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35화 (35/120)
  • 35화. 누군가의 손길

    “누군가 나를 만지고 있다.”

    “누가요?”

    “여기 아무도 없는데?”

    르니예와 샤피로는 벨데메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이번엔 진짜 유령인가?”

    르니예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조각상을 드나들어 부작용이 생기신 건 아닙니까?”

    샤피로는 벨데메르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진짜 벌레가 기어 다니는지 살폈다.

    “내가 아니다.”

    벨데메르의 정갈한 미간에 선이 생겼다.

    “조각상이야.”

    “조각상을 만지는 게 느껴져요?”

    르니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그동안 그 조각상을 만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말이야?

    ‘만지지 마시오’란 팻말이 붙어 있긴 했다만, 정말 아무도 안 만졌다니, 대단한걸.

    “그냥 만지는 게 아니다.”

    벨데메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마력을 사용해서 만지고 있다.”

    벨데메르가 샤피로에게 손짓했다.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샤피로.”

    “예, 주인님.”

    샤피로가 재빨리 벨데메르의 어깨 위로 로브를 둘렀다. 그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 후드를 푹 눌러썼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군요. 좋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로 눌러쓰지 않아도 조각상과 동일 인물이라고 보진 않을 거예요, 벨데메르.”

    르니예의 걱정에 샤피로가 거만하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 때문이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얼굴을 드러냈다가는 큰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무슨 큰일이 나는데?”

    “이 좁아터진 집이 연서로 가득 차고, 주인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이들이 영지 밖까지 줄을 설 겁니다.”

    샤피로가 르니예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르니예 님께서 바로 그 예시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르니예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아직 르니예가 조각상에 반해 청혼한 사람인 줄 알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불쾌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군.”

    “진짜 누가 만지고 있잖아.”

    ‘만지지 마시오’란 팻말이 떡하니 있는데 그걸 무시한 채 누군가 열심히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쓰다듬고 있었다.

    얼굴도 쓰다듬고, 목도 매만지고, 가슴팍도 문지르고, 끝내는 허리를 안아 보기까지 했다.

    “으.”

    샤피로가 차마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신음 같은 탄식을 흘렸다.

    “……변태인가?”

    저 정도면 심각한데? 르니예도 오만 인상을 다 찌푸렸다.

    “팔을 자르겠다.”

    그리고 벨데메르는 분노했다.

    “참으세요, 주인님. 시대가 변했습니다.”

    “그래요, 벨데메르. 내가 가서 못 하게 할게요.”

    샤피로가 벨데메르를 막는 사이 르니예가 잽싸게 조각상으로 뛰어갔다.

    “저기요.”

    르니예의 목소리에 벨데메르의 허벅지를 주무르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고, 대장간에서 입을 법한 옷차림에 주머니가 잔뜩 달린 가죽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거기 만지지 말라고 쓰여 있는 거 안 보여요?”

    “보여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자는 벨데메르의 종아리를 쓸었다. 그 농밀한 손길에, 르니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히 어딜 만져?

    “이봐요.”

    르니예가 여자의 손목을 턱 잡았다.

    “만지지 말라니까?”

    “왜요? 이 조각상이 본인 거예요?”

    여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손을 휙 돌렸다. 졸지에 상황은 역전되어 르니예의 손목이 여자의 손에 잡혀 있었다.

    “아니면 본인이 싫다고 하나?”

    여자의 시선이 르니예의 어깨 너머 로브를 쓰고 이쪽을 바라보는 벨데메르에게 가 꽂혔다.

    “……당신 뭐야?”

    * * *

    “프리야, 이거 누가 전해 달라는데.”

    설거지를 하고 있던 프리야가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고서 야무지게 접힌 종이쪽지를 받아 들었다.

    “누가요?”

    “몰라, 요만한 남자애였는데. 남동생 있다고 하지 않았어?”

    프리야는 눈을 반으로 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봐요. 고맙습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쪽지를 전달해 준 하녀가 뒤를 돌자마자 프리야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쓸데없이 여러 번 접어 놨어.”

    쪽지를 펴는 손길이 거칠었다. 색이 누렇게 바랜 종이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도, 보내는 사람의 이름도 없었다.

    대충 휘갈긴 바퀴 그림만 달랑 있을 뿐이었다. 프리야는 그대로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하수도로 흘려보냈다.

    “오라 가라 귀찮게.”

    프리야는 화장실에 가는 척 자연스레 자리를 떴다.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디 가냐고 물어볼 법도 하지만, 그런 질문도 없었다.

    에드윈과 그렇고 그런 관계인 게 암암리에 알려지고 나서부터 그랬다. 다들 에드윈을 만나러 간다고 여기고, 못 본 척 침묵했다.

    주인 부부의 치정에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발현이었다. 덕분에 프리야는 편했지만.

    “바딜.”

    프리야는 저기서 걸어오는 바딜을 소리 내 불렀다.

    “어디 가?”

