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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33화 (33/120)
  • 33화. 너의 모든 기억

    조각상에 봉인이 되었을 초기는,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군.”

    아주 오랜 잠에 빠져 있었다. 첫 번째 들어준 소원은 무엇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모든 일이 잠에 빠진 채,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흐릿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깨어있는 시간이 늘었지.”

    샤피로를 불러 몇 가지를 지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조각상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르니예가 소원을 빈 날부터는, 조각상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를 기록하던 벨데메르의 손이 숫자를 쓰다가 멈췄다.

    “소원의 개수가 반을 넘어가는 시점이었군.”

    처리해야 하는 소원은 아흔아홉 개. 르니예의 소원은 50번째였다.

    르니예의 소원 때문이 아니라, 소원의 순서 때문에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던 건가.

    “그런데 내 자의로 다시 들어갈 수가 있다면.”

    마력을 사용했더니 조각상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소원을 들어주고 나서는 나올 수 있었다.

    “드나들 수 있다면 더는 감옥이 아닌 셈이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펜촉에서 흐른 잉크로 종이가 흥건해지는 것도 모르고 벨데메르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흐윽.”

    “흡.”

    그때 열린 문틈으로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흘러들었다. 울음소리가 날 일이 없는데. 벨데메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이 층 난간에 서서 보니, 그 울음은 르니예와 샤피로의 것이었다. 르니예는 고개를 돌리고 소매로 눈물을 찍어내고, 샤피로는 미간을 꾹 누르며 눈물을 참았다.

    “무슨 일이지?”

    “벨데메르.”

    르니예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잔뜩 묻어났다. 눈매는 빨갛게 부어서는 채 떨어지지 않은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벨데메르는 주변 공기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그런데 넌 왜 같이 울고 있지, 샤피로?”

    “너무 슬픈 사연을 들었습니다.”

    샤피로가 손수건을 허공에 착- 털고서 눈가를 꾹꾹 찍었다.

    “지금까지 들어 본 소원 중에 이렇게 슬픈 소원은 없었습니다.”

    “소원? 그 여자의 소원 말인가?”

    르니예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뤄지지 않은 건가?”

    “아니에요, 소원은 이뤄졌어요.”

    르니예가 훌쩍였다. 마리아의 소원은 이뤄졌다. 너무 잘 이뤄져서 탈이지.

    로이드의 기억 속에서 마리아는 전부 잘려 나갔다. 그런데 마리아만 잘려 나간 게 아니라 마리아가 존재하는 모든 기억도 같이 잘려 나갔다.

    “마리아와 같은 자리에 앉아 공부한 것마저 싹 다 잊어버렸어요.”

    로이드의 기억에 너무 큰 구멍이, 너무 많이 생겼다. 로이드 인생의 대부분에 마리아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로써 로이드는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잊고 잃었다.

    “그래서 왜 우는 거지?”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벨데메르가 물었다. 남자가 바보가 되었다는 건 알겠는데, 그것과 르니예가 우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벨데메르는 연신 르니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물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손길이 다급했다.

    “그거야 당연히, 마리아가 너무 불쌍하니까요!”

    그러나 결국 르니예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이게 왜 슬픈지 모르다니! 벨데메르는 감정이 없는 걸까.

    “마리아는 이제 곧 죽을 텐데, 로이드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그 남자를 두고 어떻게 편히 눈을 감겠습니까.”

    르니예와 샤피로가 고개를 막 절레절레 저으며 훌쩍였다.

    “…….”

    벨데메르는 그 감정을 공감하진 못했지만, 일단 르니예가 왜 우는지 이유는 알았다.

    “알았으니 그만 울어라, 르니예.”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그의 손가락이 닿자 르니예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자꾸 이런 친절을 보이면, 내가 착각하거나 오해할지도 모르는데.

    “눈가가 짓무르겠어.”

    아니, 못된 마음을 품고 이혼을 하지 않아서 벨데메르 곁에 있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르니예는 더욱 헛된 기대를 하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주인님, 저도 우는데요?”

    “그래, 너도 그만 울고.”

    벨데메르는 샤피로의 눈물은 닦아 주지 않았다. 샤피로는 알아서 눈물을 닦았다. 사역마는 서러웠다.

    “그 남자에게 와서 소원을 빌라고 해라. 기억을 되찾게 해 달라고.”

    조각상 안으로 다시 들어가 볼 계획이었다. 저번이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어차피 나올 때 소원이 필요하니 로이드의 소원을 들어주면 되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울도록.”

