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32화 (32/120)
  • 32화. 52번째 소원

    “저기 온다.”

    작전의 첫 번째 실험체가 걸어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리해 보자.”

    긴장과 흥분으로 르니예의 말이 빨라졌다.

    “뭐가 되어 달라는 소원은 안 돼.”

    그런 종류의 소원을 빌어 곤란에 빠진 완벽한 예로 르니예가 있었다.

    “애매모호한 소원도 안 돼.”

    ‘능력을 주세요’가 아니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가 되어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 체이스 꼴이 날 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반드시 비밀을 지키게 해야 돼.”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사지가 찢기는 고통을 당하고 모든 것이 소원을 빌기 전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됩니다.”

    샤피로의 말에 르니예가 그를 돌아보았다.

    “잠깐만, 그런 항목을 추가할 수 있어?”

    “아니요. 애초에 소원을 비는 데 규칙은 딱 하나뿐입니다. 소원은 한 가지만 빌 수 있다. 나머지는 모두 저와 주인님이 상의하여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소원을 중간에 바꿨어도, 괜찮았다는 말이잖아?

    르니예는 허탈해 무릎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러면 규칙을 어겨도 상관없네?”

    “과연 그럴까요?”

    입매를 쭉 늘이며 웃는 샤피로의 눈에 인간의 것이 아닌 안광이 돌았다. 그가 사람이 아닌 사역마라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그 생각을 하니 르니예는 덜 억울해졌다. 누구에게 당하든 해코지는 당하는 것이었으니.

    “자, 고객님께서 우릴 발견하셨다. 각자 맡은 바 잘하자고.”

    르니예가 긴장으로 두 손을 비볐다. 그 사이 ‘고객님’으로 불리지만 실은 실험체인 여자가 그들 앞에 섰다.

    “누구세요?”

    “마리아 씨 맞으시죠?”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찾아오셨나요?”

    “네. 지난주에 광장 끄트머리 점술가 어르신에게 결혼 날짜를 받으러 오셨었죠?”

    르니예가 마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니와 샤피로가 입꼬리를 최대치로 끌어 올려 웃었다.

    “저는 그 어르신 조수예요.”

    잠시 동안 르니예는 그럴 예정이었다. 마리아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했지만, 일단 내민 손을 맞잡기는 했다.

    “제가 마리아 씨의 그 걱정, 고민을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제 얘기만이라도 좀 들어 보시겠어요?”

    마리아에게는 아주 오래된 연인이 있다. 기억이 나는 거의 모든 순간에 그가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결혼을 약속했다.

    “그런데 저에게 큰 병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어요.”

    몇 주가 지나도 낫지 않는 감기. 의원을 찾아간 마리아는 그것이 치사율 높은 폐병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저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그 점술가 할머니를 찾아간 거예요. 아주 용한 분이라고 들었거든요.”

    노파를 찾아간 마리아는 점을 보는 대신, 부탁을 하나 했다.

    “결혼 날짜를 잡으러 가면, 거짓말을 해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우리 둘은 결혼하면 서로를 해칠 운명이라고 말씀해 주시면 안 되냐고요.”

    “애인분께서는 마리아 씨 병을 몰라요?”

    “네,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요.”

    마리아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죽는 모습을 보면 로이드는 평생 아무도 만나지 못할 거예요.”

    그에게 죽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 점괘를 믿던가요?”

    “아니요. 안 믿더군요. 하지만 전 믿는다고 했어요. 결혼해서 죽고 싶지 않다고요.”

    그들은 싸웠고 지금은 잠시 냉전 중이었다. 마리아가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으니, 로이드 쪽에서도 어쩔 수 없겠지만.

    마리아는 끝내 눈물짓지 않았다. 닳고 닳아 아픈 줄도 모르니, 안 그래도 마른 눈물이 흐를 리 없었다.

    “하지만 마리아 씨, 우리에게 방법이 있어요.”

    르니예가 씩 웃었다. 르니예는 벌써 머릿속으로 건강해진 마리아가 로이드와 식장에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무슨 방법이죠?”

    “우린 마리아 씨 소원을 들어주려고 왔어요.”

    르니예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믿기진 않겠지만, 우린 마리아 씨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답니다.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긴 하지만.”

    마리아는 당황스러운 듯, 대답을 하려다 말고 얼버무렸다.

    “소원을 비는 규칙을 지킬 것. 그리고 이 일은 절대 비밀에 부칠 것.”

    “그게, 조건 전부예요?”

    “네. 하지만 어기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해요.”

    마리아는 이걸 믿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 제안은 밑져야 본전이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꼭 빌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비밀에 관해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죽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죽다뇨. 소원을 빌면 마리아 씨는 살 수 있어요.”

    마리아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 소원은 그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로이드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요.”

    “아직 기회가 있어요. 지금이라도 살게 해 달라고 빌어요.”

