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결투를 신청합니다
“하, 참, 나.”
르니예는 하루 종일 피식피식 웃었다. 내가 그렇게 좋았단 말이야? 결혼한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전하고 싶을 만큼?
그 연서가 곤란하기는 했지만 아주 조금은 기분 좋았다.
“조금만 늦게 보내지.”
에드윈과 이혼하고, 벨데메르가 다시 조각상으로 들어간 뒤에 보냈다면…….
“그러면 뭐. 만나 보게?”
하여간 욕심은. 르니예는 스스로에게 야유를 보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이러다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전에 욕심을 버려라.”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르니예는 두 집 살림을 시작하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에드윈과 벨데메르, 둘 다를 보내고 나면 절대 제 인생에 남편이니 결혼이니 하는 것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겠다고.
르니예는 독신으로 살 것이다. 상단을 운영하면서, 신에게 약속한 것처럼 선하게 살아 볼 계획이었다.
“연서를 백 통 넘게 보내 봐라. 내가 흔들리나.”
……백 통이 넘으면 좀 흔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짐이 어째 삼 초를 안 가니.”
르니예는 혀를 차면서 조용히 상단을 빠져나왔다. 벨데메르의 집을 오갈 때, 르니예는 여전히 뒷문을 이용했다.
에드윈에게 이미 들켰지만, 그래도 상단을 나가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숨어서 다니는 것도 조금 있으면 끝이다.”
르니예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벨데메르의 집으로 향했다.
“응? 저거 누구지?”
대문 앞에서 누군가 서성이고 있었다. 르니예는 걸음을 빨리했다.
“누구세요?”
“이 집 주인이세요?”
많아 봐야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손에 편지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런데요.”
“저기, 이거…….”
소년이 머뭇거리면서 르니예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저희 도련님께서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그럼 저는 이만.”
“저기, 저기요!”
르니예가 편지 봉투를 받자마자 소년은 쏜살같이 도망쳤다. 바로 옆집으로.
“옆집 사는 사람이었어?”
르니예는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옆집에는 온화하게 생긴 노부부만 살았다.
“설마 그 집 할아버지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아주 소름 끼치는데. 그래도 일단 받았으니 뜯어는 봐야 하지 않겠나.
르니예는 대문만 닫고 들어가 봉투를 뜯었다. 이번에는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사르 패러히트.”
패러히트면, 공작 가문 아닌가? 르니예는 믿을 수 없어 연신 눈을 깜박였다.
패러히트 가문의 사람이 편지를 보낸 것도 놀라운데, 편지의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레이디께 결투를 신청합니다?”
* * *
“프리야, 가서 짐 정리하는 것 좀 도와.”
“저 많은 하인을 놔두고 굳이 나를 시키네.”
에니의 명령에 프리야는 혼잣말을 하듯 비아냥거렸다.
“혼잣말은 조용히 해 줄래? 다 들리거든.”
“들으라고 한 말인 건 모르는 걸까.”
“듣기 싫으니 얼른 가서 일이나 하라는 뜻인 건 모르는 걸까.”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에니가 프리야를 빤히 쳐다보았다. 프리야는 이를 까득 깨물며 짐 정리를 하러 출발했다.
프리야와 에드윈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암암리에 알려지면서, 다들 에드윈의 눈치를 보느라 프리야에게 뭘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에니는 달랐다. 에드윈이 탐탁지 않다는 눈을 해서 쳐다보든 어쩌든, 에니는 개의치 않고 프리야에게 일을 시켰다.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거나 비가 오는데 꼭 밖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거나,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도 끝나지 않는 잡일 같은 것을 골라서.
“소원 하나 보고 참았는데.”
금방 소원을 이룰 줄 알았다. 르니예가 이렇게 큰 복병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에드윈을 유혹하지 말고 르니예를 유혹할걸.
“잘하면 넘어오지 않았을까.”
프리야는 투덜거리면서 뒷문으로 향했다. 상단에서 일하는 점원이며 사용인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씩 대량의 식재료가 배달되곤 했다.
프리야는 짐수레가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아무 상자나 들었다.
“아가씨가 들기에 무거울 텐데.”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어디서 수작질이지? 프리야는 제가 든 상자를 들어주려는 투박한 손길을 싸늘하게 응시했다.
“……?”
팔을 걷어붙인 남자의 손목에, 수레바퀴 모양 문신이 선명했다.
“이렇게 지지부진 끌어도 괜찮아?”
길드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마코야데스가 프리야를 재촉하기 위해서 보낸 것이다.
“얼른 가져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올 거야.”
남자가 프리야의 짐을 덜어 주는 척하면서 속삭였다.
“그럼 넌 어떻게 되는지 알지?”
프리야는 까득 이를 악물었다. 알다마다. 실패한 길드원에게 자비란 없었다. 채찍질은 물론이고 며칠씩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창고에 갇혀 있기도 했다.
갇혀 있는 동안 당연히 밥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똑같을 거라고 전해.”
프리야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
“진짜 실패하고 싶으면 어디 다른 사람 보내 보라고. 그래 봐야 보석 코빼기 한 번 보지 못하고 돌아갈 테니까.”
