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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30화 (30/120)
  • 30화. 소원의 알고리즘

    체이스의 상처는 엄살을 부릴 만큼은 아니었다. 약을 바르고 하루 자니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르니예는 체이스의 능력이 왜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지 파악하기 위해 벨데메르에게 데려가려던 참이었다.

    “라포어 부인?”

    “네, 전데요.”

    영주 성에서 나온 병사가 르니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영주가 보낸 서신을 전달했다.

    “얼른 뜯어봐라, 르니예.”

    카밀이 초조한 듯 옆에서 재촉했다.

    “뭐라고 쓰여 있느냐?”

    “아버지의 형을 가택 연금으로 줄여 주신대요!”

    르니예는 뛸 듯이 기뻤다. 가택 연금이면 적어도 자기 방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는 있으니까.

    “어?”

    “왜 그래?”

    “가택 연금이긴 한데, 따로 마련된 집에서 해야 한대요. 이게 무슨 가택 연금이야?”

    르니예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그 집이 어떤지 가 봐야 알겠지만, 감옥보다는 낫겠지.

    “그 편지 내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병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온 에드윈이, 르니예의 손에 있는 편지를 가져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르니예는 혹시나 하며 물었다.

    “혹시 에드윈 당신이 손을 쓴 거예요?”

    “아닙니다.”

    에드윈이 아니면, 누구지? 르니예의 머릿속에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벨데메르가?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이야말로 르니예가 안달 나 애걸복걸하게 만들겠다는 각오를 새로 하고서.

    그걸 모르는 르니예는 한 발 한 발 야수의 입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벨데메르.”

    르니예는 여전히 긴가민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우리 아버지 이감하는 데, 벨데메르가 손써 준 거예요?”

    “맞습니다, 르니예 님.”

    대답은 벨데메르가 아니라 샤피로에게서 나왔다.

    “주인님께서 특별히,”

    “벨데메르!”

    샤피로의 말을 끊으며 르니예가 벨데메르의 품에 폭 안겼다.

    “…….”

    르니예가 품에 들어오는 순간, 벨데메르는 제 안에서 무언가 허물어짐을 느꼈다.

    무너진 것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앙심인가, 아니면 새로이 다진 결심인가.

    “정말 고마워요.”

    르니예가 그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그러다 문득 그가 스킨십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앗, 미안해요.”

    르니예가 파드득 떨어졌다. 입술도 몇 번이나 붙이고, 끌어안고 자기도 했지만 그건 다 벨데메르가 원해서였다.

    원치 않는 포옹은 싫어할지도 몰라.

    “끌어안는 거 싫어하죠?”

    “딱히.”

    벨데메르의 대답에 르니예의 입가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고마워요. 진심으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르니예의 미소를 보는 벨데메르의 입가도 슬그머니 올라갔다. 본인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따라 웃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 거예요? 영주님을 만났어요?”

    “패러히트 공작이라고 예전에 주인님께 신세를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신세를 갚으라고 한 것이지요.”

    “그렇구나. 무슨 신세를 졌는데요?”

    “대답은 계속해서 제가 해 드리고 있습니다만, 르니예 님.”

    샤피로의 음성에서 못마땅한 기색이 드러났다. 르니예는 민망해하며 샤피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그때 그들 사이로 새로운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다.

    “저도 왔는데요.”

    체이스였다.

    “어떻게 아는 척 좀 해 주시렵니까?”

    “능력이 전혀 제어가 안 됩니다, 벨데메르 님.”

    왜 안 되는 걸까. 체이스는 궁금해 미치기 직전이었다.

    “왜 안 되는 거예요?”

    르니예도 궁금했다. 소원을 빌 때 규칙도 지켰고, 벨데메르가 소원이 이뤄졌다고 말로 해 주기까지 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그야 본인이 능력을 쓰는 방법을 모르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샤피로가 뭐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소원을 빌었는데 왜 능력 쓰는 방법을 제가 모르는 건지 그게 궁금한 겁니다.”

    “능력을 달라고 해서 능력을 주었다. 능력을 쓰는 방법 정도는 알아서 해라.”

    능력을 달라고 하면, 능력만 주는 거야? 능력을 쓰는 방법은 안 알려 주고?

    르니예는 황당함에 두 눈을 연신 깜빡였다.

