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23화 (23/120)

23화. 보석은 돌고 돌아

“이거 혹시 내 소원이 이뤄진 건 아닐까?”

블러디 사파이어를 주워 든 르니예가 대답을 구하듯 샤피로를 쳐다보았다. 이런 일은 샤피로가 더 많이 겪었을 테니까, 알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글쎄요.”

그러나 샤피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소원 때문에 봉인에서 벗어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단 말입니다.”

그들은 혼란에 빠졌다. 아닌 밤중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르니예가 나타난 후부터 알 수 없는 일들의 향연이었다.

“평소에는 어떻게 했는데?”

“소원이 이뤄지고 나면, 주인님께서 다시 봉인되셨고, 그러면 제가 블러디 사파이어를 주워 가지고 있었습니다.”

샤피로는 차근차근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런 다음에 소원이 있는 것 같은 인간에게 전달했지요.”

소원을 빌라고 블러디 사파이어를 건네주어도 소원을 비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사파이어를 가져다 팔았다.

그렇게 보석이 돌고 돌다가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을 믿는 이에게 가곤 했다. 반신반의한 채로,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은 소원을 빌러 왔다.

“마지막으로 건넨 사람은 한 상인이었습니다.”

꽤 오래된 일이었다.

“어린 딸이 있었는데 아내가 매우 아프다고 하더군요. 그에게 빌어야 할 소원이 있어 보이기에, 사파이어를 건넸습니다.”

한 상인, 어린 딸, 아픈 아내. 르니예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 사람은 소원을 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리고서 소원을 빈 사람이 나구나?”

“그렇습니다.”

샤피로는 르니예의 손에 들린 블러디 사파이어를 보다가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알아봐야겠습니다.”

샤피로는 한숨을 푹 쉬며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주인님의 연구 노트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샤피로는 서둘러 저택으로 향했다.

“샤피로, 이거, 이건 어떡해?”

샤피로는 당황한 나머지 블러디 사파이어를 두고 가 버렸다. 르니예는 그 보석을 손에 꼭 쥐었다.

그 상인이 아버지였던 걸까? 만약 그게 아버지라면 왜 소원을 빌지 않고 금고에 넣어뒀던 걸까?

궁금한 게 많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블러디 사파이어를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르니예는 해가 뜨자마자 상단에 있는 금 세공업자에게로 향했다.

“이거 목걸이로 만들어 줄 수 있어요? 보석은 뺐다 꼈다 할 수 있게.”

“작은 마님이 늦으시네.”

“무, 무슨 소리야. 지금이 아침인데, 늦으시다니.”

“늦잠 주무시는 거 아니냐고 물은 건데.”

이런, 젠장. 말렸다.

에니는 얄밉게 웃고 있는 프리야에게 이를 까득 갈았다. 프리야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진 때부터 에니는 프리야를 경계했다.

심지어 프리야는 이제 아예 대놓고 르니예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그래, 나 꿍꿍이 있다.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식이었다.

“왜, 어디 나가셨어?”

“아니? 아닌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심호흡하자, 에니. 말리면 안 돼. 에니는 한 박자 쉬고서 대답했다.

“쓸데없이 내 옆에 있지 말고 가서 네 할 일을 해. 할 일이 없으면, 내가 만들어 주고.”

상단에서 에니는 하녀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니는 충분히 프리야에게 일거리를, 그것도 온종일 해도 끝나지 않을 일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괜히 할 말 없으니까.”

“뭐야?”

다 들리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프리야가 휙 돌았다. 에니가 그 뒷모습을 향해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순간이었다.

“작은 마님.”

“둘이 같이 있었어?”

르니예가 등장했다.

“왜 거기서 오세요?”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람도 없이 르니예는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서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 아침에 공방에 들르느라. 근데 왜 둘이 같이 있어?”

둘이라 함은, 프리야와 에니를 말하는 것이었다.

“프리야가 할 일이 없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가 하나 만들어 주려고요.”

에니의 얄미운 목소리에도 프리야의 시선은 르니예의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건 분명 그 보석이다. 소원을 빌 수 있는 보석.

방에다 두는 것보다 몸에 걸고 다니는 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건가? 쯧, 그게 내가 바꿔 놓은 가짜 보석인 줄도 모르고.

“프리야, 정말 할 일이 없어?”

“네? 아, 아니요. 많아요. 그럼 전 이만.”

프리야는 속으로 르니예를 비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프리야가 떠나고서야 르니예는 에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시 조각상으로 들어가셨다고요?”

“그래, 미치겠어.”

르니예는 아주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일단 샤피로가 방법을 알아본다고 했으니 기다려 보려고. 아, 그리고 카밀 숙부한테 가서 채무자 명단 좀 받아다 줄 수 있어?”

“채무자 명단은 왜요?”

“내가 갚을 빚이 있다고 했잖아. 3년 전에 빌렸고, 이름은 페더리라고 했던 거 같아.”

숲 속에서 저를 구해 준 이들을 숲 속에서 나와 살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그들의 빚을 없애 주는 것이었다.

“부인.”

에니와 대화를 하며 방으로 가던 르니예는 방문 앞에 서 있는 에드윈을 보고 멈칫했다.

“에드윈, 당신이 내 방까지 어쩐 일이에요?”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드윈은 묘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제가 함께 갔다면 르니예가 납치당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목걸이, 그 사람이 선물해 준 겁니까?”

