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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41화 (41/120)
  • 41화. 편지와 편지와, 편지

    헉슬리 판사는 자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의 재산과 작위는 모두 장남인 형이 가져갔지만 귀족의 자긍심만큼은 헉슬리에게도 남아 있었다.

    “누가 보낸 선물이지?”

    “에드윈 라포어 경이시랍니다.”

    “아아, 라포어 경께서 이혼이 꽤나 간절하신 모양이야.”

    그는 르니예가 에드윈의 이름으로 보낸 고급 와인 상자 안에 있는 금괴를 금고 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평민하고 이혼하면서 구설에 오르긴 싫겠지.”

    헉슬리는 에드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혼 서류를 검토했다.

    “흠.”

    서류를 검토하던 헉슬리는 거슬리는 구간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콜론 상단의 재산이 상당한 걸로 알고 있는데, 위자료가 너무 적지 않은가?”

    에드윈 덕에 귀족 노릇 하고 살았던 세월에 대한 보상치고 적었다. 에드윈에게 선물도 받았겠다, 같은 귀족으로서 헉슬리는 친절을 조금 베풀기로 했다.

    “이 정도는 받아야지.”

    헉슬리는 르니예가 낸 서류와 짧은 서신을 동봉해서 한 봉투에 넣었다.

    그가 책상 옆에 있는 종을 치자 하인이 뛰어 들어왔다.

    “이걸 에드윈 라포어 경에게 전해 줘라. 본인에게 직접 전해 줘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 * *

    “작은 마님, 주인어른께서 편지를 보내셨네요.”

    “아버지가 편지를?”

    가택 연금도 아니고 감옥도 아닌, 어디 별장에 갇혀 있는 콜론이 보낸 편지였다.

    “뭐라고 쓰여 있어요?”

    콜론의 안부가 궁금한지 에니가 옆에 서서 물었다.

    “편하게 지내신대.”

    하긴, 공작이 직접 영주에게 부탁을 했으니 어디 허술한 곳에 가둬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면회 신청을 했으니 조만간 가서 직접 볼 수도 있겠지.

    “그리고요?”

    “그리고, 찾아오지 말래.”

    르니예의 고운 미간에 선이 쭉 그어졌다. 편지의 내용이 영 이상했다.

    “면회 올 시간에 여행을 가래. 저번부터 왜 이렇게 여행 타령이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 딸이 어떻게 여행을 간단 말인가.

    그보다 아버지는 왜 자꾸 여행을 가라고 하는 걸까? 게다가 찾아오지도 말라고 하고.

    “에드윈도 절대 못 오게 하라는데?”

    “작은 주인님 얼굴 보기가 싫으신가?”

    르니예와 에니는 서로를 마주 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 가 봐야겠어.”

    “그런데 이렇게까지 오지 말라고 하시는 거면,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유? 무슨 이유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지 마시고 조용히 사람을 한번 보내시죠.”

    “아, 그럴까? 좋은 생각이야.”

    에니가 뭐, 별거 아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어디 가시려고요?”

    “아, 드레스 보러.”

    르니예의 대답에 에니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작은 마님 설마…….”

    “설마 뭐?”

    “남편을 또…….”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남편을 또, 라니. 르니예는 손까지 휘저어가며 부정했다. 남편은 둘이면 족하다. 아니, 하나면 충분하다.

    “마리아랑 로이드가 조촐하게 결혼식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드레스 선물해 주려고 했던 거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작은 마님.”

    내 심장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남편을 한 명 더? 그랬다가 제 명에 못 살 것이 분명했다.

    “그런 실수를 또 할 수는 없지.”

    광장으로 나온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벨데메르처럼 생긴 남자가 청혼하면?

    아니, 아니다. 벨데메르 같은 남자가 또 있을 리 없잖아.

    “……음?”

    어차피 저녁에 실물로 볼 거면서,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한참 감상하던 르니예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어디선가 저를 보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르니예는 두리번거리며 시선의 주인을 찾았다.

    “뭐야, 이상하네.”

    하지만 다들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쳐다볼 뿐, 르니예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르니예 님?”

    “샤피로? 뭐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아까부터입니다만.”

    나를 쳐다보던 게 샤피로였나? 르니예는 목 뒤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왜 여기 나와 있어?”

    “주인님 심부름을 왔습니다.”

    “그래?”

    르니예와 샤피로는 익숙한 듯 나란히 걸으며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티크에 들어가 마리아에게 선물할 웨딩드레스를 함께 고르고 나와 양장점으로 향했다.

    “샤피로, 저 꽃 어때?”

    양장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화원을 발견한 르니예가 튤립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케로 딱이지?”