프리야의 말에 남자가 씩 웃고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프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부러 강한 척하긴 했지만 진짜로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있을 순 없다. 그 지옥 같은 창고에 또 갇힐 수는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뭐라도.
벨데메르는 하루 종일 심란했다. 그는 르니예를 어떤 틀 안에 정의했다.
그렇게 정리가 되었을 때, 벨데메르는 편안했다. 하지만 르니예는 자꾸만 그 틀을 벗어나려고 했다.
날 정의할 수 있겠어? 그럴 수 있으면 해 봐, 라고 벨데메르를 도발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떨어져 있어도 르니예는 계속해서 벨데메르의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다. 잠시도 차분하고 냉정하게 생각할 수 없도록.
“결투장?”
벨데메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신이 시끄러웠다.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르니예를 결투에 나가게 할 순 없으니.
“결혼한 사람에게 연서를 보낸 것부터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결투까지 신청할 줄을 몰랐군.”
그것도 남자가 여자에게, 그녀의 남편을 걸고서.
“레이디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건 대체 어느 왕국의 기사도지?”
벨데메르는 결투장을 구겨 버렸다. 지금은 백골이 되었지만, 벨데메르에게 은혜를 입은 패러히트는 기사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후손이 이러는 걸 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리라.
“역시 그 머리핀이랑 편지, 벨데메르한테 준 거였나 봐요.”
치마폭 속에 숨긴 르니예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벨데메르를 좋아했던 거였어?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벨데메르를 걸고 결투를 신청하다니, 정말 미친 거 아니야?
“패러히트 가문에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군요.”
샤피로는 혀를 쯧쯧 찼다. 역시 인간들이란.
“패러히트 가문이 지금과 같은 부귀와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 다 주인님 덕인지도 모르고.”
“샤피로, 네가 다시 다녀와야겠다.”
“예, 주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깔끔하게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현 패러히트 공작 또한 기사였다. 자신의 자식이 기사도를 어겼다는 것을 알면, 적어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기사가 아닌 누구라도 제 아들이 결혼한 여인에게 그 남편을 달라며 결투 신청을 한다면, 맨발로 뛰어나오지 않겠나.
“일단 그 전에, 결투에 나오지 못하게 한쪽 다리를 살짝 부러뜨려 놓을까요?”
“그럴 필요 없어.”
“오, 설마 르니예 님께서 그동안 숨겨둔 검술 실력을 발휘하시는 겁니까?”
샤피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니.”
“그러면……?”
“대화로 풀어야지. 어차피 결투한다고 해도, 저쪽에 딱히 승산이 없어.”
에드윈 때문에 기사도에 대해서 공부했던 적이 있었다.
결투에도 규칙이 있었다. 먼저 기사는 검술을 배우지 않은 이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 없었으며, 부정한 이유로 결투를 하는 것도 금지였다.
“저쪽은 벌써 금기를 두 개나 어겼어.”
금기를 어기고 결투를 한 기사는 기사 작위 박탈이다. 공작 가문의 자제라도 여자에게 그녀의 남편을 달라고 결투 신청한 게 드러나면, 기사 작위를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어떻게 해서 유지한다고는 해도, 엄청난 망신이겠지.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개망신.
“벨데메르, 걱정하지 말아요. 이런 성가신 일이 다시 없도록 확실하게 처리할 테니까.”
일단 가서 대화로 풀고, 대화로 풀지 못하면 결투를 한다고 한 다음, 얼른 패러히트 공작에게 사람을 보내 이를 계획이었다.
그럼 세사르 패러히트는 그다음 날 즈음해서 가문으로 끌려가 펠레포네 영지에 다시는 오지 못하겠지.
“샤피로를 보내도 된다.”
“아니에요, 내가 갈게요.”
“왜지?”
“왜라뇨, 내가 벨데메르를 데려왔으니까 책임도 져야지.”
벨데메르는 어지러웠다. 그 편지 때문에 기분이 곤두박질쳤다가 또 하늘로 치솟기를 반복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을 전혀 조절할 수가 없었다.
병인가.
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르니예 님, 어디 사는 줄 알고 대화로 푸시겠다는 겁니까?”
샤피로의 물음에 르니예가 어깨를 으쓱하고서 말했다.
“바로 옆집 살던데?”
“세사르 패러히트 경을 만나러 왔습니다.”
지체할 것 없었다. 르니예는 그 즉시 옆집 문을 두드렸다. 걱정 말라고 했지만, 벨데메르는 기어코 르니예를 따라 그 집으로 향했다.
“벨데메르, 로브를 입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괜찮다. 어차피 내 얼굴을 다 알 테니.”
“그래도 주인님께 또다시 반할까 걱정이 됩니다.”
그들이 손님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뒤 세사르 패러히트가 나타났다.
“……세사르 패러히트 경?”
“맞습니다.”
세사르의 시선이 의자에서 일어서는 르니예를 향했다가, 그 뒤로 일어서는 벨데메르에게서, 그리고 의자를 뒤로 빼 주는 샤피로에게 닿았다.
세사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성큼 다가와, 샤피로의 손목을 탁 잡았다.
“이제 이런 거 하지 마요, 샤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