“아.”

르니예는 황급히 목걸이를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정신없어서 옷 속에 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 아는 마당에 숨길 필요 없습니다.”

“목걸이 이야기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텐데요.”

르니예는 다시 없을 정도로 냉정했다. 저를 보는 눈빛에 애정이라고는 없었다. 프리야와 관계를 추궁할 때도 르니예는 이런 눈빛이 아니었다.

“그날 부인께서 납치당한 건, 내 책임이 큽니다.”

“아니에요. 에드윈이 내가 납치당할 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에 에드윈과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가 스며 있었다.

“아버님 면회 갈 거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에 내가 같이,”

“아뇨.”

르니예가 에드윈의 말허리를 잘랐다.

“혼자 갈게요. 아버지랑 할 말이 있어서.”

잠시 또 어색하고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르니예가 말을 하지 않아 그런 것이었다.

평소에 둘이 있을 때 항상 르니예가 조잘조잘 말을 해 정적이 없었다는 것을, 에드윈은 이제 깨달았다.

“숙부한테서 진짜 장부를 받았다고 들었어요.”

에드윈의 명령에 카밀은 하는 수 없었다. 상단주도 없는 와중에 그의 사위이자 신분까지 높은 에드윈이 달라는데 그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내가 반대해도 당신은 장부를 보겠죠. 이유도 알려 주지 않을 거고.”

에드윈에게서 답이 없었다. 르니예는 그 침묵을 긍정으로 읽었다. 에드윈은 왜 저렇게 장부에 집착할까.

“그럼 보는 김에, 또 탈세한 금액 있는지 없는지 알려 줘요.”

어떻게든 상단의 흠을 잡고 싶어 하는 에드윈이니, 탈세한 세금이라면 동전 한 닢까지 찾아내겠지.

그런 점에서 에드윈은 믿을 만했다. 게다가 르니예는 장부를 뒤적거릴 여유가 없었다.

“언젠가 부인도 나를 이해할 날이 있을 겁니다.”

“부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죠.”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르니예는 저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람이 저렇게 바뀌지? 역시 그 남자 때문인가?

에드윈은 벨데메르를 의심했다. 애초에 그가 르니예를 타깃으로 잡고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납치 사건도 혹시 그자가 꾸민 짓이라면? 자기가 르니예를 구해서 르니예가 완전히 저를 믿게 할 작전이었다면?

“수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도련님?”

에드윈은 평소에 하지도 않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걸 들은 바딜이 에드윈에게 물었다.

“그 남자 말이다. 어떻게 그 숲길로 르니예가 나타날 줄 알았을까?”

마차는 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런데도 그리 갔다는 건, 르니예가 마차에서 내려 걸어올 거란 사실을 알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 남자가 수상하다.”

“저도 그렇습니다.”

바딜이 목소리를 낮춰 에드윈에게 넌지시 물었다.

“제가 며칠 따라다녀 볼까요?”

“……그러도록.”

“벨데메르.”

르니예는 벨데메르 조각상이 잘 보이는 곳에 쭈그려 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조각상에서 나왔다가, 도로 들어갔다가. 조각상이 깨진 채로 있으면 어쩔 뻔했나.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르니예가 벨데메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민하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가씨도 다리가 아파?”

“네? 아, 예.”

직접 뜨개질을 한 듯한 숄을 두른 노파가 르니예의 옆에 앉았다.

“젊은 아가씨가 벌써부터 다리 아파서 어쩌누.”

르니예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러게요, 하고 대답했다.

“흠.”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노파가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르니예가 손으로 괜히 볼을 만지작거렸다.

“아가씨 관상을 보니 남편 복이 많은 얼굴이군.”

아, 너무 많아서 탈이지.

“고민도 많고.”

“그것도 관상에 나와요?”

“아니, 여기 쭈그려 앉아서 한숨 쉬는 걸 보면 당연히 고민이 많겠지.”

그렇겠군. 르니예는 금방 수긍했다.

“하지만 곧 귀인이 나타나겠어.”

“귀인이요? 어디서요?”

“저기 골목길에서.”

골목길에서? 귀인이라고 골목길을 다니지 말란 법은 없지.

노파는 딱 그것만 말해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르니예는 여전히 거기 앉아 있었다.

그렇게 저녁 시간이 막 지날 무렵, 누군가 벨데메르의 조각상으로 다가왔다.

“……체이스?”

수상한 사람처럼 하고 다니는 꼴이 멀리서 봐도 딱 체이스였다.

“거기서 뭐 해?”

체이스는 벨데메르의 조각상에 손바닥을 올리고 있다가 르니예를 보고 흠칫 놀랐다.

“아니, 매끈한 게 만져 보고 싶어서.”

“거짓말도 좀 성의 있게 해 봐라.”

르니예가 혀를 찼다. 체이스는 발끈해서 말했다.

“그래, 나도 소원 빌었다.”

“소원을 빌어? 누구한테?”

“누구긴, 벨데메르 님한테지. 이렇게 된 김에 물어보자. 벨데메르 님이 소원을 이뤄 준다는 게 진짜야?”

르니예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 어떻게 그걸…….”

벨데메르가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이라는 비밀이, 벌써 영지 내에 알려졌단 말이야?

이거 큰일인가?

당연히 큰일이지! 젠장!

0