    “르니예 님, 그렇게 안목이 없으셔서 어떡합니까.”

    샤피로는 그 옆에 있는 작약을 가리켰다.

    “자고로 웨딩드레스에 어울리는 꽃이라 함은 작약을 따라올 꽃이 없는 법입니다.”

    “예쁘긴 한데, 튤립색이 드레스에 더 잘 어울리지 않아?”

    르니예와 샤피로는 꽃에 관해 대화를 나누며 양장점으로 들어왔다. 벨데메르의 옷을 사 들고 나온 그들은 같이 집으로 들어왔다.

    “가지치기를 한번 해야겠다.”

    어느새 담장 끝까지 타고 올라간 장미 나무줄기를 보며 르니예가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또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강렬한 확신까지 들었다.

    “뭐야.”

    하지만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여긴 집 안이고, 이 집 안에 벨데메르와 샤피로 말고 다른 사람은 없으니까.

    “기분 탓인가?”

    두 집 살림을 하면서 하도 눈치를 봐 그런가, 이제 별 게 다 신경 쓰이네.

    르니예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에서 무언가 툭, 가벼운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르니예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다. 인기척도 없었다. 르니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 보았다.

    “저건 또 뭐야.”

    대문 앞에 작약 한 다발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 *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라포어 경.’

    면회를 거부하는 콜론의 의사를 무시하고, 에드윈은 기어코 면회를 갔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가택 연금을 따로 마련된 별장에서 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탈세를 한 게 이번이 처음입니까?’

    ‘그럴 것 같소?’

    에드윈의 물음에 콜론은 코웃음을 쳤다. 탈세는 계속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영주도 알고 있었으나 적당한 뇌물로 눈을 감아 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콜론을 잡아들였을까? 거기에 그는 가택 연금으로 형을 낮춰 주면서도 콜론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가 상단에 돌아가지 못하게 잡아 두려는 사람처럼.

    ‘이상하군요. 영주가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콜론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우리 르니예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지 않소, 라포어 경?’

    결국 콜론에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나가려는 에드윈을 콜론을 불러세웠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목적어가 따로 없었지만 프리야 이야기라는 것을 에드윈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내가 나갈 때까지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그 빚을 갚아 주시오.’

    ‘……그럴 겁니다.’

    에드윈은 상단으로 돌아오는 내내 콜론과의 대화를 상기했다. 빚, 그래, 르니예에게는 빚이 있었다.

    그녀가 제게 어떤 마음인지 알면서도 끝없이 밀어냈으니. 르니예에게 준 상처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에드윈 라포어 경, 되십니까?”

    에드윈이 상단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저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헉슬리 판사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꼭 라포어 경께 바로 전달하라고 하셨어요.”

    “판사께서?”

    에드윈은 서류 봉투를 건네받았다.

    “잘 받았다고 전해 주게.”

    “예.”

    판사가 왜 내게 서신을? 에드윈은 돌아오자마자 재킷도 벗지 않고 서신부터 뜯었다.

    “이혼 서류?”

    내지도 않은 이혼 서류가 접수되어 있었다. 그것도 에드윈 본인의 이름으로.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하아, 부인.”

    에드윈은 한숨을 쉬며 서신을 책상에 탁, 내려놓았다. 어떻게든 이혼을 하겠다는 르니예의 의지가 이만큼 잘 전해진 적도 없었다.

    “그래, 그 맹목적인 성향을 잊고 있었군, 내가.”

    저에게 사랑을 말할 때, 르니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열정적이었고 맹목적이어서 한편으론 부담스러웠지.

    그 열정과 집념이 고스란히 다른 남자에게 갈 줄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의심스러운 남자에게.

    “왜 하필이면, 그놈일까.”

    르니예가 벨데메르라는 신원도 불분명한 놈에게 넘어간 데에는 자기 탓도 있으리라. 에드윈은 르니예의 일탈에 자신이 상당 부분 기여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니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도 내 일이겠지.

    “쉽지는 않을 테지.”

    평소라면 쓰지 않을 방법도 써야 할지 모른다. 예컨대, 르니예가 이혼이 진행 중이라고 알게끔 속이는 일 말이다.

    * * *

    르니예는 꽃다발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워낙 커다란 꽃다발은 르니예의 몸통을 다 가리고 시야까지 가렸다.

    그러는 와중에 꽃다발 사이에 끼어 있던 편지가 떨어져 팔랑팔랑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편지가 있군.”

    벨데메르는 떨어진 편지 봉투 안에서 반으로 접혀 있는 편지지를 꺼냈다.

    두어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벨데메르는 그 편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연서였다,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보내는 편지.

    “이걸 떨어뜨린 건, 내가 봐줬으면 한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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