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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27화 (27/120)
  • 27화. 왜라니, 내가 그대의 남편이잖아

    “읍, 읍읍읍!”

    돌을 구해서 여인숙으로 향하는 길에 체이스는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입에는 재갈이, 머리에는 봉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으읍! 읍!”

    “풀어줘라.”

    봉투가 벗겨지고 재갈이 풀리자 체이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까맣게 점멸되었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왔다.

    여인숙은 확실히 아니었다. 체이스는 잔뜩 겁먹은 눈으로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당신, 당신은!”

    체이스의 시야에 여인숙 주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여인숙 주인은 미안한 표정 하나 없이 체이스에게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우리 정보원이지.”

    그때 체이스의 시야를 두툼한 다리가 가리고 섰다. 체이스의 시선이 그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누, 누구세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네가 돌을 금으로 만들 줄 안다며?”

    체이스는 남자의 말에 순간 얼어붙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걸?

    “저, 저는 그런 거 못 해요.”

    “본 사람 저기 바로 서 있는데 발뺌할 셈인가?”

    남자가 손짓하자 부하로 보이는 사람이 체이스 앞으로 돌멩이 하나를 굴렸다.

    “이 돌이 금으로 변하면 너는 살고,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뭐겠어? 당연히 죽겠지.”

    * * *

    “집이 깔끔해졌네, 샤피로.”

    집 안을 살피던 르니예가 감탄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여기저기 책이 널려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위층의 빈방으로 옮겼습니다.”

    “잘했어. 알아서 워낙 집 관리를 잘하니까 내가 딱히 잔소리할 게 없네.”

    샤피로의 살림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리고 르니예는 칭찬할 건 하는 편이었다.

    “……뭐, 그런 새삼스러운 말씀을.”

    흥, 칭찬 좀 해 준다고 해서 나까지 넘어갈 줄 아십니까, 르니예 님? 그래도, 뭐, 보는 눈은 좀 있네.

    샤피로는 새침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위층에 계십니다.”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두 번 노크하니 안에서 들어오란 벨데메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벨데메르.”

    다시 집으로 돌아오라니. 벨데메르에게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르니예는 의문을 가득 안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했는데, 벨데메르가 한발 빨랐다.

    “울었나?”

    “네? 아.”

    마차에서 우느라 퉁퉁 부은 눈가로 벨데메르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왜 울었지?”

    “아버지 면회를 갔는데, 감옥이 너무 좁고 지저분해서.”

    르니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또 괜찮은 척 입가를 끌어 올렸다.

    “영주님께 부탁드리면 더 나은 곳으로 옮겨 주실지도 몰라요.”

    그리고 르니예는 한숨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옮겨 주실 것 같지는 않지만.”

    영주의 태도가 아주 꺼림칙했다. 뇌물을 달라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 느낌이었다.

    “저기, 벨데메르.”

    르니예가 조심스럽게 벨데메르를 불렀다.

    “나 정말 다시 여기로 들어와요?”

    “왜, 싫은가?”

    “아뇨, 싫은 게 아니라 정말 괜찮은가 해서요.”

    나한테 남편이 있다는 걸 알고도 나랑 한방을 쓰고 싶을까?

    르니예는 에드윈과 프리야의 사이를 알고 나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벨데메르도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아니지, 벨데메르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냥 저를 속였다는 괘씸함 정도였겠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이제 여기가 그대 집이니.”

    벨데메르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그리고 내가 그대의 남편이잖아.”

    르니예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들어왔다. 벨데메르는 수면용 가운을 입고 있었다.

    느슨하게 벌어진 가운 사이로 그의 탄탄한 몸매가 드러났다.

    마법사가 대체 왜 몸까지 좋은 건데. 그럴 필요가 있냐고.

    “그리 곁눈질로 볼 필요 없을 텐데.”

    벨데메르가 귀신같이 르니예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르니예는 흠칫 놀랐다. 얼굴로 열이 훅 몰렸다.

    “그대는 마음껏 보아도 좋다고 한 말을 잊었나?”

    “잊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마음껏 보아도 괜찮나? 르니예는 속으로 제 뺨을 때렸다.

    지금 그의 몸을 감상할 때냐, 르니예? 지금 벨데메르가 이상하다는 것을 못 느끼겠어?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벨데메르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지금 벨데메르는,

    “가운을 벗도록 하지.”

    마치 르니예를 유혹하는 것처럼 굴었다. 르니예는 입맛을 다시면서 그 이유를 고민했다.

    왤까. 뭘까.

    “말리진 않는군.”

    “지금 말리려고 했어요.”

    그가 가운을 진짜 벗으려고 하자, 르니예가 벨데메르의 가운 끈을 잡으며 말렸다.

    “그대가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짜릿한 경험 정도 하나 만들어 주면 그대가 오래오래 추억할 테니.

    머지않은 미래에 르니예는 가운만 봐도 오늘 일이 떠올라 아쉬움에 눈물짓게 될 것이다.

