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44화 (44/120)
  • 44화. 시간이 흐르던 순간

    “이제 이런 거 하지 마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름답고 좋은 것만 만져야 할 손으로 남의 시중을 들고 있다니. 이제 더는 그런 모습 볼 수가 없습니다.”

    샤피로는 당황했다. 르니예도 당황했다. 벨데메르는, 황당했다. 더는 이런 황당한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저기, 제가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서 그러는데요, 세사르 경.”

    르니예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세사르 경께서 마음에 품은 사람이 여기가 아니고, 여기란 말이에요?”

    첫 번째 여기란 벨데메르를 가리킨 것이고, 두 번째 여기란 샤피로를 뜻한 것이었다.

    “예, 샤피로에게 보낸 것입니다.”

    “저, 저란 말입니까?”

    샤피로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손가락으로 저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 달리 누구겠습니까, 샤피로.”

    세사르는 황홀하다는 눈빛으로 샤피로를 바라보았다.

    “제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샤피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세사르 님께서는, 몇 살이십니까?”

    *

    세사르 패러히트.

    올해 나이 열일곱. 패러히트 가문의 후계자로, 가문의 조기 교육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 이른 나이에 기사 서품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모두 그를 천재라며 치켜세워 주기 바빴다. 그러나 막상 세사르 본인은 심드렁했다.

    하라니까 했을 뿐이다. 가문에 누를 끼치면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했을 뿐이었다. 그게 적성에 맞았는지 어쨌는지 남들보다 잘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냥 그뿐인 인생이었다. 이것도 그냥저냥, 저것도 그저 그런 지루한 나날이었다. 어찌나 지겨운지 세사르는 시간이 멈춰 있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아, 공작님의 손님이십니다.’

    그리고 어느 날, 공작저의 뒤뜰에서 공작을 기다리는 샤피로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세사르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저분은 누구십니까?’

    ‘내가 해 줬던 이야기 기억하느냐? 우리 가문에 은인이 한 분 계시다고.’

    ‘오래전에 가문을 크게 도와주셨다는 분 말입니까?’

    ‘그래, 아까 온 사람은 그분의 시종이다.’

    그리 아름다운 이를 곁에 둔 그분께서는 얼마나 행복하실까.

    세사르는 샤피로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그 어떤 것도 흔들지 못했던 세사르의 마음을 샤피로가 흔들어 버린 것이다.

    ‘입맛이 없어도 먹어 보거라, 세사르.’

    ‘삼킬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문제는 샤피로를 다시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세사르는 식음을 전폐하고 하루하루 말라 갔다.

    ‘도련님, 이러다가 돌아가세요.’

    ‘더는 살 이유가 없어, 폴.’

    세사르의 몸종인 폴은 차마 자기 도련님이 상사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어린 몸종 특유의 장기를 발휘했다. 순진한 척 캐묻고, 몰래 엿듣는 것 말이다.

    ‘도련님, 제가 그분이 어디 사는지 알아낸 것 같아요.’

    ‘알아낸 거야, 알아낸 것 같은 거야? 아니, 상관없어. 어딘지만 말해,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겠어.’

    ‘그분이 가고 나서, 공작님께서 펠레포네 영주에게 서신을 보내셨다고 하던데요. 뭘 부탁하는 서신이었대요.’

    펠레포네 영지라. 수도에서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바다가 보고 싶어요. 바다를 보면 싹 나을 것 같아요.’

    ‘바다? 그래, 그러도록 해라. 쿤테 영지에 있는 별장에 미리 연락을 넣어두라 하지.’

    ‘아니요, 쿤테 영지의 바다 말고 펠레포네 영지의 바다가 보고 싶어요.’

    반드시 펠레포네 영지여야 한다고 세사르를 빡빡 우겼다. 공작은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아들의 부탁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펠레포네 영지에 아주 먼 친척이 산다는 것을 알고는 세사르를 그리 보냈다.

    ‘어서 오세요, 소공작.’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스테이니 부인.’

    ‘무슨 그런 말을요. 늙은이 둘이 적적한데 활기 넘치고 좋습니다.’

    노부부는 이 층에 세사르의 방을 마련해 주었다. 창문이 아주 크게 난 방이었다.

    ‘저 집은 담이 참 높네요.’

    세사르의 짐을 풀면서 폴이 중얼거렸다.

    ‘유령 들린 집이라 한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는데, 그래도 요즘 보니 누가 살긴 살더군요. 소공작께서는 유령을 무서워하나요?’

    ‘그런 거 믿지 않습니다, 부인.’

    믿지는 않지만, 궁금은 했다. 세사르와 폴은 늦은 밤 창문에 바짝 붙어 그 집에 유령이 나오는지 구경했다.

    하지만 그 집에서 나온 것은 유령이 아니었다.

    ‘저, 저분은…….’

    ‘그래, 그분이시다.’

    샤피로였다. 세사르는 강한 운명을 느꼈다.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뭐가 운명이란 말인가.

    ‘당장 가서 사랑을 고백하세요.’

