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24화 (24/120)
  • 24화. 소원을 말해 봐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진짜야?”

    체이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벨데메르 님께서 정말 아이를 점지해 주신 게 맞아?”

    “……응?”

    아이를 점지해 줘? 그런 소원을 들어줬을 리 없는데?

    “자세히 설명해 봐."

    “어떤 여자가 열흘 밤 동안 벨데메르 님 조각상에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대.”

    “그래서 정말 아이가 생겼대?”

    “어.”

    무언가 이상하다. 아니, 확실히 이상하다. 소원을 비는 방식이 틀리다. 게다가 벨데메르는 내내 조각상 밖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 소원을 들어준단 말인가.

    “왜? 아니야?”

    “응, 아니야.”

    벨데메르나 샤피로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아니다. 그냥 아기가 생길 때 되어서 생긴 모양인데, 그걸 조각상 덕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긴, 워낙 성스럽게 생기기는 했지. 소원을 빌고 싶게 생겼어.

    “뭐야, 아쉽네.”

    체이스가 아쉬워하며 입맛을 쩝 다셨다. 그때, 르니예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너, 소원을 빌 거 있다고 했지?”

    “응. 지금 빌러 왔다니까?”

    “그럼 여기서 딱 기다려.”

    벨데메르의 서재.

    샤피로는 벨데메르가 남긴 기록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조각상에서 나오게 된 뒤로 벨데메르는 계속해서 자신의 저주에 관해 연구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연구한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에 차 열어 본 노트에는 정갈하고 성스러운 글씨체로,

    “사랑받는 남편의 열 가지 비밀?”

    따위가 쓰여 있었다.

    “……토마토 스튜 맛있게 끓이는 비법. 밀의 종류에 따른 숙성 기간.”

    내내 이런 걸 연구하신 건가? 이건 뭐랄까, 아주, 최악이다.

    “쓸모가 있는 게 하나도 없다니!”

    주인님, 대체 서재에서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샤피로!”

    그때였다. 르니예가 샤피로를 찾아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무슨 일이십니까, 르니예 님? 주인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좋은 생각이 나서.”

    르니예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다시 소원을 빌면 벨데메르가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어때?”

    벨데메르의 조각상, 블러디 사파이어, 소원을 빌 사람.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다.

    “르니예 님, 소원을 빈다고 해서 다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르니예 님께서 특이 케이스라니까요?”

    “하지만 될 수도 있잖아. 안 해 보고는 모르는 일 아니야?”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 대대적으로 알려지면 세상에 큰 혼란이 생길 겁니다.”

    샤피로가 블러디 사파이어를 전설처럼, 옛날이야기처럼 흘리고 다닌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만일 소원을 들어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끼리 치열하게 다툴 것이다.

    피바람이 불 것이고, 어쩌면 그 과정에서 벨데메르가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은밀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해 보면 어때?”

    “……좋습니다. 주인님께서 괜찮으신지 걱정이 되니까요.”

    그렇게 르니예는 샤피로를 설득해 데리고 나왔다. 체이스의 소원이 이뤄지면, 최소한 벨데메르가 멀쩡하다는 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체이스와 샤피로, 르니예는 나란히 앉아 거리에 인적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지금 소원을 비십시오.”

    샛별이 뜨고, 인적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잠들었고 거리는 고요했다.

    르니예는 목걸이에서 블러디 사파이어만 빼내 체이스에게 건넸다.

    “소원은 한 가지만 말할 수 있고, 중간에 바꾸거나 취소할 수 없어.”

    “알겠다니까.”

    “신중하게 빌란 뜻이야.”

    경험자의 충고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체이스는 블러디 사파이어를 한 번 꼭 쥐었다가 조각상의 입술 사이에 올려놓았다.

    샤피로가 긴장된 얼굴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제발 되게 해 주세요. 정말 정말 착하게 살게요.”

    르니예는 두 손을 맞잡고 조용히 기도를 읊조렸다.

    “기도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응?”

    “애초에 벨데메르 님을 저 안에 봉인한 것이, 르니예 님이 찾는 그 신이니까요.”

    르니예는 신이 왜 벨데메르를 조각상에 봉인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블러디 사파이어가 벨데메르의 입술 사이로 녹아 사라지는 장면을 보느라 까맣게 잊어버렸다.