    * * *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잖아요, 로이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대체 어떻게 먹는 겁니까?”

    로이드의 순진무구한 눈동자에 마리아는 눈물을 삼켰다.

    “미안해요,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그는 간신히 사람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제빵사였던 로이드는 빵을 굽는 방법을 거의 다 잊어버렸다.

    빵을 굽고 연습하고 시식하는 내내 마리아가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다 내 탓이에요. 그러니 나를 원망해요.”

    그저 로이드가 평온한 삶을 보내길 바랐을 뿐인데. 저를 잃은 슬픔에 아파하지 않고, 다른 이를 만나 평범한 행복을 누리길 바랐을 뿐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로이드,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마리아는 소원을 빌고 나서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로이드를 보며 알은척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로이드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람처럼 보여서, 마리아는 하는 수 없이 로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세요? 저를 아세요?’

    그가 텅 빈 눈으로 저를 쳐다보던 순간, 마리아는 심장이 멎는 아픔에 숨이 턱 막혔다. 이어지는 로이드의 물음에 마리아는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어느 길로 가야 집인지 모르겠어요. 길이 익숙하긴 한데, 왜 길을 모르겠는지…….’

    로이드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이후로 그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리아,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못 하겠네요.”

    그는 저를 살뜰히 챙기는 마리아에게 호감을 보였다. 기억을 잃었어도 여전한 그 미소를 지으며 저를 쳐다볼 때 마리아는 죄책감으로 목이 멨다.

    “다 내 탓이라니까요.”

    “그런데 왜 난 당신 탓이 하고 싶지 않을까요?”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했고 마리아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렇게 고개를 틀고 눈물을 훔치는데, 발작적으로 기침이 시작되었다.

    “마리아, 괜찮아요? 마리아?”

    “네, 괜찮, 우읍.”

    마리아가 울컥 피를 토했다. 로이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물이라도 가져올게요.”

    마리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에게 남은 시간이 없는데 저 사람을 어찌하나.

    “물을 가져왔어요. 마리아, 자는 거예요?”

    로이드가 바닥에 쓰러진 마리아를 작게 흔들었다.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는 미동이 없었다. 혈색이 돌지 않는 얼굴에 로이드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의원에게 가야 해. 하지만 의원에게 어떻게 가지?

    머릿속이 아주 뒤죽박죽이었다. 한 가지도 선명한 것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로이드는 그 곁에서 멍청히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 터였다.

    “마리아, 집에 있어요?”

    “누구세요? 마리아를 아세요?”

    로이드는 문을 열고서 그 앞에 서 있는 밤갈색 머리의 여자에게 애원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제발 마리아를 살려 주세요.”

    “샤피로, 어떻게 됐어?”

    늦은 밤.

    르니예는 마리아를 에니에게 맡기고, 로이드를 데려왔다.

    “보시다시피.”

    샤피로는 조각상 주변에 두꺼운 이불을 깔아 놓았다. 벨데메르가 다시 조각상 안으로 들어갔단 뜻이었다.

    “그분입니까?”

    “그래.”

    “안녕하세요.”

    로이드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는 뭐가 뭔지 여전히 헷갈렸다. 마리아가 빌었다는 소원 때문에 자신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믿기 힘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마리아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믿었다. 그건 믿을 수 있었다.

    “기억을 온전히 되돌려 달라고 소원을 비십시오.”

    샤피로가 블러디 사파이어를 로이드에게 건넸다. 로이드는 사파이어를 받으며 옅게 웃었다.

    “저는 다른 소원을 빌 겁니다.”

    그 소원이 뭔지 아는 르니예는 벌써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마리아를 위한 소원을 빌고 싶습니다.”

    마리아가 많이 아프다. 기억이 온전하지 못해도 그건 알 수 있었다.

    “마리아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소월을 빌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계속해서 이 상태로 살아야 합니다.”

    “괜찮아요.”

    로이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마리아가 곁에 있어 주면,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아요.”

    샤피로는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들었다. 르니예는 벌써 눈 앞꼬리를 꾹꾹 누르는 중이었다. 그들이 눈물 콧물 짜는 사이에, 로이드는 소원을 빌었다.

    “제 소원은, 마리아의 병이 씻은 듯이 낫는 겁니다.”

    “크흡.”

    “따흑.”

    “…….”

    조각상에서 나오자마자 벨데메르는 상쾌한 공기와 함께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샤피로와 르니예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깨진 조각을 줍고 있었다.

    “이번엔 또 왜 울고 있지?”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뜻대로 그 남자의 소원을 들어주었는데도 우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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