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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31화 (31/120)
  • 31화. 귀인이 필요한 시간

    “…….”

    당혹스러웠다. 아주 곤란했다. 벨데메르는 제 안에서 차오르는 감정이 ‘질투’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에드윈에게 르니예를 빼앗길까 질투를 한다니. 하나는 그저 그런 기사 나부랭이고 하나는 그저 소원을 빈 사람일 뿐인데.

    “좀 특별한 소원이기는 하지.”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가 아주 생경한 감정을 느꼈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

    르니예의 그 밀고 당기기 전법이 먹힌 건가? 내가 넘어간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벨데메르는 차마 인정할 수 없었다. 벨데메르의 고민이 길어졌다. 그 고민 끝에 벨데메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 상황에 관한 두 가지 정도의 원인이 도출된다.”

    하나는 봉인되어 있는 동안, 봉인 그 자체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르니예의 소원으로 인한 영향을 벨데메르 역시 받았다는 것.

    벨데메르는 가설을 하나씩 확인해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조각상 그 자체였다. 그 안에 오래 갇혀있었으니 그 물질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샤피로, 나갈 채비를 해라.”

    “어디를 가려고 그러십니까, 주인님?”

    “조각상으로 갈 것이다.”

    샤피로는 벨데메르의 어깨 위에 로브를 걸치며 물었다.

    “갑자기 조각상에는 왜 가시는 겁니까?”

    “영혼을 가둘 수 있는 물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물질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반대의 속성을 가진 물질도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소원을 전부 들어주지 않고도 조각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게 되면, 저를 가둔 자의 뜻을 순순히 따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예전부터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왔군.”

    조각상 안에서는 조각상을 연구할 수 없었다. 그러니 조각상에 관한 연구를 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주인님, 영주가 주인님의 조각상을 자신의 물건으로 지정하고 관리하는 중이라 조각상 전체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펠레포네 영주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들었다. 자신의 조각상이라고 여기던 것이 사라진다면 사람을 풀어 찾을 것이고, 그러면 소란스러워진다.

    영주의 삶은 짧고, 샤피로의 시간은 그보다 훨씬 느리게 흐르니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하여 영주가 벨데메르의 조각상 앞에 자신의 명패를 붙여 놓았을 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가 죽고 난 뒤 조각상을 옮기면 되니까.

    “제가 괜한 짓을 했습니다.”

    “아니다, 샤피로.”

    벨데메르가 연구를 할 줄 알았다면, 그냥 신전에 두는 것을.

    샤피로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저 머리카락 한 올이면 족하다.”

    벨데메르는 조각상 앞에 섰다. 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조각상을 빚은 솜씨만큼은 인정이었다.

    “제가 할까요, 주인님?”

    “아니, 내가 하지.”

    벨데메르는 세심하게 표현된 조각상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잡아 옆으로 꺾었다.

    “단단하군.”

    잘 안 되었다. 벨데메르는 몇 번 힘을 주다가 저도 모르게 버릇처럼 마력을 동원했다. 단전에서 끓던 마력이 손끝으로 모인 순간이었다.

    “……!”

    “주, 주인님?”

    강한 현기증을 느낀 벨데메르가 조각상 쪽으로 휘청하더니, 그대로 조각상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장면을 한발 물러서 지켜보던 샤피로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주인님!”

    샤피로는 황급히 조각상으로 손을 뻗어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샤피로는 벨데메르의 입술 새로 떨어지는 블러디 사파이어를 받아 황망하게 서 있었다.

    “일단 여기 숨어 있어.”

    르니예는 체이스를 위해 상단 안 쓰지 않는 창고를 내주었다.

    “어지간하면 상단 밖으로 나돌아다니지 말고.”

    “돌은 어떡해?”

    “사람 시켜서 가져다주라고 할 테니까 얌전히 연습이나 하고 있어.”

    체이스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이 일자리에 숙식 제공이 되는 줄 몰랐는데, 복지가 좋네.”

    체이스가 히죽거리며 침대에 앉았다.

    “내가 고용주 하나 잘 골랐지.”

    르니예는 한숨을 쉬었다. 얄미운 놈. 하지만 밖으로 나돌아다니게 할 수도 없었다. 체이스는 아는 게 너무 많았다.

    “돌을 금으로 만드는 것보다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익히는 건 어때?”

    “고마워, 고마워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내 마음이 전해지지 않았어?”

    “전혀.”

    르니예가 정색하고 말하는데도 체이스는 좋다고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르니예도 힘이 빠진 채 픽 웃었다.

    그때 마주 보고 있던 체이스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저거.”

