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내가 당신의 남편이라는 걸
“부인께서 이 열쇠를 훔쳐 오라고 시키셨습니까?”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르니예가 시켰을 거라는 확신. 르니예는 어이가 없었다.
비록 과거에 프리야를 미워해서 못되게 굴긴 했다.
다 씻은 그릇 위에 설거지할 그릇을 올려 줘서 두 번 하게 한다든가, 밥을 남들 주는 거 반만 준다든가, 등등.
물론 그 또한 잘못된 행동이지만 적어도 도둑질은 안 시켰다. 도둑으로 몰려고 한 적은 있었지만. 그게 그거인가?
“금고 열쇠네요.”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모른 척이 아니라, 모르는 거다. 르니예는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에드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
그때 에드윈 뒤에 서 있던 프리야와 눈이 마주쳤다. 프리야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얼굴 근육을 동원해서 말하고 있었다.
한 번만 넘어가 달라고.
“부인.”
저게 정말 나한테 별걸 다 뒤집어씌우네.
르니예는 눈을 부라렸다.
“부인이 시킨 겁니까?”
에드윈이 재차 물었다. 그는 어지간히도 화가 난 것 같았다. 프리야가 그렇게나 소중하면 얼른 이혼하고 나가 살지, 왜 여기 붙어 있담.
“아니, 그게.”
프리야와 또 눈이 마주쳤다. 간절한 눈빛을 르니예는 애써 외면했다.
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지. 솔직히 나한테 도와달라는 게 말이 돼?
르니예는 속으로 험한 말을 읊조렸다.
“맞습니까?”
에드윈이 자꾸만 대답을 재촉했다. 부인하면, 둘 사이가 틀어지겠지? 아니야, 잠깐, 그건 안 되지.
프리야를 이용해서 에드윈이 빨리 이혼 서류에 서명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둘 사이가 멀어지면 곤란했다. 그러다가 프리야랑 에드윈이 헤어져서, 저와 영영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러면 완전 망하는 것이다. 그건 절대 안 돼!
“그래요. 내가 시켰어요.”
“정말 부인이 시켰습니까?”
“네.”
그래, 에드윈한테 좋은 사람 이어 봐야 뭐하겠나. 도둑질까지 시킨 걸 알면 정떨어져서 당장 이혼하자고 할 수도 있겠지.
“어떻게 프리야에게 도둑질까지 시키는 겁니까?”
저번에도 에드윈 열쇠를 훔쳐서 금고 안에 들어갔다 왔나 보네.
이걸로 에드윈과 프리야가 한패는 아니라는 사실은 하나 알았다.
“부인께도 열쇠가 있으니, 부인이 필요해 훔쳐 오라고 한 것은 아니겠고.”
에드윈은 흥분을 꾹꾹 눌러 읊조렸다.
“역시 그 남자에게 주려고 한 겁니까?”
“예?”
르니예가 황당한 얼굴로 프리야를 쳐다보았다. 야, 아무리 둘러댈 말이 없어도 그렇지 너무하잖아.
“…….”
이 점은 나도 미안하게 됐다. 프리야가 눈썹을 내려뜨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남자를 내 자리에 앉힐 셈입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혼을 하자고 했겠죠?”
에드윈은 손등이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이혼 서류에 서명도 하기 전에 벌써 남편 대접을 해 주는 건가?
금고 열쇠를 넘길 만큼 그자를 신뢰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금고 열쇠를 넘길 생각을 하지?
에드윈의 머릿속이 분노로 차올랐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분노였다.
“부인, 잊지 마세요. 아직 우리는 부부이고, 내가 당신의 남편이라는 걸.”
에드윈은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하고 방을 떠났다.
“자꾸 이러면 이혼을 재고하는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요? 진심이에요? 에드윈!”
그 등 뒤에 대고 외쳤지만 에드윈은 이미 저만치 가 버린 뒤였다. 이혼을 재고한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르니예는 먹구름이 낀 얼굴 그대로 프리야를 쳐다보았다.
어쩜 이렇게 도움이 안 될까. 쓸모가 있어서 도와주긴 했지만, 그래도 얄미운 건 얄미운 거였다.
“왜 그렇게 보세요?”
심지어 뻔뻔하기까지 해. 그래도 속으로 심성은 착한 애라고 생각했었는데.
르니예는 왠지 모를 배신감까지 느꼈다.
“보통 이럴 때 고맙다고 하지 않니?”
“아아, 고맙습니다.”
성의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들지 않은 목소리였다.
“근데 왜 도와주셨어요?”
네가 도와달라며!
르니예는 속에서 올라오는 천불을 애써 삼켰다.
“그동안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군 것에 대한 사과.”
는 아니고, 너를 이용해 에드윈에게 이혼을 종용할 계획이다, 프리야.
“왜 그러세요, 무섭게. 꼭 죽었다 깨어난 사람처럼 변하셨네.”
사과라는 말을 들은 프리야는 못 볼 것을 본 표정이었다.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죽었다 깨어난 사람이라니?”
정곡을 찔린 르니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도와줬는데 그렇게 심한 말을.”
“……이게 심한 말이에요?”
“하여간 앞으로 도둑질하지 마. 굳이 할 거면 들키지나 말든지.”
르니예가 흥, 하고서 자리를 떴다. 프리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진짜 왜 저래.”
* * *
“다녀왔나, 샤피로?”
“예, 주인님. 일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로버트 패러히트.
벨데메르가 저주로 조각상에 갇히기 얼마 전, 그는 정적에게 기습을 당해 죽기 직전인 상태로 벨데메르에게 발견되었다.
