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또 할까?
“이딴 꼼수를 부려?”
“꼼수가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정말 아닌, 컥!”
체이스는 발로 배를 얻어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체이스를 납치한 이들은 마을에 돌아다니는 돌이란 돌은 전부 주워 왔다.
그리고 그것을 전부 금으로 만들라고 시켰다.
“능력이 됐다 안 됐다 하는 걸 어쩌란 말이에요.”
하지만 체이스는 아직 능력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래도 혼자 할 때는 크기에 상관없이 간헐적으로 발현이 되었었다. 그런데 잡혀 온 뒤로는 조그만 자갈만 금으로 만들 수 있었다.
“저도 미치겠, 큭!”
커다란 손이 체이스의 뺨을 후려쳤다. 체이스가 옆으로 픽 고꾸라졌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오늘 밤까지 저거 금으로 못 만들면 손목 하나 없어질 줄 알아.”
“소, 손목이요?”
“그래.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못 만들면, 다른 손목도 없어지겠지.”
남자가 발끝으로 체이스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팔꿈치만 남아 있을 때 능력을 더 잘 쓸 수도 있으니까 실험 삼아 잘라 봐?”
무슨 실험을 남의 손목으로 해?
체이스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두 손이 다 잘릴 기세였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저, 저기.”
“왜?”
“필요한 게 하나 있어요. 그게 있으면 저 바위도 금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남자가 허리를 숙여 체이스와 눈을 맞췄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다 드려야지. 뭐가 필요하실까? 망치 같은 게 있으면 자물쇠를 부수기 좋겠지? 아니면 휘두르기 좋게 톱은 어때?”
남자는 도망칠 무기를 구하려는 체이스의 심리를 간파했다. 그러나 체이스가 필요한 무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저, 그냥 목탄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요.”
* * *
“이제 일어나야 할 것 같군, 르니예.”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르니예를 깨웠다. 떠질 듯 말 듯 하던 르니예의 눈꺼풀이 결국 떠지지 않았다.
“하긴 상단주의 딸이라고 했으니, 아침에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데메르의 손가락은 내내 르니예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사이를 빠져나가는 감각이 좋았다.
“……방금 건, 아주 변태 같았어.”
벨데메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르니예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어젯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르니예를 유혹하겠다고 키스했다가, 벨데메르 본인이 흔들릴 뻔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르니예도 대단했다.
하긴, 그 정도는 해야 나의 반려……까지는 아니라도 한때 부부지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르니예, 어서 일어나.”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어제는 뭣도 모르고 흔들렸지만, 오늘부터는 아니다.
“으음.”
르니예가 힘겹게 눈을 떴다. 벨데메르는 아침을 시작하는 그 통통한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 잤나?”
르니예의 볼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래도 작전이 영 산으로 가는 모양은 아니었다. 앞으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 순간이 기억날 것이다, 르니예,
그리고 슬프겠지, 이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에. 평생 아침저녁으로 이 벨데메르를 잃은 슬픔 속에 빠져 살겠지만 어쩌겠어.
그것이 대가인 것을.
“……?”
수줍게 침대를 빠져나가는 르니예의 뒷모습을 보던 벨데메르의 미간이 구겨졌다.
“잠옷이 원래 저렇게 헐렁했나?”
르니예가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뭘 좀 먹고 가지.”
“입맛이 영 없어서요.”
옷을 갈아입고 나온 르니예는 아침을 마다하고 상단으로 향했다. 어제도 저녁을 먹지 않은 것 같던데.
“살이 좀 빠진 것 같지 않나?”
“주인님, 살 빠지셨습니까?”
“아니, 나 말고. 르니예 말이다.”
샤피로가 벨데메르를 위한 아침을 차리며 대답했다.
“아까 옷시중을 들 때 보니 확실히 살이 빠지신 것 같더군요. 마음고생을 해서 그러신가.”
두 집 살림을 들키고, 아버지가 잡혀가고, 본인은 납치당해, 벨데메르는 조각상에 들어갔다 나와, 살이 안 빠지고는 못 배길 상황이었다.
“거의 식사를 안 하는 것 같다. 앙상하게 마른 것을 보니.”
“앙상하게요?”
앙상한 것까지는 아닌데. 드레스 허리가 약간 헐렁한 정도였을 뿐이었다.
“겨울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지지 않았나. 걷다가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겠어.”
겨울에 마른 나뭇가지? 샤피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주인님이 조각상 안에 있느라 겨울에 마른 나뭇가지를 왜곡해 기억하시는 건 아닐까?
“아마 아버지라는 자가 감옥에 있기 때문이겠지.”
아버지 걱정에 눈이 팅팅 부을 정도로 울기까지 했으니.
“샤피로, 그자가 아직도 공작인가?”
“패러히트 공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벨데메르와 약속한 본인은 백골이 된 지 오래지만, 그의 후손은 여전히 공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패러히트 가문의 인장을 가져가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고 일러라.”
“약속을 어떻게 이행하라고 할까요, 주인님?”
