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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26화 (26/120)
  • 26화. 입맞춤의 대가

    “도련님.”

    바딜은 지난 며칠 동안 벨데메르의 집 근처에서 잠복했다. 밤낮으로 관찰하던 바딜은 샤피로와 벨데메르의 행적에서 몇 가지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수고했다, 바딜. 감시하면서 특이 사항은 없었나?”

    바딜은 뭐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특이한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주인이란 작자는 이틀간 보이지 않더니, 늦은 밤에 홀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혼자? 은밀한 만남이 있었나 보군.”

    바딜은 에드윈이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게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두 보고했다.

    “그런데 도련님, 그 옷차림이 좀 그랬습니다.”

    “좀 그랬다는 게 무슨 뜻인가?”

    “긴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로브 바깥으로 보이는 다리가, 맨다리였습니다.”

    “잘못 본 거겠지.”

    바딜도 처음에는 제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 로브 자락이 벌어졌을 때, 그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대리석같이 희고, 조각같이 탄탄한 다리를 바딜은 분명히 보았다.

    “아마도 로브 안은 나신이었지 싶습니다.”

    “하.”

    에드윈은 바딜이 저를 놀리나 싶었다. 그러나 바딜은 그런 농담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돌아오고 나서는 단 한 발도 저택 밖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하인은 몇 번 밖을 왔다 갔다 했지만 그리 긴 외출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특별한 점은?”

    “아, 짐마차가 몇 대 들어왔는데 모두 책이었습니다.”

    “책이라.”

    에드윈은 혼란스러웠다. 알몸에 로브만 입고 돌아온 사내.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서책이 가득 담긴 마차.

    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쁜 의미로든, 좋은 의미로든.

    “다른 점은?”

    “다른 점은 없는데,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부인께서는 그 집에 들르지 않았나?”

    에드윈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아, 몇 번 들르셨습니다. 그래도 요즘 잠은 집에서 주무시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혹 작은 마님이 신경이 쓰이십니까?”

    에드윈은 고개를 젓지도, 그렇다고 끄덕이지도 못했다. 신경이, 쓰였다.

    언젠가는 르니예가 다른 남자를 만났으면 하기도 했었다. 르니예가 보이는 관심과 애정이 부담스러워서.

    한데 왜 이제 와 제 것을 빼앗긴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지.”

    만일 그자가 2왕자의 하수인이라면 부인은 반란에 연루된 것이니.

    반란에 르니예가 깊게 개입되면 곤란했다. 반란과 상관만 없다면, 르니예가 다른 누구를 만나든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벨데메르가 2왕자 쪽 사람처럼 보이니, 상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가 반란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해도 어떻게 보고만 있겠나.

    “그래도 최소한 밤거리를 나체로 쏘다니는 남자라고 경고는 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이건 그냥 일면식만 있는 사람이라도 해 줄 만한 조언이었다.

    “게다가 난 아직 르니예의 남편이기도 하니까.”

    * * *

    “지금 르니예는 뭘 하고 있지?”

    “책을 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오,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쿠키를 드시는 모양입니다.”

    마치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중계하던 샤피로가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주인님, 그런데 연구는 언제 하십니까?”

    벨데메르는 하루 종일 틈만 나면 르니예가 무얼 하고 있는지 물었다. 물어볼 때마다 르니예가 별걸 하지 않고 있음에도 그랬다.

    “연구에 진척이 없어 지루해 그런 것이다, 샤피로.”

    “그 책 한 권을 채 보지 못하셨으니 진척이 없을 수밖에요.”

    한 줄 보고 르니예 생각하고, 한 줄 보고 르니예 생각을 하니 연구에 진척이 있을 리가.

    “르니예 님이 무얼 하고 계시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르니예가 무얼 하는지 궁금하다기보다, 에드윈이라는 자가 무얼 하는지 궁금하군.”

    에드윈 라포어. 그자가 거슬렸다. 르나예의 말로는 그에게도 다른 여인이 있다고 하는데, 어째서 르니예에게 미련을 보이는 것 같은지.

    “르니예 님에게 미련이라도 있는 걸까요? 하긴 인간의 심리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벨데메르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샤피로는 가끔 세상에 나와 사람들과 어울려 살곤 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면, 대다수 인간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결혼했을 때는 자기 여자라고 생각을 했으니 막 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존재를 알고 나니 욕심이 생긴 겁니다.”

    “내 존재 때문에?”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니까요.”

    샤피로는 자신의 영민함에 스스로 감탄했다.

    “이러다가 이혼하고 난 다음에는 라포어 경이 르니예 님에게 매달리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달려? 왜?”