    “어떻게 알아서 하란 말씀입니까?”

    체이스의 간절한 물음에 샤피로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연습을 하십시오, 연습을.”

    “그러니까 연습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건 알아서.”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르니예는 위로의 마음을 담아 체이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덕분에 르니예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소원은 아주 구체적으로 빌어야 한다는 것을.

    “라포어 경, 바쁩니까?”

    “아닙니다. 들어오세요, 부단주.”

    카밀이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에드윈은 그에게 의자를 권했다.

    “무슨 일입니까?”

    카밀이 에드윈을 찾아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뭐든 물어보세요.”

    “패러히트 공작님과 잘 아는 사입니까?”

    패러히트 공작? 멀리서 얼굴만 몇 번 본 적 있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겁니까?”

    “영주 성에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자가 그러더군요. 이번 이감 건은 공작님이 손을 써 준 거라고.”

    콜론이 패러히트 공작을 알 리가 없다. 그건 십수 년을 옆에서 지켜온 카밀이 제일 잘 알았다.

    수도 생활을 해 본 적도 없는 르니예일 리도 없으니 당연히 에드윈일 것이라 추측한 것이다.

    “저는 그분을 모릅니다. 패러히트 공작께서 힘을 써 주신 게 확실합니까?”

    “그자 말로는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알아봐야겠군요.”

    카밀은 그리 말하고 자리를 떴다. 에드윈은 머리가 복잡했다. 패러히트 공작이라니. 왕실에 비견할 만큼의 권세가에서 한낱 상인을 신경 써 주는 것이 수상했다.

    “하지만 패러히트가에서 2왕자와 손을 잡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그걸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런데 왜 자꾸 그자가 관여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

    자연스럽게 벨데메르가 떠올랐다. 패러히트 공작에게 그런 청탁을 할 수 있을 정도란 말인가? 알몸으로 밖을 나돌아다니는 주제에.

    하지만 패러히트 공작에 줄을 댈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왜 르니예를 이용하려 드는 것일까.

    “역시, 상단이 필요한 건가?”

    상단 전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어딘가에 이용하려는 셈이 분명하다.

    “더는 두고 볼 수 없겠어.”

    * * *

    “훗.”

    벨데메르의 옷시중을 듣던 샤피로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지?”

    “죄송합니다, 주인님. 르니예 님께서 재미있는 일을 하고 계셔서요.”

    샤피로가 또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사원에서 기도를 하시는 중인데, 이걸 기도라고 봐야 할지.”

    “무슨 기도를 하는데 그러지?”

    “착한 일을 많이 했으니 잘 봐달랍니다.”

    이건 기도가 아니라, 아부 아닌가?

    샤피로가 히죽히죽 웃으며 벨데메르에게 기도를 전하던 그 시각.

    르니예는 사원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중이다.

    “페더리 씨는 이제 마을에 나와 살게 되었어요.”

    숲 속에서 르니예를 구해 준 페더리 네 가족은, 과하게 낸 이자를 모두 돌려받았다. 그들은 르니예의 사과도 받아 주었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살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착한 일 많이 할게요.”

    다시 되살려 주신 걸 후회하지 않게.

    “그러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벨데메르에게도요.”

    르니예는 벨데메르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가 아버지를 위해 손써 주는 것도 모르고, 꿍꿍이가 있다느니, 조각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즐겨 보자느니, 그딴 소리를 했다니.

    벨데메르를 이용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그의 육체만 탐한 그런, 쓰레기가 된 기분.

    “벨데메르도 충분히 벌을 받고 있어요. 원치 않는 사람이랑 결혼하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래요.”

    에드윈이 그랬다. 벨데메르도 소원 때문에 붙어 있는 거니, 얼추 비슷한 감정이겠지.

    “벨데메르는 지금 감옥에 갇혀서 벌받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벨데메르를 조금만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벨데메르가 계속해서 소원을 들어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얼른 봉인이 풀리고 그가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비록 그렇게 되면 벨데메르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반성하고 있었군.”

    샤피로를 통해서 기도를 듣던 벨데메르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도 같군.”

    벨데메르는 혀를 찼다.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을 상대로 질투를 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질투?”

    벨데메르의 눈썹이 구겨졌다. 혼란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내가 질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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