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25화 (25/120)
  • 25화. 연금술사 지망생

    외곽의 한 여인숙.

    3층의 가장 구석진 방.

    그곳에서 알 수 없는 기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흐, 이제 난 연금술사야.”

    반들반들한 금덩이에 초점을 잃고 히죽거리는 체이스의 눈동자가 비쳤다. 그는 아주 오래된 소원을 이뤘다.

    르니예는 체이스를 단순히 마법사라 알고 있었지만, 그는 연금술사였다. 아니, 연금술사 지망생이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돌을 금으로 바꾸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더는 아니지.”

    이제 그는 손만 닿으면 돌멩이를 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모든 돌이 금으로 변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세 번 중에 한 번은 금으로 변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닌가?

    돌을 금으로 만들었으니 그는 이 대륙의 유일무이한 연금술사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 부자야. 부자라고!”

    * * *

    벨데메르가 연구를 새로이 시작하며 필요한 것이 많았다.

    샤피로는 그가 이전에 쓰던 책과 연구자료를 마차로 실어다 날랐다. 그사이, 벨데메르의 상태가 궁금했던 르니예가 집에 들렀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오시는군요, 르니예 님.”

    샤피로의 인사 아닌 인사는 알아서 무시한 르니예가 책더미를 보고 물었다.

    “이게 다 뭐야?”

    “주인님께서 저주와 봉인에 관해 연구 중이십니다. 이 책들은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이죠.”

    그래, 벨데메르도 의문이겠지.

    소원을 이뤄 주는 동안, 다른 소원도 이뤄 줄 수 있다니. 르니예는 본인이 아이디어를 내놓고도 설마 했었다.

    “그런데, 샤피로. 저번에 신께서 벨데메르를 봉인한 거라고 했잖아. 왜 신께서 벨데메르를 조각상에 봉인한 거야?”

    “주인님께서는 한계를 넘어서려 하셨습니다. 신께서는 그게 마땅치 않으셨던 모양이죠.”

    금지된 주술을 썼을지도 모른다더니, 정말이었나.

    르니예는 작게 중얼거렸다.

    “벌을 내리신 거구나.”

    “그게 벌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죠?”

    단번에 벌이라는 걸 맞히다니. 샤피로의 눈이 의심으로 가느스름해졌다.

    저를 수상해하는 그 눈빛에 르니예는 어이가 없었다.

    “그럼 조각상에 봉인해 놨는데 그게 칭찬이겠어?”

    벨데메르 역시 침실에 있는 책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책을 사서 봤다니.”

    결혼 생활에 관한 책 가운데에 유행하는 통속 소설 한 권이 끼어 있었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완벽한 남편감이라고 해서 참고 삼아 사 본 것이었다.

    소설은 정략결혼을 한 부부가 맞바람을 피우다가 서로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내용이었다.

    [바자르의 어깨에 기댄 크리스티나가 작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에게도 넓은 어깨가 있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거예요.”

    크리스티나는 생각했다. 바자르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춘 남자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을 다른 남자에게서 찾으려고 했다니 이것이야말로 시간 낭비가 아니겠는가.

    생각하니 크리스티나는 조금 씁쓸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오, 크리스티나. 그 시간이 있었기에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아니겠소?”

    바자르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 위로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로 정부를 두고 서로를 비난하면서 그들은 사랑을 깨달았던 것이다.

    “맞아요. 그 작은 시련이 우리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바자르.”

    그리고 그들은 키스했다.]

    “더욱 돈독하게?”

    딱 에드윈과 르니예의 상황이었다. 벨데메르의 눈빛이 순간 서늘해졌다.

    “설마 내 존재가 그 둘 사이를 좋게 만드는 건가?”

    두 번째 남편인 것도 화나는데 심지어 그 둘 사이에서 이용을 당해?

    “아니지, 나를 품었다가 다른 남자를 품지는 못하겠지.”

    저번에 보니 에드윈이란 남자는 딱히 보잘 것도 없어 보이던데. 그런 남자에게 다시 돌아가지는 않겠지. 그러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할 것이다.

    “벨데메르, 들어가도 돼요?”

    노크 소리에 벨데메르는 흠칫했다가, 읽고 있던 책을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방금 뭐였어요?”

    “아무것도.”

    벨데메르는 단호하고 짧게 대답했다. 방금 읽어서 그런지 소설 속 크리스티나와 르니예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몸은 어떤지 궁금해서 와 봤어요.”

    “나쁘지 않다.”

    “다행이에요. 걱정했는데.”

    르니예는 밤새 고민했던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벨데메르, 있잖아요.”

    “뭐지?”

    “벨데메르가 다시 조각상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르니예의 질문에 벨데메르의 눈썹 사이가 단숨에 좁아졌다.

    “왜 나를 다시 조각상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지, 르니예?”

    그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내가 조각상에 갇혀 있는 동안 남편과 관계 회복이라도 해 볼 셈인가?”

    이제 와 남편에 대한 마음을 깨닫기라도 한 건가?

    “그런 거 아니에요, 벨데메르. 이혼을 최대한 빠르게 해서 얼른 벨데메르를 내 소원에서 자유로워지게 만들 테니까 두고 봐요.”

    르니예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그러면 벨데메르는 나한테서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영영.”

    “영영?”

    영영, 그 말은 다시는 안 보겠다는 뜻이지.

    소원이 이뤄지고 나면 보통 그렇게 되지만, 심기를 거스르는 단어였다. 당연한 일이 어째서 신경을 긁는지 벨데메르는 그 감정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르니예가 그를 떠나려고 준비하는 듯한 상황이 썩 유쾌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괜찮은 거 봤으니까 저는 이만 갈게요.”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잠깐.”