    체이스의 손가락이 르니예의 등 뒤를 가리켰다.

    “벨데메르 님의 사역마 아니야?”

    “맞아. 내가 가지고 싶다고 하니까 하나 만들어 준 거야.”

    르니예는 꿀벌을 생각하고 말했다. 그래도 나름 마법사였다고 사역마는 용케 잘도 알아보네. 아니면 벌이 너무 커서일지도?

    “벨데메르 님을 따라다니는 사역마랑 똑같은 거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

    “뭔 소리야?”

    이게 몇 대 얻어맞고 허벅지에 칼을 맞더니 시력까지 이상해졌나.

    르니예는 체이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샤피로?”

    르니예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샤피로가 여기에 왜 있지? 어떻게 들어온 거야? 그보다 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불길한 예감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르니예 님.”

    샤피로가 조용히 손바닥을 펴 보았다. 그의 손바닥 안에서 블러디 사파이어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아,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는데 벨데메르가 갑자기 조각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어.”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조각상 앞에서 쭈그려 앉아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무슨 기회란 말입니까, 르니예 님.”

    “소원 개수를 채울 기회지.”

    “어떻게요?”

    “그건, 이제 생각을 해 봐야지.”

    아무나 잡고 소원 있으세요? 저 조각상이 들어드립니다, 할 수는 없었다.

    “흠?”

    그런 르니예의 시야에 골목길이 들어왔다. 언젠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신비로운 노파가 와 그랬지.

    골목길에 귀인이 나타날 거라고.

    혹시 그 귀인이 아주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서 입까지 무거운 그런 사람은 아닐까?

    “르니예 님, 어디 가십니까?”

    “갑자기 저 골목길이 걸어 보고 싶어졌어.”

    “지금요? 이 상황에?”

    르니예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걸어야 해.”

    르니예는 앞서 걸었다. 샤피로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르니예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골목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막다른 길에 기하학무늬가 잔뜩 그려진 천막이 보였다.

    저 천막 안에 귀인이 있는 건가?

    “실례합니다.”

    르니예는 천막의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크고 작은 수정구슬이 어지러이 촛불을 반사하고, 천장에 매달린 약초에서 풀 냄새가 짙게 퍼졌다.

    “계세요?”

    귀인 님, 계시나요.

    르니예는 천막 입구에 서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귀인을 불러보았다.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 아, 그때 그 아가씨로군.”

    “할머니는 그때…….”

    천막 안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그 노파였다. 골목길로 가면 귀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던 바로 그 할머니 말이다.

    “귀인을 찾아왔구먼.”

    “할머니가 제 귀인이세요?”

    르니예의 순진한 물음에 노파가 껄껄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

    노파가 멍하니 서 있는 르니예와 샤피로에게 낡은 의자를 권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럼 저 사기당한 건가요?”

    어쩐지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내 홍보가 잘 먹힌 게지.”

    노파는 끄트머리가 다 떨어진 카드를 꺼내며 홀홀 웃었다.

    “혹시 알아? 내가 아가씨를 도울 수 있을지.”

    “……그럴 수 있으실 것 같아요.”

    노파의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에, 주름의 깊이는 지혜의 깊이처럼 보였다.

    게다가 노파의 직업은 점술가.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와 고민을, 간절한 소원을 털어놓았겠는가.

    “궁금한 게 있어요.”

    “그래, 아가씨. 뭐가 궁금하지?”

    “동업자를 찾고 있는데 어르신께서 해 주실지, 그게 궁금해요.”

    르니예의 계획은 이러했다. 노파에게 점을 보러 오는 이들 중, 간절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그 사람에 가, 노파의 조수라고 말하며 당신의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보겠느냐고 물어본다.

    “되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을 공략해야지. 애인을 만들어 주세요, 이런 소원도 안 돼.”

    “애인이 되어 주세요, 같은 것도 빼야 합니다.”

    샤피로의 말에 르니예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당연하지. 부인인 내가 있는데 애인이 생기면 되겠어?”

    “르니예 님께서는 자아 성찰을 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다.”

    남편을 따로 숨겨 놨던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다니. 샤피로의 비아냥거림에 같이 듣고 있던 에니가 이죽거렸다.

    “도자기 인형 주제에 자아 성찰이라는 말도 아네.”

    “저는 단순한 도자기 인형이 아닙니다, 친구분. 아니지, 친구가 아니라 하녀였던가요?”

    샤피로가 에니를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일개 하녀께서는 좀 빠지시죠.”

    에니와 샤피로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사이 르니예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인영을 주목하고 있었다.

    “저기 온다.”

    이 작전의 첫 번째 실험체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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