    “그야 재혼하자고…….”

    그제야 샤피로는 벨데메르가 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겁니까?”

    벨데메르는 눈 뒤쪽에서 불꽃이 튀는 기분이었다. 이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매우, 상당히 불쾌하다는 것.

    “나를 품었던 마음에, 다른 사내가 들어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더냐.”

    “불가능한 일이지요, 주인님.”

    “한데 너는 지금 르니예가 에드윈 라포어 같은 애송이로 나를 잊을 수 있다 말한 것이다.”

    그래, 이것이다. 내내 저를 불쾌하게 만든 것은. 르니예가 에드윈을 통해 저를 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거슬렸다. 저를 그리워하며 밤낮으로 울고불고해도 모자랄 마당에!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벨데메르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저는 그저, 르니예 님이 주인님을 잃고 너무 허전하여 전 남편에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럴 생각조차 못 들게 해야지.”

    저의 첫 키스를 가져갔을 때, 르니예는 이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는 했어야 했다.

    “평생 나를 그리며 살게 해 주지. 다른 남자를 만날 생각조차 들지 않도록.”

    벨데메르의 눈동자에 검은 안광이 서렸다.

    “그리고 그 애송이에게 주제 파악을 시켜 주어야겠다.”

    “주제 파악이라면.”

    “내 상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니 거만하지 않으냐. 그자에게 겸손함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어야지.”

    샤피로의 도자기 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라포어 경에게 그런 가르침까지 베푸시다니, 주인님께서는 정말 자비로우십니다.”

    소원이 이뤄지고, 다시 봉인된다 하더라도 절대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르니예는 하염없이 저를 기다리겠지.

    그 생각을 하니 벨데메르는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했다. 벨데메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르니예. 모든 소원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니.”

    * * *

    드디어 콜론의 면회 허가가 떨어졌다. 르니예는 부랴부랴 아버지를 만나러 감옥으로 향했다.

    좁고 더러운 감옥.

    거기에 앉아 있는 콜론을 보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죗값을 치르는 중이라지만, 르니예에게는 하나뿐인 아버지였으니.

    “아버지!”

    르니예는 철창을 부여잡고 콜론을 불렀다.

    “아버지, 괜찮아요?”

    “이보다 더한 데서도 지내봤다. 내 걱정은 마라.”

    콜론은 곁눈질로 에드윈이 같이 오지 않았나 살폈다.

    “에드윈은 같이 안 왔어. 같이 온다고 하는 걸, 내가 혼자 온다고 했어.”

    혹시나 콜론이 서운해할까 르니예는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했다.

    “잘했다. 안 그래도 너한테 긴밀히 해 줄 말이 있었다.”

    긴밀히 해 줄 말? 혹시 그것에 관한 이야기인가? 르니예는 철창으로 바짝 붙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금고에 있는 그 보석 얘기야?”

    르니예의 말에 콜론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인 거 아버지도 아는 거지?”

    “쉿!”

    콜론이 목소리를 낮추라고 경고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르니예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이다.”

    “그럼 왜 그걸로 어머니 안 살렸어?”

    르니예는 묻고 싶었다. 어린 르니예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내내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묻혀 살았었다.

    그런데 어머니를 살릴 방법을 알면서도 왜 살리지 않았을까?

    “네 엄마는 내가 죽으면 또 만날 텐데, 뭘.”

    생각 외로 덤덤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건 널 위한 거다, 르니예.”

    “나?”

    “그래. 나중에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쓰려고 둔 거야. 그러니까 뭐 남편 사랑을 받게 해 달라는 등, 그런 쓸데없는 소원 빌 생각은 마라.”

    르니예는 속으로 흠칫했다. 콜론은 예상외로 자기 딸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네 엄마도, 내 말에 동의했을 거다. 그러니 허튼짓 말고 금고 안에 가만히 놔둬.”

    “하지만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에드윈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잖아.”

    심지어 프리야가 한 번 훔치기까지 했다. 어쩌다 보니 르니예의 손에 다시 들어오긴 했지만, 그런 행운이 또 반복되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이 아비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어. 그래,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와라.”

    “이 와중에 여행을 가라고?”

    “그래, 갔다 오면 다 해결되어 있을 거다.”

    자세한 설명도 듣지 못했는데 면회 시간이 끝났다. 쫓기듯 감옥에서 나온 르니예는 그렇게 마차 안에서 조금 울었다.

    눈이 팅팅 부어서 내리는데, 에니가 르니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에니?”

    “샤피로가 다녀갔어요, 작은 마님. 벨데메르 님이 이제 그만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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