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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40화 (40/120)
  • 40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

    “벨데메르, 지금 나 피하는 거예요?”

    “아니다.”

    아닌 게 아닌데, 지금.

    르니예는 저만치 멀어진 벨데메르를 쪽으로 더 돌아누웠다.

    “그럼 왜 멀어지는 건데요?”

    “갑자기 방법이 떠올랐을 뿐이다.”

    “무슨 방법이요?”

    어둠 속에서도 그의 암흑 같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영원히 가질 수도 없고, 부술 수도 없게 할 방법.”

    * * *

    벨데메르는 꽤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주인님.”

    “갔다 올게요, 벨데메르.”

    밤을 새워 계획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한 벨데메르는 쉬게 두고, 작전 수행에는 샤피로와 르니예가 나섰다.

    그들은 나란히 저택을 나가 체이스가 자발적으로 갇혀 있는 창고로 향했다.

    “이봐, 체이스.”

    르니예가 창고 문을 툭툭 두드리자 작은 창이 열리고 창백한 얼굴이 쑥 나왔다.

    “어, 고용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이 계획에 체이스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일단, 르니예와 샤피로는 페롤라의 집을 모른다.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찾아가면 페롤라는 의심을 하거나 도망칠 수도 있다.

    하지만 페롤라의 집도 알면서 동시에 만만해 보이는 체이스라면?

    페롤라의 경계심을 낮추는 데 그만한 패가 없었다.

    “페롤라가 정말 그랬어?”

    페롤라의 집으로 가는 길, 자초지종을 듣던 체이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몇 번이고 물었다.

    “그랬다니까.”

    “원래도 질투가 심하긴 했는데.”

    체이스는 과거를 회상했다. 페롤라는 연락에 과한 집착을 보였으며, 체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 만족하곤 했다.

    “그래도 소유욕이 이 정도까지 강한 줄을 몰랐네. 하마터면 나도 살아 있지 못할 뻔했잖아.”

    체이스가 소름 끼쳐 했다. 르니예는 하고 싶은 수많은 말을 삼켰다.

    “그렇진 않았을 겁니다, 체이스 님.”

    왜냐면 어차피 샤피로가 대신해 줄 테니까.

    “아무리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라도, 아무것에나 집착하진 않을 테니까요.”

    “……나 상처받았어.”

    르니예가 체이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진실은 아픈 법이라니까, 체이스.”

    “고용주가 제일 나빠. 사역마보다 더 나빠.”

    체이스는 정곡을 찔려 아픈 가슴을 움켜쥐고 페롤라의 집이 보이는 즈음에 멈췄다.

    “우리 여기서 기다릴게.”

    르니예와 샤피로의 동행은 여기까지였다.

    “근데 이걸 왜 내가 해야 돼?”

    “네가 입을 잘못 털어서 시작된 일이잖아.”

    르니예가 조용히 눈을 부라렸다. 그런 체이스의 주머니에 샤피로가 작은 가죽 주머니를 집어넣었다.

    “체이스 님,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평소처럼 질척거리다가 이 가루만 딱 집어넣으면 됩니다.”

    “이 가루가 뭔데?”

    샤피로가 모아온 조각상 체이스의 가루였다. 벨데메르는 밤새도록 대리석 가루가 마력을 머금을 수 있게 가공했다.

    그런 다음 오늘 아침, 르니예를 불렀다.

    ‘르니예, 그 조각상의 복수를 하고 싶나?’

    ‘물론이죠, 벨데메르.’

    르니예가 원하자, 벨데메르의 마력이 조각상 체이스의 가루 위로 스며들었다.

    “그러니까 마법의 가루다?”

    “그렇지.”

    체이스가 할 일은 간단했다. 페롤라가 조각 덩어리를 이어붙이기 위해 만든 반죽 위로 이 가루를 뿌리기만 하면 된다.

    “이제 별걸 다 시키네.”

    투덜거리면서도 체이스는 페롤라의 집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왜 왔냐고 하면 뭐라고 해? 할 말도 없는데.”

    체이스는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페롤라의 집 앞에 섰다.

    “페롤라?”

    그가 두어 번 노크했지만, 안에서 답이 들리지 않았다. 혹시 집에 없나? 그렇다면 일이 쉬워지겠군.

    “혹시, 자니?”

    “이 대낮에 자겠냐?”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체이스는 화들짝 놀라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고 다녀.”

    “내 집에서 내가 인기척도 내야 돼? 여긴 무슨 일이야?”

    페롤라는 잔뜩 경계하는 시선으로 체이스를 훑어보았다.

    “왜긴 왜야, 너 때문에 나도 곤란해져서 온 거잖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뭐, 체이스에게는 아주 약간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잠깐 들어와.”

    “그래도 돼?”

    “차만 마시고 빨리 나가.”

    체이스는 어렵지 않게 페롤라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실을 따로 만들라니까.”

    집 안은 어수선했다. 여기저기 허연 대리석 가루가 쌓여 있고, 대야며 양동이가 아무 데나 있었다.

    체이스의 시선은 한쪽 구석 천으로 덮어 놓은 커다란 물체로 향했다. 저게 그 조각상인가?

    “작업실 만들 돈이 어디 있어. 그리고 여기서 지내는 게 편해. 작업하다가 쉬기도 좋고, 밤에 작업하기도 좋고.”