    벨데메르의 조각상 앞. 르니예는 블러디 사파이어를 넘기려다가 멈칫했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마리아 님.”

    어쩐 일로 샤피로가 르니예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고 나섰다. 에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아니 두 사람과 한 사역마의 간절한 눈빛에도 마리아는 단호했다.

    “살고 죽는 건, 신께서 결정하는 일이십니다.”

    마리아가 옅게 웃으며 르니예의 손바닥에서 블러디 사파이어를 가져갔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전 그 소원이면 족해요.”

    마리아는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가서 벨데메르의 입술로 블러디 사파이어를 쏙 집어넣었다.

    단단한 보석이 액체처럼 녹아 사라지자 마리아는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괜찮아요. 자, 어서 소원을 비세요.”

    르니예와 눈빛을 교환한 마리아는 다시 용기를 내어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로이드의 머릿속에서 제가 존재하는 기억은 전부 지워 주세요.”

    공기가 흐르지 않는 듯, 숨이 턱 막히는 정적이 아주 찰나 이어졌다.

    “네 소원은 이뤄졌다.”

    그 말을 듣는 동시에, 샤피로는 안대로 마리아의 눈을 가렸다. 소원을 빈 다음 조각상을 절대 쳐다보면 안 된다는 규칙을 새로 정한 탓이었다.

    “샤피로, 어서 가. 마리아 씨, 다음에 봬요.”

    조각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샤피로는 마리아를 들다시피 해 날랐다.

    “번거롭네요.”

    “동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곧 조각상이 갈라지며 벨데메르가 나올 테니까. 르니예는 기다란 로브를 가지고 있다가 조각상이 갈라지는 동시에 던졌다.

    “…….”

    조각상 안에서 튀어나온 손이 로브를 그러쥐었다. 조각상이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와 함께 르니예의 귓가로 에니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아, 우리 작은 마님께서 벨데메르 님의 남성미에 반하셨구나.”

    르니예는 고개를 돌려 에니를 쳐다보았다. 에니는 얼른 두 눈을 가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드러난 입매에 장난기가 잔뜩 어려 있어 르니예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벨데메르, 괜찮아요?”

    “괜찮다.”

    벨데메르는 로브를 걸치며 한 발 한 발 조각상 밖으로 나왔다. 차디찬 지면에서부터 강한 에너지가 올라왔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활력이 손가락 끝까지 퍼졌다. 푹 자고 나온 듯 상쾌했고, 신체를 한계로 몰아붙이고 난 다음처럼 근육 하나하나가 흥분으로 꿈틀거렸다.

    “이상하군.”

    “뭐가요?”

    “괜찮다는 것 자체가.”

    봉인이 되었다가 나왔을 때는, 체력적으로 힘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상식적인 것 아닌가.

    하긴 지상의 상식이 통할 존재는 아니지. 그러나 충분히 조사해 볼 만한 일이었다.

    일단 기록을 해야겠군.

    “벨데메르, 여기 신발도 준비했…….”

    르니예는 준비했던 신발을 꺼내서 벨데메르에게로 건넸다. 하지만 당장 가 기록을 남길 생각에 가득 찬 벨데메르에게 르니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신발 신고 가지.”

    벨데메르는 신발을 들고 기다리는 르니예의 손을 모른 채 벌써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흩날리는 로브 자락을 보다가 르니예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입이 썼다. 벨데메르가 다정하게 대화라도 나눌 줄 알았었나. 무심코 기대를 하고 있었나 보다.

    벨데메르가 보여 준 다정함이 진짜라고 믿었던 건지, 아니면 진짜이길 바랐던 건지.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건 오로지 소원 때문이라는 걸.

    르니예는 신발을 도로 가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저도 모르게 했던 기대도 마음 한쪽으로 집어넣었다.

    “저기 샤피로 오네요.”

    샤피로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달리는 속도를 보니 확실히 알겠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 이제 집으로 가요, 작은 마님.”

    “안 돼, 에니.”

    르니예가 바닥에 널브러진 조각들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저거 다시 붙여야 돼.”

    “해 뜨기 전에 얼른 하시죠, 르니예 님.”

    “……?”

    르니예와 샤피로는 이제 익숙한 듯 조각을 주워서, 샤피로가 특별 재료로 만든 접착제를 싹싹 발랐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에니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다시 붙일 거였으면 주변에 이불이라도 좀 깔아 놓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이렇게 조각나진 않을 텐데.”

    “……!”

    “……!”

    샤피로의 르니예의 시선이 허공에서 붙었다. 그들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 * *

    다음 날, 르니예는 아무래도 마리아가 마음에 걸렸다. 해서 마리아의 집을 찾아갔다가 그녀가 구슬피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리아, 무슨 일 있어요?”

    마리아가 하도 울어 빨갛게 부은 눈으로 르니예를 보며 말했다.

    “로이드가, 로이드가…….”

    “로이드가?”

    “바보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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