    ‘아니야. 천천히 친분을 쌓은 다음에 다가가야 해.’

    그 또래 친구들이 해 준 조언을 되새겼다. 세사르는 집 근처 골목에서 기다렸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며 접근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샤피로 옆에 붙어 있는 여자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르니예 님, 머리에 그건 새로 장만하신 핀입니까?’

    ‘머리에? 뭐야? 이거 뭐야!’

    ‘뭐긴 뭡니까, 벌레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떼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아주 다정했다.

    ‘아까부터 봤는데 말 안 한 거지?’

    ‘아닙니다.’

    ‘아니기는.’

    그리고 그들은 나란히 집으로 들어갔다. 세사르는 심장이 멎는 듯하여 제 방으로 돌아왔다. 연인이 있었구나.

    그래, 저리 아름다운 사람에게 연인이 없는 것이 이상하지.

    하지만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일같이 샤피로를 쳐다보았다. 창문에 걸터앉아 망원경으로, 르니예와 대화를 나누고 르니예를 위해 문을 열어 주는 그를 발견했다.

    ‘……헉.’

    그때였다. 르니예가 제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이런 짓, 그만둬야 해. 기사도에 어긋나는 짓이다. 그래, 차라리 고백을 하자.’

    르니예라는 여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 결심이 선 세사르는 샤피로가 나오는 것을 보고 따라나섰다.

    ‘무슨 걸음이 이렇게 빠르지?’

    샤피로의 걸음은 훈련받은 세사르가 쉽게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거의 뛰다시피 해 간신히 따라잡은 순간, 그 여자가 또다시 나타났다.

    르니예와 같이 걸을 때 샤피로는 르니예에게 걸음을 맞추었다. 세사르는 느려진 샤피로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췄다.

    ‘……웨딩드레스?’

    르니예와 샤피로는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부케에 쓸 꽃을 골랐다.

    ‘튤립이지.’

    ‘작약입니다.’

    의견 차이는 좀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러고서 르니예는 샤피로의 옷을 사 주었고, 둘은 결혼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들어갔다.

    ‘결혼을 할 거라서 같이 사는 거였군.’

    같이 사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결혼을 할 사이라 그런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사실혼이나 마찬가지였고, 세사르는 좌절했다.

    ‘멀리서라도 당신의 행복을 빌겠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편지를 썼다. 그가 골랐던 꽃을 선물하고, 그 풍성한 금발에 어울릴 머리핀을 골랐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샤피로.’

    그는 샤피로가 한 번이라도 그 머리핀을 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본 장면은 샤피로의 손에서 머리핀을 빼앗아 간 르니예가 그걸 쓰레기통에 버리는 모습이었다.

    ‘이런 악독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샤피로가 쓰레기통에서 다시 머리핀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을 때, 그는 분개하여 일어났다.

    샤피로는 그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결투를 신청하시겠다고요? 레이디께?’

    폴에게 결투장을 전달하고 오라 했을 때, 폴은 결사반대하여 말렸다.

    ‘작위 빼앗기고 싶으세요, 도련님?’

    ‘샤피로가 없다면 작위도 필요 없어. 진짜로 싸울 생각은 없으니 전달하고 와.’

    검 한번 잡아 보지 못한 것 같은 상대와 진짜 검을 섞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담판을 지으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가문이 가진 권력을 조금 쓸 마음도 있었다.

    * * *

    “샤피로, 제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기사의 작위도, 소공작의 품위도, 그 앞에서 다 버렸다.

    “세사르 님, 진정하세요.”

    “진정할 수 없어요. 당신이 저분과 같이 걸어 다니는 것만 보아도 내 심장은 갈가리 찢기는 기분입니다.”

    샤피로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

    르니예는 간신히 상황을 이해하고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세사르 경, 앞으로 편지를 보낼 땐 받는 사람을 꼭 쓰도록 해요. 편지를 그렇게 보내서 우리가 쓸데없이 결투할 뻔했잖아요.”

    르니예는 벨데메르 쪽으로 바짝 붙었다.

    “제 남편은 이쪽입니다.”

    “예?”

    세사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직 풋풋한 얼굴에 감출 수 없는 화색이 피어났다.

    “이런,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레이디. 부디 용서하시기를.”

    세사르의 열기가 방을 채웠다. 샤피로는 매우 곤란했다.

    “그럼 샤피로는 자유의 몸이군요.”

    “저는 주인이 있는 몸입니다, 세사르 님.”

    “아, 그렇군요.”

    세사르는 벨데메르를 향해 돌아섰다.

    “저희 가문의 은인이시라 들었습니다.”

    벨데메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매우 혼란스러웠다. 제가 아니라 샤피로였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내가 사역마를 너무 잘 만든 탓인가.

    벨데메르는 쓸데없이 손재주까지 좋은 자신을 탓했다.

    “은인께 또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샤피로를 제게 주십시오.”

    “……네 시종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건가?”

    “예?”

    세사르가 손사래까지 치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아닙니다.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 아름다운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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