벨데메르가 이상하다. 마음이 풀렸나? 그랬다면 다행이지만, 안 그런 거 같은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데, 지금.
르니예는 영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어제는…….”
르니예는 자기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어제는 좋았다.
그러니까 좀 즐겨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이혼하고 나면 벨데메르는 조각상으로 돌아갈 테니까.”
두 집 살림하던 거 들키느라 못 즐겼던 것을 지금이라도 즐겨 봐?
“내 소원이니까 나도 즐길 권리가 있는 거 아니겠어? 아니겠니, 꿀벌아?”
“…….”
꿀벌은 말이 없었다. 왜냐면 꿀벌은 말을 못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꿀벌에게는 귀가 있었다.
르니예에게 다행인 건 지금 샤피로가 바빠 그녀를 염탐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장부를 어디에 숨겼을까.”
르니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꿀벌.”
윙?
“망 잘 봐.”
르니예가 콜론의 방문을 따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꿀벌은 졸지에 문 앞에 붙어 망보는 신세가 되었다.
“서랍에 넣었을 거야.”
르니예는 콜론의 서랍을 아예 통째로 뺐다.
“하지만 평범하게 두지는 않았겠지.”
르니예는 서랍장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밑판도 뜯고, 아예 뒤집어엎어 탈탈 털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 어디 있을 건데.”
그런 르니예의 시야에 서랍장 안쪽이 들어왔다. 손을 뻗은 르니예는 그곳에 있는 비밀 공간을 찾아냈다.
“그렇지.”
르니예가 찾은 것은 콜론의 비상금 장부였다. 장부라고 하기에 아주 작은 손바닥만 한 수첩.
그 안에 상단의 모든 재산이 적혀 있다. 에드윈이 가져가 보고 있는 장부는 사실 재산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요, 에드윈.”
왜냐면 르니예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장부와 상단의 재산을 정확히 일치시킬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부당하게 얻은 이자와 밀린 임금을 주고 나면 그보다 더 적을지도.
“아버지, 미안.”
아버지가 말했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내가 착한 일을 한다고 신께 맹세했어.”
그런데 이제 그걸 아버지 돈으로 할 거야.
* * *
“여기 들어온 지 벌써 세 달이 넘었어.”
프리야는 위기감을 느꼈다. 계획대로 됐다면 진작에 소원을 빌고 여기를 떴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쯤 소원을 빌 수 있을지 예상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차선책으로 세운 계획을 실행할 때가 왔다. 그 금고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 말고도 귀한 물건이 가득했다. 그것 중 서너 개만 훔쳐도 평생 먹고살 수 있었다.
프리야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에드윈의 방으로 들어갔다. 에드윈이 열쇠를 어디에 두는지 정도는 진작 파악하고 있었다.
“소원 못 빌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다른 것도 훔쳐서 나오는 건데.”
그게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어차피 소원을 빌어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다른 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부피가 작은 걸로 가져오는 게 숨기기도 낫겠지? 그래, 이번에 들어가면 일단 다이아몬드 팔찌를 하나 훔쳐야겠다. 그 팔찌랑 귀걸이까지 세트였던가? 그럼 다 훔치고.
“……프리야?”
“자, 작은 주인님.”
프리야가 열쇠를 훔쳐 일어나다가 문간에 서 있는 에드윈을 보고는 휘청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지? 분명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지금 내 방에서 뭐 하는 거지?”
프리야의 얼굴에 낭패가 스쳤다.
“금고 열쇠로군. 지금 그걸 훔치려는 건가?”
프리야가 도둑질이라니. 적잖이 충격이었다. 에드윈은 화내지 않고 차분히 물었다. 프리야에게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 이유가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게 실은.”
프리야는 입 안 여린 살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젠장, 어쩌지?
“화내지 않을 테니 말해 봐.”
“시, 실은, 작은 마님이 시키셨어요.”
프리야는 훌쩍였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는 척하면서 눈을 찔러 눈물이 핑 돌게 했다.
“부인께서?”
“네, 이걸 가지고 오지 않으면 다시 노예로 돌려보낸다고 하셔서…….”
프리야가 울먹였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에드윈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 열쇠를 가져오라고 시켰지? 부인께도 같은 열쇠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열쇠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시면서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프리야가 넌지시 벨데메르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 이 정도면 앞뒤가 맞는 거짓말이다.
이렇게 넘어가라, 제발 넘어가라.
“하, 그 남자에게 주려고 했던 거로군? 그렇다고 네게 도둑질을 시키다니.”
에드윈은 화를 냈다. 그는 그대로 르니예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주인님? 어디 가세요?”
“네게 다시는 이런 짓을 시키지 말라고 할 것이다.”
망했다. 프리야는 망했음을 직감했다. 제가 울며 매달려도 에드윈은 기어코 르니예의 앞에 가 섰다.
그러곤 어리둥절해하는 르니예에게 심문하듯 물었다.
“부인께서 이 열쇠를 훔쳐 오라고 시키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