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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37화 (37/120)
  • 37화. 피그말리온

    페롤라는 사람 크기만 한 조각상을 수레에 싣고 오는 중이었다. 수레가 달달 떨렸고 그 위의 새하얀 조각상도 달달 떨렸다.

    “세상에.”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벨데메르였다. 약간 조잡한, 하위 버전의 벨데메르라고나 할까.

    “오래 존재하다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있군요.”

    샤피로가 혀를 끌끌 찼다. 페롤라가 가져온 조각상은 벨데메르를 닮아 있었다. 사실 벨데메르를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벨데메르의 조각상은 신의 솜씨고, 페롤라의 조각상은 인간의 솜씨였으므로 완성도의 차이는 있었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벨데메르 표절작?”

    샤피로와 르니예는 페롤라의 조각상을 한 번, 벨데메르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래도 진짜는 못 따라오지.”

    “말이라고 하십니까, 르니예 님.”

    작은 소리로 속닥거리면서, 그들은 일단 페롤라를 미소로 맞이했다.

    페롤라는 수레를 세우고서 르니예와 샤피로에게 차례대로 악수를 청했다.

    “다시 보니 또 반갑네요.”

    페롤라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르니예는 그녀가 무슨 소원을 빌지 상상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페롤라, 규칙에 관해서는 다 들었죠?”

    “달달 외울 정도니, 걱정하지 말아요.”

    르니예는 다시 한번 벨데메르를 닮은 조각상을 흘긋 보았다.

    “부디 평범한 소원이기를 빌어요.”

    페롤라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페롤라가 빌 소원은, 그리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에게 피해가 갈 소원은 아니에요.”

    “그럴 것 같기는 한데…….”

    조각상을 데려온 걸 보면 그에 관련된 소원이겠거니 싶었다. 어쨌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르니예는 페롤라에게 블러디 사파이어를 건넸다.

    “고마워요.”

    페롤라는 싱긋 웃으며 벨데메르의 입술에 블러디 사파이어를 살짝 올려놓았다. 보석이 액체가 되어 사라지고, 기이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페롤라가 자신의 조각상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제 조각상이 살아 숨 쉬게 해 주세요.”

    르니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샤피로는 다 들리게 혀를 끌끌 찼다. 어리석은 소원이 또 나왔군.

    “네 소원은 이뤄졌다.”

    페롤라는 벨데메르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다른 데로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겠지?”

    “이미 주인님의 정체를 아시니까요.”

    샤피로는 혼잣말인지 모를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만, 주인님께서 저걸 보시고 나면 충격받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샤피로의 목소리는 벨데메르의 조각상이 갈라지는 소리에 묻혔다. 조각상은 푹신한 이불 위로 떨어졌다.

    샤피로와 르니예는 본능처럼 이불 밖으로 떨어지는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

    페롤라의 조각상이 숨쉬기 시작한 것은.

    “그래, 바딜. 프리야가 살던 마을에 마땅한 집이 있던가?”

    바딜은 망설였다. 에드윈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프리야의 사정이 너무 딱했다.

    ‘작은 주인님께는 알리고 싶지 않아. 내 마음 알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사실 바딜은 프리야가 말한 ‘내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그런 사정까지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인가?

    “마땅한 집도 딱히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과 프리야의 아버지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런가.”

    에드윈은, 아무래도 도박을 일삼던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짐작한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있는 저택으로 보낼 수도 없고 곤란하군.”

    만일 2왕자의 반란이 성공한다면, 에드윈은 본인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위험에서 적어도 프리야만은 지키고 싶었다.

    “프리야가 지낼 만한 다른 곳이 있나 더 찾아보도록 해.”

    “정말 내보내실 겁니까?”

    “그게 프리야를 위한 길이야.”

    에드윈도 씁쓸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옳은 일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옳은 일에도 대가는 따르는 법이었다.

    “움직인다.”

    르니예의 시선은 수레 위 조각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처음엔 눈을 깜빡이던 것이 손가락을 까딱하더니 이제는 팔을 굽혔다. 이어서 어깨를 부드럽게 돌린 조각상이 목을 좌우로 비틀었다.

    대리석 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이제 살아 숨 쉬는 조각상을 가지게 되셨군요, 페롤라 님.”

    샤피로가 비아냥인지 축하인지 모를 말을 읊조렸다. 그리고 그들 뒤에, 새 조각상에게 모든 관심을 빼앗긴 벨데메르가 서 있었다.

    “저게 대체, 뭐지?”

    “아, 주인님. 나오셨습니까.”

    샤피로가 재빨리 벨데메르의 몸으로 로브를 둘렀다. 그런 와중에도 벨데메르의 시선은 차례차례 관절을 꺾고 있는 조각상에 고정되었다.

    “저건…….”

    저건 나를 닮았군. 인정하기 싫지만, 그건 확실히 저를 닮았다. 벨데메르의 미간이 더 이상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좁혀졌다.