벨데메르는 그를 살려 주었고, 덕분에 그는 가문을 되찾았다.
‘이 인장을 받아 주시오, 대마법사여.’
패러히트는 자신의 인장을 반으로 잘라 벨데메르에게 건넸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패러히트 가문으로 오시오. 그때는 내가 내 모든 것을 걸고 도울 테니.’
‘그러지.’
그 당시에 벨데메르는 인장을 쓸 일이 있겠나 싶었다. 로버트 패러히트가 백골이 되어 사라진 뒤에 쓸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로버트 패러히트 공이 죽으며 유언으로 남겼답니다. 인장을 보여 주자마자 무엇을 도와주냐고 묻더군요.”
샤피로는 그에게 찾아간 목적을 밝혔다.
‘늙고 병든 죄인 하나를 감옥에서 빼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죄인을?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인가?’
‘듣자 하니 탈세라더군요. 사면해 달란 뜻이 아닙니다. 늙고 병든 자이니 가택 연금 정도로 처벌을 낮출 수 있게 힘을 써 달라는 겁니다.’
펠레포네 영주의 직위는 남작. 패러히트는 공작이었다. 일면식이 없어도 충분히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상단주는 곧 가택 연금으로 풀려날 겁니다.”
“잘했다, 샤피로.”
벨데메르는 냄비를 휘휘 저으며 샤피로를 칭찬했다.
“그런데 주인님께서는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토마토 스튜를 끓이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걸 왜 끓이느냐고 샤피로는 물은 것이다.
“집에 있으려니 적적하여서 해 보았다. 요리도 생각 외로 즐거운 면이 있어.”
“……새로 생긴 취미라도 되는 겁니까?”
“그렇다.”
샤피로는 믿고 싶었다.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토마토 스튜는 르니예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샤피로는 르니예가 앙상하게 말랐다며 걱정을 했고. 인과관계가 뻔한 일이었다.
“안 드십니까?”
지금도 그렇다. 벨데메르는 음식을 완성해 놓고 한 술도 뜨지 않았다. 르니예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튜가 차갑게 식고, 빵이 딱딱하게 굳어도 르니예는 오지 않았다.
“요리하며 간을 보았더니 입맛이 없군.”
“…….”
입맛이 없는 게 아니라 화가 나신 것 같은데요?
샤피로는 벨데메르의 손바닥 안에서 구겨지는 스푼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르니예 님도 급한 일이 있으셨겠죠.”
“설마 또 납치인가?”
이제 상단 앞으로 매일 마중까지 나가야 하는 건가?
벨데메르가 어서 르니예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라고 신호를 보냈다.
“흠, 남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남자 목소리?”
“이건 뭐랄까, 신음 같은데요?”
같은 시각.
르니예는 시간 맞춰 벨데메르에게 가는 중이었다.
몇 걸음 가지도 못해서 피투성이가 된 체이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고용주! 도움!”
넝마가 된 옷을 입고, 머리에는 피떡이 진 채 달려오는 체이스를 르니예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르니예는 체이스를 비어 있는 창고 안에 집어넣었다. 대충 보아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몰골이라서.
“무슨 일인데 도망을, 체이스!”
안전한 곳에 오자, 체이스는 긴장을 잃고 픽 쓰러졌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다리에, 칼…….”
체이스는 목탄으로 돌멩이 위에 마법진을 그렸다. 연금술사가 되겠다고 배워 둔 잔재주 덕에 어떻게 그 지하실에서 빠져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금방 들켰고 도망치던 와중에 다리에 칼을 맞았다.
“일단, 지혈부터 하자.”
“제대로 누워 봐. 똑바로 누우라고.”
샤피로가 르니예의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바지 찢어야겠다.”
“……뭘 찢어?”
“르니예 님께서 바지를 찢으셨습니다.”
샤피로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하으, 너무 세게, 하지 마, 읏.”
샤피로는 들리는 대로 신음까지 따라 했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더 할까요?”
“됐다.”
벨데메르의 손안에서 스푼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다른 남자가 또 있다니.”
벨데메르는 믿을 수 없었다.
나 하나로는 만족이 안 되는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키스까지 해 주었는데!
충격으로 허옇게 질려가는 벨데메르를 앞에 두고 샤피로는 머리를 굴렸다.
“주인님, 제 생각에 이것은 그것입니다.”
“그것이 뭐지?”
“밀고 당기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벨데메르의 얼굴에 샤피로가 설명을 덧붙였다,
“연애 전략이라고 할 수 있죠. 상대방을 쥐고 혼을 쏙 빼놓은 다음 자기에게 푹 빠지게 만드는 겁니다.”
“지금 르니예가 나한테 그 전략을 쓰고 있다는 건가?”
“주인님의 마음까지 가지고 싶으신 게 아니겠습니까.”
욕심 많은 르니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샤피로는 확신을 가지고 이어 말했다.
“원래 인간이란 손 주면 안아 달라, 안아 주면 입 맞춰 달라 하는 존재입니다. 몸을 주면 마음도 달라고 하죠. 주인님께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초월하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기가 차는군.”
어떻게 내 마음마저 가지려 드는 거지, 르니예? 벨데메르는 흘러나오는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쉽게 넘어가 주지 않을 것이다.”
“물론이지요, 주인님.”
“내가 르니예에게 마음을 주는 일은 없어.”
끝끝내 마음을 주지 않아, 안달 나게 만들어 줄 것이었다. 결국 자신의 마음을 얻지 못한 르니예가 한평생을 아쉬움 속에서 살아가도록.
“르니예가 깨닫게 할 것이다. 그런 전략을 아무리 사용해도 본인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몸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