    벨데메르는 가운 끈을 잡은 르니예의 손등을 쥐고서, 옆으로 잡아당겼다. 허술하게 묶여 있던 끈이 툭 풀렸다.

    조각처럼 잘 빠진 몸이 드러났다.

    “……아.”

    침이 꿀꺽 넘어갔다. 벨데메르가 왜 이러는 건지 생각을 해야 하는데, 하기가 싫었다.

    르니예가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벨데메르는 그녀의 손을 제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벨데메르, 이러면……!”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왜 뿌리치지 않지?”

    르니예는 얼마든지 벨데메르를 뿌리칠 수 있었다. 그는 르니예의 손등을 아주 살짝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르니예는 그의 손을 따라 손으로 벨데메르의 복근을 훑는 대신, 그를 밀어낼 수 있었다.

    “다른 여자에게는 허락한 적 없는 몸이야. 그건 그대도 알겠지만.”

    “알죠.”

    그것도 아주 잘 알죠.

    매끈하게 울퉁불퉁한 그의 복근을 훑으며 르니예는 입맛을 다셨다. 욕망으로 탁해진 르니예의 눈동자를 보면서 벨데메르는 옅은 실소를 흘렸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 에드윈에게는 만족하지 못하겠지.

    “그럼 이만 잘까?”

    “그, 그래요.”

    르니예는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침대에 누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르니예는 마법에 홀린 것처럼 벨데메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누가 와도, 하다못해 에드윈이라고 하더라도 침대에 누울 수밖에 없으리라.

    “저, 저기, 벨데메르, 이래도 정말 괜찮아요?”

    “뭘 말이지?”

    “그러니까, 이렇게 끌어안고 자도 괜찮겠어요?”

    르니예는 머리 뒤로 닿는 것이 베개가 아니라 벨데메르의 팔이라는 것에 기함할 뻔했다. 사이가 좋을 때도 팔베개는 안 했었는데.

    “물론이지, 르니예.”

    “하지만.”

    “내 품에 안겨서 자려는데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나?”

    르니예가 고개를 끄덕이자 벨데메르의 눈에 냉기가 어렸다.

    마음에 걸리는 그게 에드윈은 아니겠지.

    “내 소원 때문에 싫은데도 참고 이러는 거라면, 안 그래도 돼요.”

    다행히 에드윈은 아니군.

    “소원 때문은 맞지만 싫은 건 아니다. 그리고 그대가 이혼한다 해도, 내가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면 소원이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르지.”

    벨데메르가 옆으로 누워 르니예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달빛이 벨데메르를 비추었다. 르니예는 신의 은총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대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 줄 예정이야.”

    “구, 굿나잇 키스요?”

    르니예가 말을 더듬었다. 그러면 좋은 밤이 아니라 뜨거운 밤이 될 거 같은데.

    “싫은가?”

    싫을 리가. 다만, 벨데메르의 이런 급격한 심경 변화가 마음에 조금 걸릴 뿐이었다.

    그러나 르니예는 그의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가 눈을 지그시 감기에 이르렀다.

    “…….”

    눈을 감은 르니예를 본 벨데메르는 계획대로 되어감에 만족스러웠다. 이런 밤을 몇 번 지나고 나면 르니예는 무덤에 들어가서도 저를 잊지 못하리라.

    “르니예.”

    벨데메르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르니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제 입술로 촉촉하게 뭉개지는 여린 살에 척추로 찌르르한 감각이 올라왔다.

    “하아.”

    짧게 붙였다가 뗀 입술에도 르니예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벨데메르는 르니예가 오래 숨을 고르도록 두지 못했다.

    그는 갈증이라도 난 사람처럼 다시금 르니예의 입술을 찾았다. 그가 르니예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르니예가 작게 소리를 냈다.

    “……아.”

    그렇게 벌어진 입술 틈새로 벨데메르가 파고들었다. 르니예의 더운 숨이 그에게 흘러들었다. 달았다. 달아서 놔주기 싫을 정도로.

    “으응, 응.”

    르니예가 숨이 모자란 듯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벨데메르는 집요하게 쫓았다.

    “수, 숨이, 숨을 좀.”

    잠깐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르니예가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벨데메르가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다.

    “…….”

    벨데메르가 아쉬운 듯, 르니예에게서 떨어졌다.

    “그대는 폐활량이 형편없군.”

    벨데메르의 시선은 저로 인해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에 머물렀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쓱 닦아 주었다.

    “폐활량을 좋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 생각은 없나?”

    손끝으로 느껴지는 말랑함이 꽤 좋았다. 르니예를 제게 푹 빠지게 하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은 이쪽인지.

    벨데메르는 고민했다, 르니예의 입술을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저기, 벨데메르?”

    르니예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그를 멈추려고. 그러지 않으면 밤새도록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러자 벨데메르는 조금 전까지 계획이 틀어졌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묻고 말았다.

    “왜 그러지? 아, 이제 다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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