    “……아아?”

    드디어 조각상이 몸을 자유롭게 썼다. 그는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쓱 둘러보다가 수레에서 내려왔다.

    그런 조각상에게 페롤라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

    “……안녕.”

    조각상이 소리 내어 말하자, 르니예와 샤피로는 흠칫 놀랐다. 목소리마저 벨데메르와 닮았다.

    “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페롤라는 희열에 빠져 조각상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조각상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페롤라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름을 지어 주세요.”

    샤피로가 말했다.

    “주인에게 이름을 받는 것이 사역마의 시작이니까요. 그것은 사역마가 아니지만, 제 눈에는 비슷해 보이는군요.”

    샤피로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페롤라는 조각상에 손을 내밀었다.

    “네 이름을 뭐라고 할까?”

    조각상이 조심스레 페롤라의 손 위에 제 딱딱한 손을 올렸다.

    “이름 생각해 둔 거 없어요?”

    르니예의 물음에 페롤라가 난감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각하느라 바빠서 이름은 못 지었는데.”

    그때 샤피로가 대뜸 나섰다.

    “그렇다면 페롤라 님께서 좋아하셨던 것을 따 이름을 지으시면 어떻겠습니까.”

    샤피로가 조각 같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를테면 체이스라든가.”

    페롤라가 싫다고 말할 새도 주지 않고 샤피로가 조각상을 향해 말을 걸었다.

    “체이스, 이제 그만 수레에서 내려오도록.”

    그러자 조각상이 움직였다.

    “체이스라니!”

    페롤라가 거의 울부짖었다. 이 완벽한 조각상 앞에 외로워 차차차선책으로 택한 전 남자친구 이름이 가당키나 한가.

    “네 이름은 체이스가 아니야.”

    페롤라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조각상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말했다.

    “체이스.”

    “이름이, 마음에 든 모양인데요.”

    르니예는 터져 나오는 웃음에 이를 깍 깨물었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이름을 지어 주었을 뿐입니다. 페롤라 님께서 좋아하셨던 것의 이름을 땄는데 무슨 문제라도?”

    샤피로가 뻔뻔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역마는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기 힘드네요.”

    일부러 체이스의 이름을 꺼낸 주제에, 이럴 때는 또 사역마라고 하네. 하여간 보통 아니야, 쟤도.

    “페롤라, 해 뜨기 전에 얼른 데리고 가는 게 좋겠어요.”

    페롤라는 살의가 번뜩이는 눈으로 샤피로를 바라보다가 조각상 체이스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당신, 가만두지 않겠어.”

    그러든지 말든지 샤피로는 빙긋이 웃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페롤라. 그리고, 체이스.”

    르니예는 또 이를 깍 깨물었다. 완벽한 조각상을 만들어 살아 숨 쉬게 소원까지 빌었는데 이름이 체이스라니!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전 남자친구 이름이라니.

    르니예는 웃기면서도 안타까웠다.

    “하여간 못됐어.”

    “얼굴에서 웃음기나 지우고 말씀하시죠, 르니예 님.”

    샤피로와 르니예가 서로를 쳐다보며 낄낄댔다. 그러는 동안, 벨데메르는 서슬 퍼런 눈으로 페롤라와 조각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사무치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역시 팔을 잘랐어야 했다.”

    “이상한 녀석들이 많아졌어.”

    “시대가 변했으니까요.”

    벨데메르는 아까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자신을 묘하게 닮은 조각상이 움직이는 기분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조각상을 살아 숨 쉬게 해서 어쩌려는 거지, 그 여자는?”

    벨데메르의 질문이 르니예를 향했다.

    “뭐, 아까 보니까 내 사랑 어쩌고 하던데, 애인 삼아 데리고 살려고 한 건 아닐까요?”

    르니예는 무심코 말했다가 벨데메르의 표정을 살피고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불쾌하겠지. 하긴, 입장 바꿔 생각하면 서로 불쾌할 일이기는 하다.

    “벨데메르, 그 조각상 이름은 체이스잖아요. 아마 그 이름 부를 때마다 체이스가 떠오를걸요, 벨데메르가 아니라.”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벨데메르는 그 소름 끼치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주인님께서 외관까지 너무 완벽하셔서 아니겠습니까.”

    샤피로가 진정 효과가 있는 차를 컵에 따랐다.

    “르니예 님, 이제 아시겠죠.”

    “뭐를?”

    “주인님의 이 잘생김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말입니다.”

    르니예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자 샤피로는 답답했다.

    “조각상만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만일 주인님께서 실제로 세상에 나가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샤피로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모두가 주인님을 원하게 될 겁니다. 이 영지 사람뿐 아니라 왕국의 모두가!”

    컵에서 올라오는 연기로 샤피로의 얼굴이 흐릿했다가 선명해졌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주인님을 지키기 위해서 르니예 님께서 검술을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결투를 청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테니.”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르니예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이, 누가 결투 신청까지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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