    페롤라가 차를 끓이는 동안 체이스는 얼른 집 구석구석을 훑었다.

    “저건 뭐야? 빵이라도 구워?”

    체이스는 밀가루 반죽처럼 보이는 것을 찾았다. 르니예가 말했다. 대리석 조각을 다시 이어 붙이려면 접착제가 필요할 거라고.

    그리고 그 접착제는 묽은 반죽처럼 생겼을 거라고 했다. 저게 딱 그렇게 생겼다.

    “아니야, 조각하는 데 쓰는 거야.”

    체이스는 페롤라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반죽 가까이 갔다. 주머니에서 가루가 든 주머니를 꺼낸 체이스는 반죽 위로 가루를 탈탈 뿌렸다.

    “벨데메르가 너를 보낸 거야?”

    “어?”

    체이스는 가죽 주머니를 소매 안으로 숨기며 태연한 척 뒤를 돌았다.

    “그렇지, 뭐. 그러니까 왜 조각상은 부수고 그래.”

    “내 소원이고 내 조각상이야.”

    그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뭐라고 할 권리는 없었다.

    “혹시 부서진 조각을 가져오래?”

    “어? 어, 가능하면 들고 오라고 하시네.”

    그런 말은 없었지만, 체이스는 대충 둘러댔다.

    “절대 안 된다고 해.”

    다시 만들 것이다. 더욱 완벽한 조각상으로.

    “차 다 마셨지? 이제 가.”

    “나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어? 나 진짜 가?”

    “어, 가.”

    페롤라는 체이스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 내보냈다.

    “옛정에 호소해서 가져오라고 시켰나 보지?”

    체이스에게 남아있는 옛정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지우고 싶은 과거일 뿐. 페롤라는 찻잔을 치우고 장갑을 꼈다.

    그리고 조각을 덮어 놓은 천을 들쳤다. 조각상 체이스는 덩어리로 부서진 채 쌓여 있었다.

    페롤라는 덩어리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옮겼다.

    “리자르, 걱정하지 마. 넌 더 완벽해질 거야.”

    페롤라는 접착제 반죽을 잘 휘젓고서, 커다란 덩어리 위주로 하나하나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이 흘렀다.

    “다 됐다.”

    더 나은 모습으로 완성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페롤라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제 우리 둘이 영원히 같이 사는 거야.”

    페롤라는 조각상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말을 하지 못해도 좋다.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저 조각 안에서 리자르가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을 페롤라는 알았다. 무엇보다 그것이 중요했다.

    “잘 자, 리자르.”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작업에 몰두했던 페롤라는 긴장을 풀고 잠에 들었다. 피곤이 몰려들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깊은 밤.

    “…….”

    사르륵-

    미세한 돌가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돌가루를 밟으며 조각상이 한 발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열대에서 걸어 내려온 그는 다시 차오르는 생기를 느끼며, 가만히 달빛을 받고 섰다.

    “……으음.”

    잠결에도 페롤라는 저를 뚫어질 듯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뒤척였다.

    “으, 뭐야?”

    눈을 비비며 일어난 페롤라는 진열대에서 내려와 저를 쳐다보는 조각상을 보고 놀라 일어났다.

    “리자르? 어떻게 된 거야?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거야?”

    “리자르가 아닙니다.”

    조각상이 말했다.

    “제 이름은 체이스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결정했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주인이 지어 준 이름이 네 이름이지.”

    “아니요.”

    조각상 체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번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몸놀림이었다.

    “더는 제 주인님이 아니십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체이스는 느꼈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벨데메르의 마력이 하는 이야기를. 도망쳐. 멀리 떠나.

    “리자르? 리자르!”

    조각상 체이스는 그대로 창문을 부수듯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뛰었다. 도망쳤다. 뒤에서 페롤라가 쫓아왔지만, 체이스는 사슴처럼 날렵했다.

    본능처럼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엔 그녀의 석궁도 체이스를 뒤쫓지 못하리라.

    “돌아와, 리자르!”

    멀어지는 페롤라의 외침을 들으며, 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체이스는 자유로웠다. 생전 처음으로.

    “잘 도망쳤군.”

    침대에 누운 채로, 페롤라의 절규를 들으며 샤피로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벨데메르는 조각상 체이스에게 숨만 불어넣지 않았다.

    그가 도망칠 수 있도록 빠른 다리와 날렵한 발을 주었다. 체이스는 이제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페롤라는 그를 쫓겠지만, 아마 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가질 수도, 부술 수도 없겠지.”

    샤피로는 웃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동이 트기도 전,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를 마친 샤피로는 정원으로 나갔다.

    “흐응~.”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잡초를 뽑고 있으니 어느새 일어난 르니예가 집 밖으로 나갔다.

    “기분 좋아 보이네, 샤피로.”

    “체이스가 드디어 도망쳤습니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르니예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체이스가 드디어 도망쳤구나.

    “다행이다.”

    르니예는 샤피로와 마주 보며 웃었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르니예 님.”

    “응.”

    샤피로에게 눈인사하고 나가려던 르니예는 순간 번쩍이는 강한 빛에 눈을 찌푸렸다.

    “뭐지?”

    누가 거울로 빛 반사 실험이라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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