    “벨데메르 님,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체이스는 놀란 와중에도 차분하게 말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됐다. 됐어. 벨데메르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제 소원은 돌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소원을 말하던 체이스는 순간 멈칫했다. 체이스가 원래 빌려고 했던 소원은 돌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비법을 알려 달란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 비법에 구할 수 없는 재료가 필요하다면? 비법을 알아봐야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돌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체이스는 막판에 ‘비법’에서 ‘능력’으로 소원을 바꿨다. 중간에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군더더기 없는 소원이었다.

    적어도 남편이 되어 달라는 소원보다는 훨씬 나았다.

    “네 소원은 이뤄졌다.”

    “뭐야, 된 거야? 아무 느낌도 없는……!”

    체이스는 르니예와 샤피로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해하다가, 갑자기 조각상이 깨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벨데메르!”

    르니예의 소원을 들어줄 때처럼, 벨데메르는 깨진 조각상에서 한 발 한 발 빠져나왔다.

    “와우.”

    그때처럼 그는 알몸이었다. 샤피로가 얼른 로브를 둘러 주기는 했지만, 체이스가 그의 몸을 볼 시간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역시 대마법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체이스는 홀린 듯이 손뼉을 치며 감탄을 내뱉었다.

    “주인님,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없다. 오히려.”

    벨데메르는 주먹을 짧게 쥐었다 펴며 말했다.

    “몸이 아주 가볍군.”

    조각상으로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좋았다. 르니예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벨데메르.”

    조각상 밖으로도 나오고 아주 멀쩡…….

    “잠깐.”

    조각상 밖으로 나왔다는 얘기는, 조각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이뤄 줄 수 없는 소원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는 건데.

    “그럼 내 소원은 아직도 안 이루어진 거야?”

    르니예의 말에 벨데메르가 로브에서 팔 한쪽을 빼냈다. 그의 팔에 'LI' 즉 51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둘 중 누군가의 소원은 이뤄졌군.”

    벨데메르는 르니예와 체이스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너, 가서 네가 능력을 얻었는지 확인해 봐라.”

    “저, 저요?”

    체이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저 자신을 가리키다가, 자신이 빈 소원이 떠올랐는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체이스!”

    르니예가 발치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그에게 던졌다. 체이스가 날아오는 돌멩이를 탁 잡았다.

    “자, 이제 이 돌을 금으로 변……!”

    “변했다, 변했어!”

    “금, 금이다!”

    체이스와 르니예는 달빛에 번쩍번쩍 빛나는 금덩이를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르니예가 던진 돌멩이를 그저 잡기만 했는데, 순식간에 금으로 변한 것이다.

    “금이야, 금!”

    “조용히 하십시오. 온 마을 사람들을 다 깨우실 작정입니까?”

    체이스는 좋아서 날뛰다가 샤피로에게 한 소리 들었다. 그래도 귀까지 쭉 벌어진 입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눈치를 쓱 보았다.

    “아직도 제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나 봐요.”

    “그대가 아직도 이혼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르니예는 민망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얼른 이혼하고 소원을 이뤄 버려야지, 눈치 보여서 살 수가 있나.

    “저, 그런데, 깨진 조각들은 어떻게 하죠?”

    체이스가 금으로 변한 돌멩이를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벨데메르가 있던 자리에 깨진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챙겨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안 돼. 영주님이 자기 소유 물건이라고 인장을 붙여 놨어.”

    유일하게 깨지지 않은 것은, 영주 가문의 문양이 적힌 명패였다.

    “주인님의 조각상이 왜 영주의 물건입니까?”

    “멋있으니까 가지고 싶었겠지. 솔직히 좀 멋있어? 나라도 훔치고 싶었을걸.”

    물론 훔치기 전에 다 깨져 버렸지만.

    “아무튼.”

    르니예가 깨진 조각을 바라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해 뜨기 전에 원상복구 해 놔야 한다는 거지.”

    그렇게 그들은, 물론 벨데메르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밤이 새도록 조각상을 이어 붙였다.

    * * *

    다음 날, 르니예가 새벽까지 조각상을 이어 붙이느라 피곤해 아직 꿈나라에 있을 때.

    벨데메르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다.”

    그는 창가에 앉아 자신의 팔목을 들여다봤다.

    선명하게 나타나는 LI, 즉 51이라는 숫자. 체이스의 손이 닿자 금으로 변하던 돌멩이.

    모든 것이 소원을 이뤄졌다는 증명이었다.

    “하지만 르니예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지.”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것이 르니예가 소원을 빌고 나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르니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아니면 르니예의 소원 그 자체가 원인인지도 모르지.”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라.

    다른 시각으로 그 소원에 대해 고민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만약, 또다시 조각상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예상보다 빠르게 봉인을 깰 수도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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