    그런데 평소와 달리 바딜은 재킷까지 입은 외출복 차림이었다.

    “어? 아, 잠시 심부름하러.”

    “작은 주인님은?”

    “잠시 나가셨어.”

    프리야가 의문스럽다는 듯 물었다.

    “너 없이?”

    “응, 그냥 산책하러 가신 거야.”

    “그렇구나. 알겠어. 그럼 난 다음에 뵈러 오지, 뭐.”

    프리야가 발랄하게 웃었다.

    “그럼 일 봐.”

    프리야는 바딜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뒷문으로 향했다. 잘됐다. 에드윈도 없으니 전부 내가 에드윈과 나갔다고 생각할 테지.

    뒷문을 통해 나간 프리야는 인적이 드문 뒷길로 돌아 후미진 곳에 있는 여인숙을 찾았다.

    “아가씨 혼자서 자고 가게?”

    여인숙 주인이 빠진 앞니를 드러내며 음흉하게 웃었다.

    “바퀴가 두 개 달린 마차를 타고 왔어요.”

    의미 모를 문장에 여인숙 주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주변을 쓱 살피며 카운터 문을 열어 주었다.

    “지하에.”

    프리야는 좁은 계단을 지나 지하로 내려갔다.

    “여기 삼 층짜리던데, 삼 층에서 기다릴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거기가 공기도 더 좋은데.”

    프리야는 눈앞에 날리는 먼지를 휘휘 저으며 의자라고 부르기도 뭐한 나무토막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대장?”

    “무슨 일이겠니, 프리야.”

    대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짐짓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얼굴의 반쪽이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코야데스. 도둑 길드의 수장. 고아였던 어린 프리야를 데려와 훌륭한 도둑으로 키운 남자.

    프리야는 여전히 그의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말했잖아요. 그 보석 찾는 즉시 가져다드리겠다고.”

    블러디 사파이어를 훔쳐 오라고 프리야를 콜론 상단에 집어넣은 사람도 마코야데스였다.

    “금고 안은 들어가 봤고?”

    “열두 번도 더 들어갔다고요. 그런데 없었어요. 그 자리가 비어 있었어요. 누가 가져갔는지 조사하는 중이니까 좀 기다리세요.”

    거짓말이었다. 프리야는 거짓말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소리를 높였다.

    “우리 의뢰인께서는 인내심이 없는 편이시다, 프리야. 오래 걸리면 좋지 않아.”

    “대장, 제가 언제 실패한 적 있었어요?”

    자신감 넘치는 말에 마코야데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없지, 우리 딸.”

    딸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프리야는 이를 까득 악물고서 말했다.

    “그럼 좀 믿고 기다리세요. 이번에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테니까.”

    * * *

    “위대하신 벨데메르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를 아는가?”

    “마법의 길을 걷는 자가 어찌 벨데메르 님을 모르겠습니까.”

    르니예는 여자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마법사라. 마법사의 차림으로 보이진 않는데.

    “저는 페롤라라고 합니다. 한때 마법사였다가 지금은 조각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더듬던 사람치고 페롤라는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아까는 변태처럼 보이더니 이제 좀 정상인 같아 보이기도 했다.

    “왜 내 조각상을 만지고 있었지? 그것도 마력을 흘려보내면서?”

    “마력이요?”

    페롤라의 얼굴에 잠깐 물음표가 뜨더니 이내 느낌표로 바뀌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되는 일을 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마력을 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조각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아름답긴 하지. 그래도 너무 여기저기 만지는 거 아니야?

    르니예는 날이 바짝 세우고 물었다.

    “아름답다고 막 만지면 되겠어요? 대체 왜 만진 거예요?”

    “제가 지금 조각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참고하려고 그런 겁니다. 아까 손목 잡은 건 미안했어요.”

    페롤라가 정중하게 사과하자 르니예는 마음이 좀 풀렸다.

    “거의 다 완성했는데 뭔가 빠진 것 같아서 완성을 못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 조각상을 보는 순간, 영감이 떠올랐지 뭡니까.”

    페롤라는 그 순간의 환희가 떠올랐는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벨데메르 님 덕분에 제 역작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롤라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영감을 받다 보면 만져보고 할 수도 있는 거겠지. 르니예는 너른 마음으로 이해를 해 보려고 했다.

    “제게 영감을 주신 김에 한 가지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염치가 없는 편이시군요.”

    샤피로가 싱긋 웃으며 그런 말을 잘도 했다. 하지만 페롤라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들었어요.”

    페롤라가 벨데메르와 샤피로, 그리고 르니예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제 소원도 들어주세요.”

    “저기, 페롤라.”

    르니예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물었다.

    “그 얘기 누구한테 들은 거예요?”

    아이를 점지해 줬다느니 하는 헛소문을 듣고 이러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페롤라가 알고 있는 소문의 출처가 매우 중요했다.

    “아, 제 전 남자친구요.”

    “그게 누군데요?”

    “그 사람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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