 찾았고, 메리는 차마 그런 아들을 두고 나갈 수가 없었다.

    “나도 옆에 있겠소.”

    “아니에요, 당신은 가서 소원을 빌어 봐요.”

    메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가서 우리 루이 살려 달라고 빌어 봐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여보.”

    결국 메리의 남편은 메리 대신 소원을 빌러 왔다.

    “그렇게 됐습니다, 아기씨.”

    “하는 수 없죠. 아저씨가 대신 소원을 비세요. 소원에 관해서 아주머니한테 들으셨죠?”

    “예, 물론입니다.”

    그는 르니예에게 블러디 사파이어를 받아 벨데메르의 조각상 앞에 섰다.

    “제 소원은.”

    당연히 아들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거겠지, 르니예는 예상했다.

    “5만 골드를 버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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