    벨데메르가 그런 르니예를 멈춰 세웠다. 르니예가 돌아가는 그곳, 상단에는 에드윈이 있었다.

    온종일 붙어 있으며 에드윈과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지.

    “왜요, 벨데메르?”

    “그대에게 사역마를 하나 만들어 주고 싶은데.”

    “나한테요?”

    “사역마가 있으면 그대가 어딜 가든 늘 따라다닐 테니, 저번처럼 납치당해도 내가 금방 찾을 수 있겠지.”

    그리고 에드윈과 무슨 짓을 하는지 감시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르니예는 동그란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꼭 가져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오해는 말도록. 이건,”

    “알아요.”

    르니예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내 소원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는데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돼서 그런 거죠?”

    르니예가 주먹까지 불끈 쥐며 확신에 차 말했다.

    “벨데메르가 나를 걱정한다고 절대 오해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생각을 미리 눈치챘다는 것에 매우 뿌듯한 듯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르니예가 오해하지 않았다니 다행이긴 한데. 벨데메르는 뭔가 석연찮은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역마가 가지고 싶다는 거지, 르니예.”

    사역마를 만드는 데에도 마력은 필요하다. 르니예가 원치 않는 한 마력을 쓸 수 없으므로, 벨데메르는 르니예에게 넌지시 소원을 빌라고 한 것이었다.

    “아.”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저의를 금방 알아차렸다.

    “사역마가 가지고 싶어요. 그런데 사역마가 꼭 샤피로처럼 사람이어야 하나요?”

    갑자기 새로운 하인을 데리고 다니면 눈에 띌 텐데. 설명하기도 복잡하고.

    “항상 데리고 다니려면 그보다 작은 것이 좋겠군. 작은 동물 같은 것 말이야. 예를 들면 나비라든가.”

    “나비요?”

    “그래. 잘 어울릴 것 같군. 꽃에는 나비가…….”

    벨데메르는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다가 멈칫했다. 꽃에는 나비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면, 르니예가 마치 꽃 같다는 뜻이 아닌가.

    한때 담장에 서 있는 르니예를 보며 대체 누가 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이 세컨드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의 일이었다. 알고도 르니예가 꽃보다 아름다워 보이면 그건 정말,

    “문제가 있군.”

    “네? 무슨 문제가 있어요? 마법이 안 되는 거예요?”

    벨데메르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최근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드는 일이 많아 아직 혼란스러워 그런 것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그대가 꽃을 좋아해서 꽃과 어울리는 동물을 생각했을 뿐이다.”

    정확히는 곤충이지만.

    “절대 다른 뜻은 없어.”

    “……다른 뜻이 있으면 무슨 뜻인데요?”

    르니예는 의아해하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설명까지 해 주기를 바라나? 그런 건, 그대의 남편에게 가서 묻지 그래.”

    벨데메르는 흩어지는 이성을 부여잡았다. 그는 속아서 정부가 되어 버린 남자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왜냐면, 그는 속아서 정부가 되었으니까!

    “그대의 사역마는 꽃과 잘 어울리는.”

    “나비?”

    예쁜 나비를 상상한 르니예가 두 눈을 반짝였다.

    “벌이다.”

    * * *

    윙윙-

    “…….”

    르니예는 자기 눈앞에 날아다니는 꿀벌을 쳐다보았다.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사역마로 새도 아니고, 나비도 아닌, 꿀벌을 만들어 주었다.

    말벌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자꾸 보니까 오동통한 엉덩이가 귀엽기는 한데…….

    그냥 귀엽다고 치자.

    “작은 마님, 오셨어요? 어이쿠, 가만히 계세요. 지금 작은 마님 뒤에 엄청 큰 벌이 있거든요? 제가 잡아 드릴게요.”

    “진정해, 에니. 내 사역마야.”

    르니예가 손짓하자 꿀벌이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살포시 앉았다.

    역시, 엉덩이는 귀여워.

    “무슨 사역마가…….”

    에니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덧붙였다.

    “샤피로보다 훨씬 낫네요.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있는 게.”

    꿀벌이라 말을 못 해서 앉아 있는 것뿐이지만, 어쨌든 얌전하긴 했다. 에니는 르니예의 책상 위에 채무 장부를 올려놓았다.

    “저번에 말씀하신 채무자 목록이에요. 페더리 씨 있는 부분은 따로 표시해 놨어요.”

    “그래?”

    르니예는 에니가 표시해 둔 페이지를 열었다.

    “겨우 이거 빌렸는데, 이자가 이만큼이라고?”

    중간에 몇 번 연체가 있긴 했지만 과했다. 아주 과했다. 르니예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잠깐만, 메리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서 일한 지 십 년이 넘지 않았나?”

    “십 년이 뭐예요, 십오 년도 더 됐을걸요.”

    “그런데 아직도 이 빚을 다 못 갚았다는 게 말이 돼?”

    르니예는 드디어 뼈아픈 진실을 마주했다.

    “크게 한번 손볼 필요가 있겠어.”

    어쩌면 아버지가 없는 지금이 적기일 수도 있겠어. 이렇게 말하니까 엄청 불효녀 같은데.

    하지만 평소에도 딱히 효녀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천하의 불효녀 수준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내 사역마야.’

    ‘무슨 사역마가……. 샤피로보다 훨씬 낫네요.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있는 게.’

    한 주인에게서 만들어진 사역마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 같은 마력이 흐르기 때문이다. 해서 샤피로와 르니예의 꿀벌 또한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다.

    해서 르니예와 에니가 나누는 말을 엿들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르니예는 지금 무얼 하고 있지, 샤피로?”

    “제 험담을 하고 계십니다만.”

    샤피로는 르니예의 상황을 중계하다가 자신의 주인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주인님께서 스토커 같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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